해 질 녘 피렌체 아르노 강변.
해 질 녘 피렌체 아르노 강변.

문화에 기대어 먹고사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이다. 이탈리아는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문화로 먹고사는 이 나라가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전에 전성기를 보낸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전철을 밟을지, 중국처럼 새로운 도약을 할지 잘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지정학적으로 이탈리아가 다시 고대 로마 같은 패권국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진앙(震央)이 됐던 천재적 창의는 적어도 아직 유효하다고 본다.

올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서거 500주기이다. 최근 여행을 다녀온 로마와 피렌체, 토리노, 베네치아에서 모두 그를 기념하는 전시회가 성황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대표작 ‘모나리자’가 있는 파리가 더욱 북적일 것이다. 음악기행을 통해 먼저 소개할 사람 역시 올해 서거 150주기를 맞은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1869)이다. 그는 프랑스 태생이지만 창작의 뿌리는 이탈리아에 있다.

최근 새로 발견된 벤베누토 첼리니의 유일한 자화상. ⓒphoto 위키피디아
최근 새로 발견된 벤베누토 첼리니의 유일한 자화상. ⓒphoto 위키피디아

첼리니에 빠진 괴테를 존경한 베를리오즈

베를리오즈를 만나기 위해 처음 찾은 곳은 산탄젤로성(Castel Sant’Angelo)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야간 댄스파티가 열렸던 테베레 강가의 고성이다. 이곳에서 벤베누토 첼리니라는 사람과 만났다.

첼리니는 미켈란젤로가 25세 되던 1500년에 미켈란젤로의 탄생지인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맏아들의 이름을 ‘환영한다(Benvenuto)’라고 지으며 자신과 같은 음악가로 키웠지만, 아들은 이내 스스로 원한 금 세공사의 길을 걸었다. 일찍부터 재능을 보인 그는 메디치 가문의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눈에 들었다. 때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로마로 쳐들어와 교황을 겁박하던 무렵이었다. 첼리니는 이곳 산탄젤로성에 피신한 교황군에서 포병으로 맹활약했다. 한편 교황은 첼리니에게 교회의 보물을 금괴로 녹여 보관하게 했다.

교황의 신뢰는 시기와 모함을 낳았다. 첼리니가 보물을 빼돌리고 위조화폐를 찍었다는 누명이었다. 클레멘스 7세 교황은 끝까지 첼리니를 신임했지만, 후임 바오로 3세는 그를 요새이자 감옥인 산탄젤로에 가두었다. 천신만고 끝에 옥살이에서 벗어난 첼리니는 다빈치를 아꼈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불려가 황금 소금 그릇을 만들었다. 현재 빈 미술사 박물관의 1등 소장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내 고향 피렌체로 돌아온 첼리니가 필생의 역작을 제작하니, 현재 시뇨리아 광장에서 미켈란젤로의 ‘다윗’과 마주 보는 ‘페르세우스’ 청동상이다. ‘다윗’은 손상을 우려해 진품을 실내로 옮기고 광장에는 모조품을 두었지만 ‘페르세우스’는 첼리니가 그 자리에서 옮기지 못하게 받침에 녹여 붙였다. 머리카락이 실뱀으로 돼 있어 자신을 보는 사람을 돌로 만든다는 메두사의 머리를 베어 한 손에 치켜든 페르세우스. 그것을 본 광장의 영웅들, 미켈란젤로의 다윗과 반디넬로의 삼손이 돌이 된 것만 같다.

이상, 짧게 간추린 첼리니의 생애는 모두 그가 직접 적은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로마 산탄젤로성의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첼리니가 적장을 두 동강 냈다고 자랑했던 포대와 그가 시편 ‘깊은 수렁으로부터 주님을 부르나이다’를 노래했던 감옥까지 찬찬히 살폈다.

불꽃 같은 삶을 산 첼리니의 자서전은 뒷날 괴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괴테는 영어로 출판된 책을 독일어로 번역해 소개했고, 스스로 ‘이탈리아 기행’ ‘시와 진실’ ‘에커만과의 대화’ 같은 자기 기록을 잇따라 남겼다.

첼리니의 삶과 예술은 괴테를 존경한 베를리오즈에 의해 다시 한 번 조명되었다. 베를리오즈는 자기 생애를 기록으로 남긴 유일무이한 작곡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벤베누토 첼리니’라는 오페라까지 작곡했다. 교황의 금괴를 빼돌렸다는 누명을 쓴 첼리니가 자신을 고발한 고관의 딸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 또 누명을 벗기 위해 필사의 노력으로 ‘페르세우스’를 완성하는 모습이 열정적으로 묘사된다. 실제 삶을 토대로 한 멋진 각색이다. 물론 로마의 카니발 무렵을 배경으로 한 음악 또한 최고이다.

이번 여행 중에 베를리오즈를 직접 들을 기회는 없었다. 2월의 카니발을 지나고 맞은 사순절 시기였기 때문에 아무리 종교적인 풍토가 옅어졌다고 해도 가톨릭의 나라 이탈리아에서 떠들썩한 음악은 금기시된다. 부활절이 지나야 다시 시즌이 재개되는 것이다. 때문에 오페라 천국 이탈리아도 콘서트뿐이다.

피렌체 피티궁전 내의 보볼리 정원. 작은 그림은 정원에서 상연되었던 베를리오즈의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
피렌체 피티궁전 내의 보볼리 정원. 작은 그림은 정원에서 상연되었던 베를리오즈의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

로마 산타체칠리아가 연주한 ‘합창 교향곡’

로마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학교이다. 16세기 교황의 칙령으로 개교할 때 음악가의 수호성인 체칠리아를 교명으로 썼다. 1908년 음악원 교수들이 모여 창단한 악단이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이다. 지난 4월 5일과 6일, 베를린 필하모닉의 새 음악감독인 키릴 페트렌코를 초대해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단 한 곡을 연주했다. 지난해 가을 뮌헨에서 만났던 페트렌코의 옹골찬 사운드를 로마에서 다시 들었다.

나는 평소 연주의 잘잘못보다는 ‘지금 여기서 이 곡을’ 듣는 의의를 살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클래식이라면 그게 그것일지 모르지만, 오페라와 교향곡은 엄연히 탄생 배경이 다르다. 오페라는 이탈리아 것이다. 다른 나라 오페라를 모두 합쳐도 이탈리아산(産)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교향곡도 본디 오페라 서곡으로 시작했지만 독립 장르로 발전한 곳은 독일이다. 교향곡은 관념론이다. 눈앞에서 오페라로 보여줄 여건이 되지 못하는 후발주자 독일이 머릿속으로나마 가장 높이 올라가려고 한 것이다. 베토벤이 완성했고 슈만, 브람스와 같은 후배가 확고한 전형을 세웠다. 때문에 독일이 아닌 프랑스나 러시아 교향곡이라고 하면 일본이나 중국 김치와 비슷한 것이다.

이탈리아에는 사실상 교향곡이 전무하다. 오페라를 두고 굳이 뜬구름 잡을 필요가 없었다. 우리야 연말이면 으레 ‘합창 교향곡’을 연주한다. 거의 맹목적이다. 독일도 아닌 이탈리아라면 그럴 수 없다. 동지에 팥죽 대신 짬뽕을 먹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날 로마에서 듣는 ‘합창 교향곡’이 식상하지 않고 더욱 값졌다.

2001년 이탈리아의 거장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고 바로 이곳, 로마 음악공원 강당(Auditorium Parco della Musica)에서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했다. 그날의 실황음반은 이 시대 금자탑으로 꼽힌다. 자기 나라 지휘자가 베토벤 음악의 결정판을 내놓았으니, 이는 한식 조리장이 최고의 초밥 장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번에는 시베리아 태생 유대인으로 베를린 필의 수장이 된 페트렌코가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몰았다. 숱한 음악회를 봤지만 이날 같은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팝콘서트처럼 들뜬 객석보다, 경기를 마친 운동선수들 같은 악단 반응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마치 ‘맨 오브 더 매치’를 축하하듯이 객원 지휘자 페트렌코를 환대했다. 악단의 음악감독 안토니오 파파노가 봤다면 질투했을 만한 갈채였다.

베토벤 이후 음악사의 패권은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오페라에서 교향곡으로 균형추가 이동했다. 이제 오페라 팬이냐 교향악 팬이냐로 양분된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고 불과 3년 뒤에 혁명적인 ‘환상 교향곡’을 작곡했고, 그로부터 2년 동안 로마의 메디치 빌라에서 유학했다. 채 서른이 되기 전이었다. 2년 동안의 이탈리아 체류는 잇따르는 ‘이탈리아의 해럴드’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앞서 말한 ‘벤베누토 첼리니’라는 걸작을 낳는 밑거름이 되었다. 만년의 ‘트로이인’과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 또한 이탈리아가 배경임을 보면,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의 이탈리아 사랑은 정말 각별했다.

벤베누토 첼리니가 활약했던 산탄젤로성에서 바라본 성베드로사원. 지하통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벤베누토 첼리니가 활약했던 산탄젤로성에서 바라본 성베드로사원. 지하통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페르세우스 청동상(오른쪽)을 보고 모두 돌이 된 듯한 다윗(왼쪽)과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청동상(오른쪽)을 보고 모두 돌이 된 듯한 다윗(왼쪽)과 헤라클레스.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이 강조한 형제애

로마에서 한 시간 반 거리인 피렌체에 도착하자 베키오다리 위에 놓인 첼리니의 흉상이 나를 반긴다. ‘벤베누토’라고! 17세기 초 오페라 양식이 태어난 피렌체에서 또 다른 음악 유산을 발견하고자 한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은 이른바 ‘그랜드 투어’의 가장 모범적인 결과물로 꼽힌다. 어느 날 아침 아무도 모르게 길을 떠난 괴테는 이탈리아를 통해 자기 예술의 자양분을 얻었다. 괴테는 르네상스의 요람 피렌체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놀랍게도 그는 피렌체에 단 세 시간을 머물렀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로마에 빨리 가고 싶어서”였다. 믿기지 않는다. 괴테가 시뇨리아 광장의 ‘페르세우스’를 보기나 했을까. 반면에 베를리오즈는 이탈리아 기행 중 피렌체에서 가장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한다.

피렌체 피티궁전의 안뜰 보볼리 정원으로 향한다.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의 모델이 된 곳이다. 정원 가장 깊숙한 곳에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의 분수가 있다. 1972년 5월 음악제 기간 이곳에서 특별한 무대가 연출되었다. 20세기 무용의 거장 모리스 베자르가 자신의 발레단과 함께 베를리오즈의 드라마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했다. 이 소중한 자료를 DVD는 물론 유튜브로도 볼 수 있다.

베를리오즈는 프랑스가 아닌 독일 작곡가였다면 베토벤 다음 자리에 올 만한 인물이었다. 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가장 좋아한다. 이 곡이 바로 로마에서 본 ‘합창 교향곡’을 충실하게 계승한 성악 교향곡이기 때문이다. 작곡가는 자유, 평등과 함께 프랑스혁명 3대 강령 가운데 하나인 ‘형제애’를 셰익스피어 고전과 결합했다.

교향곡 마지막에 로런스 수사는 두 집안의 다툼이 빚은 비극을 책망하며 형제애로 화해할 것을 주문한다. 원작에서 베로나 공작이 훈계하는 부분이다. 베를리오즈가 성악 교향곡으로 만든 이 관념적인 작품이 베자르의 춤을 통해 ‘총체예술’, 곧 오페라로 탈바꿈했다.

원작의 무대인 베로나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이래 이탈리아를 양분했던 교황파와 황제파의 대립이 바로 두 연인을 죽음으로 몰아간 원인이다. 베로나뿐만 아니라 리미니도 프란체스카와 파올로라는 비련의 주인공을 낳았다. 이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전한 단테 또한 교황파에서 갈라진 흑파(黑派)였기에 피렌체에서 쫓겨났다. 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원수 집안의 사랑 이야기가 20세기 뉴욕을 무대로 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아닌가!

원래 피렌체에서는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키로가 사중주단의 실내악을 들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르헤리치의 건강상 이유로 공연이 취소되었다는 말을 홀 앞에서 듣고 허탈하게 돌아왔다. 지난 반세기를 호령한 여걸이지만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다.

호텔로 돌아와 유튜브를 TV에 동기화시켰다. 낮에 거닌 보볼리 정원에서 47년 전 공연된 ‘로미오와 줄리엣’을 언제고 볼 수 있는 시대이다. 열악한 화질이라고 감동이 줄지 않는다.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의 관광지에 매년 그 인구보다 훨씬 많은 세계인들이 다녀간다. 대동소이한 패키지 상품과 똑같은 가이드, 반복되는 해설이 매일 다른 손님을 맞는다. ‘로마의 휴일’ 자리를 ‘다빈치 코드’가 이어받았고, 일본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의 빈자리는 또 우리나라 기행 프로그램이 차지한다. 도대체 무엇을 배워야 할까.

연말 ‘합창 교향곡’부터 바뀌길 바란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베토벤의 ‘장엄미사’가 그만큼 연주되어야 하고, 베를리오즈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인류애의 회복을 촉구할 만한 음악이다. 꼭 ‘합창 교향곡’이어야 한다면 오케스트라가 발레, 영상과 만나야 한다. 작년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것이 아니면 의미 없다.

이탈리아 대학의 미술품 복원학과는 세계 제일이다. 국보 관리 기술을 가르치는데 인문학, 자연과학, 공학, 예술의 최신 연구 성과가 총동원된다. 연출 및 무대미술학과도 최고 수준이다. 이 또한 찬란한 오페라 전통을 늘 살아 숨 쉬게 하는 비결이다. 그것이 곧 관광산업이라는 부가가치와 직결되니 금상첨화이다.

시작부터 순수예술이라는 것은 없다. 예술이 수용자의 목적에 부합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율성을 갖는다. 오페라는 오푸스의 복수(複數)이다. 워낙에 없는 형편에서 출발한 우리이지만, 단테의 스토리텔링, 첼리니의 솜씨, 베를리오즈의 음악, 베자르의 춤, 이렇게 여러 오푸스를 하나로 묶은 우리만의 오페라가 이 땅에서 선보이기를 기대한다. 오푸스 가운데 하나쯤은 우리 전통 예술이라면 더없이 좋을 터이다.

정준호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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