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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558호] 2019.05.20

2019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가다

100m에 걸친 흰 손 6쌍은 무엇을 의미할까

▲ 2019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열리는 알시날레 전시장에 설치예술가 로렌조 퀸의 작품이 설치되고 있다. 손 하나 넓이가 15m인 6쌍의 흰 손이 바다 위를 가로지르며 100m에 걸쳐 드리워져 있다. 베네치아 이미지에 걸맞게 ‘다리를 상징하는 손’이라고 한다. photo 유민호
“와인 몇 잔씩 마시고 취한 뒤에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맨 정신으로 보면 예술이라 부르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베네치아에 도착하자마자 이탈리아 친구로부터 들은 얘기다. 지난 5월 11일부터 시작된 ‘비엔날레 아르테(Biennale Arte)’가 ‘몇 잔 마실’ 무대라고 한다. 와인, 그것도 파티장에서 제공되는 무료 와인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임하는’ 기본 요소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재미있는 시간 속에 살기를(May You Live in Interesting Times)’이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테마다.
   
   비엔날레에 대한 기억은 7년 전이 마지막이다. 매년 베네치아에 들르지만 비엔날레는 항상 관심 밖이었다. 행사가 뜸한 겨울철에 머물기도 하지만 글로벌 시대에 편승한 예술에 지쳤다는 것이 더 큰 이유일 듯하다. 이를테면 ‘나눌수록 기쁨이 더해지는 예술’이란 식의 세계관에 대한 반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라고나 할까? 글로벌 스탠더드에 기초해 예술도 공유하자는 목소리가 쿨(cool)하게 퍼져간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으로는 ‘예술의 사회주의화’로 들린다. 듣기도 좋고 고상한 발상이지만, 결국 남은 것은 예술의 하향평준화다. 비엔날레가 공짜 티켓이 아닌 한 베네치아인조차 멀리하는 곳으로 추락한 현실이 이를 보여준다.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21세기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예술 하향평준화의 현장으로 느껴진다. 기묘한 것은 예술의 사회주의화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정체다. 간단히 말해 우리 식 강남좌파들이다. 무대 앞에 서서 박수를 받는 글로벌 예술가들의 대부분은 강남좌파 같은 사람들이다. 자수성가형 예술인들도 있겠지만 창조성 하나로 글로벌 아티스트에 오르기는 어렵다. 글로벌 아이돌그룹 하나 만드는 데도 엄청난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글로벌 시대 이후의 상식인 빈부격차 심화는 예술 분야에도 적용된다. 언제부터인가 돈으로 키워진 예술가들이 돈으로 예술을 흥정하는 ‘윈도 쇼핑(Window Shopping)’ 공간이 비엔날레가 돼버렸다. 가슴에 남을 만한 감동과는 무관한 인스턴트 예술이 판친다.
   
   
▲ 중국관에 전시된 작품 ‘Re(睿)’. 하늘에서 지구를 줌인하면서 사각형 속에 개개인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photo 유민호

   지옥도 같은 비디오예술 ‘48개의 전쟁영화’
   
   “비엔날레에서 감동을 찾는 것 자체가 우습다. 아마 수천 점이 전시될 듯한데, 하나라도 건지면 행운, 하나도 못 찾아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라. 비엔날레는 예술지상주의가 아닌 평화지상주의의 현장이다. 적어도 예술이라는 이름의 글로벌 이벤트가 벌어지는 한, 폭력이나 전쟁도 없다.”
   
   와인을 권하던 이탈리아 친구는 어느새 와인에 취한 채 ‘간디’ 같은 메시지를 던지기 시작했다. 가슴을 파고드는 예술이 아니라 21세기 글로벌 평화가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비엔날레 현장을 둘러보라는 충고다. 듣는 순간 뭔가에 한 방 맞은 느낌이 들었다. 편견과 무지로 똘똘 뭉친 꼰대의 자화상을 스스로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예술을 통해 평화란 개념을 떠올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정확히 50년 전인 1969년 3월, 존 레넌과 오노 요코가 보여준 베드 인(Bed In) 시위가 기억난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 맞춰 1주일 동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힐튼호텔 스위트룸에서 이뤄진 반전(反戰) 이벤트다. 지금도 유튜브에 들어가면 볼 수 있겠지만, 당시 서방의 유력 미디어 대부분이 침대 속 두 사람의 모습을 생중계로 보도했다. 뇌리에 선명히 남은 것은 침대 위 큰 창문에 나붙은 ‘Hair Peace, Bed Peace’란 글자다. 청년들의 긴 머리를 도덕적 타락으로 본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과, 인간의 본능인 섹스를 앞세워 전쟁을 멈추게 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평화로서의 예술’ 이전에 ‘평화로서의 섹스’가 이미 반세기 전에 등장했다. 스스로의 예단과 무식을 깨려는 결의와 함께 바로 다음날부터 3일 연속 비엔날레에 참관했다.
   
   5월 중순인데도 베네치아 전체가 어둡다. 온도도 낮고 잦은 비로 축축하다. 예년에 볼 수 없는 이상기후라고 한다. 덕분에 매년 터져나가던 비엔날레 방문객이 뜸해졌다. 리도발(發) 5-1번 보트를 타고 바치니(Bacini)에서 내렸다. 알시날레(Arsenale·조선소)로 향하는 ‘숨겨진’ 부두다. 비엔날레 아르테의 전시공간은 베네치아 전체다. 그러나 전시의 중심이 되는 곳은 북동쪽의 알시날레와 알시날레 남쪽 자르디니(Giardini·정원)에 들어선 파빌리온(Pavilion)이다. 알시날레는 주로 개인, 파빌리온은 국가 차원의 전시장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국가별 전시무대인 파빌리온이다. 2019년 참가국은 한국을 비롯해 무려 87개국에 달한다. 예술을 주제로 한 글로벌 올림픽이라 보면 된다.
   
   필자가 배에서 내린 바치니는 알시날레로 들어가는 현지인용 출입구다. 평소에는 알시날레 직원들만 다니지만, 비엔날레가 열릴 때면 특별히 개방한다. 보통 관람객의 대부분은 남쪽 자르디니에서 한꺼번에 몰려다니다가 나중에 알시날레로 향한다. 필자가 관람 여정을 거꾸로 택한 이유는 비엔날레의 진짜 맛은 파빌리온보다 알시날레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파빌리온 87개국 전시장은 간단히 말해 소프트파워 경연장이라 보면 된다. 국가적 차원의 자부심이나 아이덴티티를 찾는 사람이라면 중시하겠지만, 필자의 경우는 별로다. 예술이 국가 차원에서 주도될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너무도 자명하다.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총론이 지배하고 각론이 없는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외국인에게 선보인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정부 내 관리나 관계자들의 취미에 맞추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개인이 주도하는 알시날레 전시장은 그 같은 유혹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
   
   바치니를 통해 알시날레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흰 손 6쌍이 눈에 들어온다. 설치예술가 로렌조 퀸(Lorenzo Quinn)의 작품이다. 손 하나의 넓이가 무려 15m씩, 바다 위를 가로지르며 전장 100m에 걸쳐 드리워져 있다. 다양한 손가락 동작이 표현된 손이다. 쿵후의 손놀림으로도 보인다. 베네치아는 교회와 다리의 도시다. 베네치아 이미지에 걸맞게 ‘다리를 상징하는 손’이라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의식한 듯 “벽이나 장애물이 아닌 전 세계 모두를 연결시켜주는 평화의 다리”라는 것이 로렌조 퀸의 작품 의도라고 한다.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특징이지만 일단 전시 작품들이 모두 크다. 6쌍의 흰 손은 필자가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접한 설치예술 가운데 가장 크다. 바벨탑은 높이뿐만 아니라 크기 면에서도 남달랐을 것이다. 신의 노여움의 대상은 높이와 더불어 크기에도 해당됐을 듯하다. 비엔날레에 참가하는 개인 자격 예술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초대 예술가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초대 예술가는 대략 100명 중 1명꼴이라 보면 된다. 99명은 비싼 참가비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라는 명성에 매달리는 사람들이다. 1명에 속하는 로렌조 퀸은 이미 수차례 비엔날레에 초대된 설치예술계의 거장이다. 점점 더 큰 작품으로 등장하고 있다. 2년 뒤에는 과연 얼마나 더 큰 작품을 보여줄까?
   
   알시날레 안으로 들어가자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전위적 설치예술도 있지만 고전적인 작품들도 눈에 띈다. 그러나 2019년 비엔날레의 대세는 시각을 자극하는 비디오다. 보통 100인치는 됨 직한 초대형 비디오를 동원한 작품이 주류다. 물론 버추얼 기기를 통한 비디오 쇼도 넘쳐난다. 덕분에 품과 격의 비엔날레가 아니라 동네 전자오락실에 온 듯한 느낌도 든다.
   
   비디오 장르와 관련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크리스찬 마클레이(Christian Marclay)의 ‘48개의 전쟁영화(48 War Movies)’다. 스위스 출신 미국 국적의 크리스찬 마클레이는 이미 2011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최고 예술가로 선정된, 21세기 비디오 예술계의 대표주자다. 80인치 고화질 모니터에 실린 작품은, 48개 영화의 각 장면을 사각형으로 분리해 전체로 통합한, 이른바 비디오 맵핑(Mapping) 기법으로 창조됐다. 영상과 소리까지 합쳐져 48개 비디오를 동시에 압축해 듣는 오디오 예술이기도 하다.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비디오 맵핑 기술보다 48개 전쟁영화가 동시에 터뜨리는 ‘메아리’다. 섬뜩하게 느껴졌다. 인간의 고통, 분노, 죽음 위에 올라탄 사탄의 웃음소리에 비견된다고 할까? 만약 지옥에서 인간의 절규를 듣는다면 비디오 속 소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특징 중 하나로 글로벌 테마가 줄어든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녹색, 기후, 이민, 동성애, 반미(反美) 같은 글로벌 이슈를 다룬 작품이 ‘확’ 줄었다. 부분적으로 그런 이슈를 다룬 작품들을 볼 수는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2019년 비엔날레의 화두는 무엇일까? 열심히 찾고 뒤졌지만 결론은 없다. 하나로 압축하기가 쉽지 않다. 모두 각자의 입맛에 맞게 다양화된 세상이 2019년 비엔날레의 공통분모다. 분명한 것은, 예년에 비해 글로벌 이슈의 주가가 수직 하락했다는 점이다. 이제 예술가들도 지구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이나 주변 관심사에 더 주목할지 모른다. 페이스북이 개인 프라이버시에 반하는 애물단지로 변하고, 애플 아이폰 판매가 급감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현장에서 바라보는 한 글로벌 이슈는 이미 과거로 넘어갔다.
   
   
▲ 일본관에 전시된 작품 ‘코스모스 에그’. 큰 바위를 중심으로 우주, 자연, 인간의 희로애락이 담겼다. photo 뉴시스

▲ 벨기에관에 전시된 작품 ‘몬도 케인(Mondo Cane)’. 이번 베네치아 비엔날레에는 글로벌 거대 이슈를 다룬 작품은 줄어든 대신 가족이나 주변 관심사를 다루는 작품들이 많아졌다. photo 뉴시스

   한국·중국·일본관의 차이
   
   국가별 전시관이 있는 파빌리온에도 들렀다. 한국·일본·중국의 파빌리온을 비교해보고 싶었다. 먼저 한국 쪽으로 가려는데 바로 앞에 일본 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주제가 ‘코스모스 에그(Cosmo-Eggs)’다. 탁 트인 둥근 전시관의 벽에 흑백사진 4장이 이어져 있다. 큰 바위를 중심으로 우주, 자연, 인간의 희로애락이 사진 속에 담겨 있다. 이른바 ‘쓰나미 스톤(津波の石)’으로 불리는 큰 바위가 코스모스 에그의 정체다. 글로벌 시대 이전의 우주와 인간을 일본의 비극으로 연결시킨 철학적 작품으로 와 닿았다.
   
   한국관은 일본관 바로 뒤에 위치해 있다. 전시의 큰 주제가 눈에 들어온다. ‘역사는 우리를 실패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문제될 것은 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전시장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가 너무 좁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뻥 뚫린 일본 전시관과 대조적이다. 재일 한국인 여성의 얘기를 다룬 비디오가 한국관 전시의 주 내용이다. 바깥쪽 작은 비디오에는 갓을 쓴 선비가 춤을 추는 장면이 반복해서 나온다.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겠지만, 필자가 아는 한 비엔날레에서 역사를 주제로 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중국 전시관은 파빌리온이 아니라 주최국인 이탈리아와 함께 알시날레에 ‘특별히’ 들어서 있다. 주제는 ‘Re(睿)’다. 지혜라는 의미다. 들어가는 순간, 중국관이란 느낌이 든다. 엄청 크다. 한국관에 비해 거의 10배 크기다. 그렇지만 작품은 100인치가 넘는 초대형 비디오 3개에 불과하다. 입구의 작품이 흥미롭다. ‘유기적 세계’라는 제목의 비디오다. 하늘에서 지구를 줌인(Zoom In)하면서 좁혀간다. 일본 어느 도시가 비쳐지면서 행인들과 거리 모습이 정지 장면으로 모아진다. 이어 사각형 속에 개개인에 관한 정보가 따라붙는다. 일본인, 행인, 병자, 볼리비아인, 학생, 유모차…. 수십 명의 행인에 관한 정보가 마치 꼬리표처럼 개개인에게 달라붙는다. 이 작품을 보자마자 필자의 머리에는 ‘반체제 예술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중국공산당이 추진하는 조지 오웰 스타일의 감시 체제를 비꼬는 내용처럼 느껴졌다. 중국 정부 돈으로 참가한 이상, 결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제목을 ‘1984년, 글로벌 빅 브라더’로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중국 예술가들은 다른 나라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작고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크고 지구적인 것에 천착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3일간에 걸친 비엔날레 관람은 나름 대성공이다. ‘재미있는 시간 속에 살기를’ 바라는 비엔날레 주최 측 생각대로 정말 재미있게 봤다. 더불어 평화로서의 예술, 예술로서의 평화도 절감할 수 있었다. 감동과 무관하더라도, 싫든 좋든 앞으로도 계속 갈 수밖에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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