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성. ‘불밝힘굴’. 236×143㎝. 지본수묵. 2006
박대성. ‘불밝힘굴’. 236×143㎝. 지본수묵. 2006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 산숭해심(山崇海深)의 뜻이다. 산해숭심(山海崇深)으로 적기도 한다. 비슷한 단어로 산고수심(山高水深)이 있다. 산이 높아야 바다가 깊고, 바다가 깊으면 물고기가 많다. 그러니 높은 산과 깊은 바다는 수많은 생명을 키워낼 수 있는 터전이다. 한 사람을 평가하는 제문(祭文)에 ‘그의 덕은 산처럼 높고 물처럼 깊다’고 적으면 더 이상 부연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된다. 인품을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되기 때문이다. 산숭해심의 가장 이른 출처는 남송의 학자 팽귀년(彭龜年)의 시 ‘광수(廣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팽귀년은 송대의 대유(大儒)인 주자(朱子)와 장식(張栻)에게 종학(從學)했던 학자다. 그가 산숭해심을 쓴 지향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발자취다.

팽귀년이 쓴 이 단어를 조선의 선비들도 익히 알고 있었던 듯하다. 김정희(金正喜)가 쓴 ‘완당전집’ 제3권 ‘서독(書牘) 스물일곱번째’에도 등장한다. 김정희는 ‘함흥(咸興)을 지나다가 지락정(知樂亭)에 올라서 산해숭심 네 글자를 보았는데 글씨가 매우 기걸하고 건장하였다’고 적고 있다. 삼성리움미술관에는 김정희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戱海)’가 소장되어 있다. 이 글씨는 유홍준의 ‘완당평전’에 소개된 후 격렬한 진위 논란에 휩쓸리면서 유명세를 탔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완당평전’ 자체가 200군데 이상 오류가 있다는 공격으로 절판되는 바람에 현재는 이 작품의 뜻조차도 위조품으로 무시되어버린 상황이다. 그러나 ‘산숭해심 유천희해’가 품고 있는 웅대한 의미는 글씨 쓰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렇게 쉽게 버려져도 되는 간단한 세계가 아니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은데 하늘에서 놀고 바다를 희롱한다니. 하루에 구만 리 장천을 날아간다는 붕새 정도가 되어야 그 세계를 이해할 것이 아닌가.

사설이 길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전’을 보는 내내 산숭해심이란 단어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의 높은 산, 산숭은 바로 정선(鄭敾·1676~1759)이었다. 정선이라는 산이 워낙 높다 보니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화가들은 그가 파놓은 깊은 바다에서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었다. 지난 회에 살펴본 송필용이 정선의 남쪽 바다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라면 오늘 살펴보게 될 박대성은 정선의 동쪽 바다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다. 그들이 숨 쉬고 있는 바다는 다르지만 정선이라는 산맥이 만든 바다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산이 높으면 나무가 높고…

박대성은 2006년에 신라의 정신을 압축해놓은 듯한 ‘불밝힘굴’을 완성했다. 신라 천년을 얘기할 때 불교를 빼놓을 수 없듯 석굴암과 불국사는 신라 불교를 상징하는 절이다. 석굴암만 그려진 신라는 반쪽에 불과하다. 불국사만 남은 신라 역시 온전하지 못하다. 석굴암이 산속에 있다면, 불국사는 산자락에 있다. 박대성은 ‘불밝힘굴’에서 신라의 상징인 두 절을 한 화면에 오롯이 표현하고자 했다. 석굴암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 짙은 먹색의 토함산 왼쪽 상단에 배치했다. 우뚝 솟은 숭산은 장쾌하다. 묵산(墨山)의 둥근 석굴 안에 앉은 부처님은 전체 화면에 비하면 매우 작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유일하게 채색을 써서 방광(放光)이라도 한 듯 황금색으로 빛나 단연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면을 좌우로 양분한 듯한 고갯길이 석굴암 앞에서 끝난 것도 그 지점을 강조하기 위해 계산된 구도다. 불국사는 화면 하단에 배치했다. 화면의 8할을 괴량감 넘치는 짙은 적묵(積墨)으로 칠한 반면 불국사는 경내의 전각들을 간략한 선으로 소묘했다. 흰색이 주조를 이룬 불국사는 마치 흰 눈이 덮인 듯 고요하다. 혹은 석굴암에서 내려온 구불구불한 길이, 길이 아니라 계곡물이 되어 불국사라는 호수에 고인 것 같다. 불국사는 해심이다.

그런데 석굴암과 불국사는 어떤 위치에서 바라봐도 ‘불밝힘굴’에서처럼 한 화면에 그릴 수가 없다. 지리적으로 석굴암은 토함산의 동쪽에, 불국사는 서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절의 배치를 박대성은 굳이 한 화면에 압축해서 표현했다. 석굴암과 불국사의 상징성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박대성은 그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해 힘찬 필력으로 적묵과 담묵을 능숙하게 풀어냈다. 거침 없는 필선은 검은색과 흰색, 강함과 부드러움, 세밀함과 간략함 등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박대성이 ‘불밝힘굴’에서 배치한 구도는 300여 년 전의 위패스승인 정선의 ‘낙산사(洛山寺)’에서 배운 것이다. 정선의 ‘낙산사’는 8폭 병풍으로 구성된 ‘해악도병(海嶽圖屛)’에 들어 있다. 해악은 금강산을 지칭한다. 조선시대에는 금강산 그림을 ‘금강산도’라는 명칭 대신 ‘해악도’ ‘동유첩(東遊帖)’ ‘해산첩(海山帖)’ ‘풍악권(楓嶽卷)’ ‘봉래도(蓬萊圖)’ 등으로 즐겨 불렀다. ‘해악도병’에는 장안사, 정양사, 만폭동, 백천동, 문암, 총석정, 삼일포, 낙산사 등이 들어 있다. 이 중 장안사, 정양사, 만폭동, 백천동은 내금강에 있는 지역이고 문암, 총석정, 삼일포는 해금강에 있다. 마지막으로 낙산사는 관동팔경에 속한다. ‘낙산사’는 얼핏 봐도 대각선 구도다. ‘단발령망금강산’에서 눈에 익은 구도다. 대각선 구도는 대비되는 두 세계를 보여줄 때 매우 유효하다.

정선은 ‘낙산사’를 그리면서 실제와 다르게 낙산사와 홍련암을 한 화면에 배치했다. 낙산사는 오봉산에 있는 절이다. 화면 왼쪽에 높이 솟은 산이 낙산이다. 홍련암은 오른쪽 하단에 반원형으로 솟은 바위 위의 암자다. 낙산사와 홍련암은 어느 위치에 가서 보더라도 그림에서처럼 동시에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김홍도(金弘道), 김응환(金應煥), 김하종(金夏鐘) 등의 작품에서 낙산사와 관음굴이 따로 그려진 배경이다. 그런데 정선은 그런 사실을 완전히 무시한 듯 두 절을 보란 듯이 한 화면에 그려넣었다. 왜 이런 구도를 생각했을까. 홍련암이 갖는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낙산사를 다녀온 사람들은 경내에 있는 전각과 배꽃과 의상대보다 홍련암을 훨씬 비중 있게 생각한다. 홍련암의 내력을 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홍련암은 672년(문무왕 12년) 의상(義湘)대사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기도하다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자란 곳에 지은 절이다. 낙산은 범어(梵語) 보타락가(補陀落伽)의 준말로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오봉산을 낙산이라고도 하는 이유다. 또 다른 사적에 의하면 이렇다. 의상대사가 해변의 굴속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하자 바다 위에서 홍련(紅蓮)이 솟아오르고 그 가운데 관음보살이 현신하였으므로 이 암자 이름을 홍련암(紅蓮庵)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 잡은 홍련암은 법당 마루 밑을 통해 출렁이는 바닷물을 볼 수 있도록 지어졌는데 이는 의상대사에게 여의주를 바친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홍련암에 가면 마룻바닥 밑으로 바닷물을 볼 수 있다.

정선은 이런 신이(神異)한 홍련암의 상징성을 그림 속에 드러내고자 했다. 낙산사를 그리면서 홍련암이 빠진다면 ‘앙꼬 없는 찐빵’이 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정선이 지리적인 사실성을 무시하고 낙산사와 함께 화면 오른쪽 하단에 홍련암을 배치했다. 그는 진경산수를 그리면서 실제와 똑같이 그리기보다 현장에서 느낀 감동을 전달하기 위해 실경을 과장, 축소, 왜곡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강약이 분명한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장치였다. 정선이 화면의 경물 중에 넣을 것은 넣고, 뺄 것은 빼는 과정을 할 때 얼마나 신중했는지를 알게 되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홍련암과 함께 경내에 가득 핀 배꽃과 일출의 표현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낙산사를 드러내는 ‘상징코드’라 할 수 있다. 낙산사는 원래부터 홍련암과 일출로 유명하지만 배꽃도 마찬가지였다. 선조(宣祖), 광해(光海) 연간에 활동한 유몽인(柳夢寅)은 ‘어우집’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꽃처럼 펼쳐진 오봉산에 승방이 열리니/ 영롱한 사찰이 부상에 빛나네/ 수많은 고래와 용 뛰어오르고 날아오르는데/ 높은 파도에 바다는 출렁이고 천지는 무너질 듯/ 이화정 주위엔 눈처럼 흰 꽃이 피었고/ 소반 같은 밝은 달이 풍이의 굴에서 출몰하네’. 부상(扶桑)은 해 뜨는 곳을, 풍이(馮夷)는 수신(水神)을 뜻한다. 17세기의 천재적인 산림학자(山林學者) 윤휴(尹鑴)는 ‘백호전서’에서 낙산사를 ‘일만 그루 배꽃 바닷가 정자’라 표현했다. 조금 과장법을 섞었다 해도 낙산사에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배꽃은 조선시대만 잠깐 피고 싹뚝 잘려나간 꽃이 아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이홍섭 시인의 ‘낙산사 배꽃’에도 등장한다. 그는 시에서 ‘의상은 가고/ 배꽃 같은 선묘는 홀로 남아/ 떠나간 의상을 그리워하니’라고 표현한 후 ‘빈 절을 지키는 담장에는/ 온통 눈물 같은 별들이’ 돋아난다고 했다. 의상대사를 향한 선묘낭자의 애틋한 마음을 배꽃에 비유한 아름다운 시다. 어쩌면 배꽃은 낙산사를 창건할 때부터 ‘눈물 같은 별들이’ 되어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꽃을 정선은 놓치지 않고 붓끝에 담았다. 과장, 왜곡, 축소만이 능사가 아니라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구도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박대성은 정선이 경영한 구도비법을 매의 눈으로 ‘캐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또한 정선 못지않은 내공의 소유자라는 증거다.

정선. ‘낙산사’. 해악도병(海嶽圖屛). 42.8×56㎝. 지본담채. 18세기. 간송미술관
정선. ‘낙산사’. 해악도병(海嶽圖屛). 42.8×56㎝. 지본담채. 18세기. 간송미술관

금강산 여행의 마무리는 관동팔경으로

정선은 금강산 다음으로 관동 지역의 명승지를 많이 그린 화가다. 그는 ‘해악도병’ 외에도 63세가 되던 1738년에 11폭으로 된 ‘관동명승첩’(간송미술관 소장)을 제작했다. 정선 이전에도 ‘관동명승도’를 그렸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조선 초기의 대가 안견(安堅)을 비롯해 17세기에는 이정(李霆), 조속(趙涑), 이명욱(李明郁) 등이 모두 단 폭의 ‘관동명승도’를 남겼다. 그런데 정선이란 작가가 ‘관동명승도’의 정형을 마련한 이후 김홍도, 김응환, 김하종, 이방운(李昉運), 허필(許泌), 박사해(朴師海), 거연당(居然堂) 등 수많은 작가들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조선 말기에는 민화풍의 8폭 ‘관동팔경도’가 그 뒤를 이었다. 조선 초기의 문인들이 유교적인 수양을 위한 수행의 일환으로 명승지 탐방했다면 17세기 이후에는 개인적인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 산수유람을 떠났다. 번잡하고 골치 아픈 일상에서 벗어나 명산대천에서 탈속의 자유를 느껴보겠다는 ‘로망’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관동팔경이 부상하게 된 이유다.

관동(關東)은 대관령 동쪽 지방이다. 당시에는 금강산 유람을 끝낸 후 관동의 명승지를 ‘패키지’로 묶어 파는 여행상품이 인기가 많았다. 그 결과 금강산과 관동팔경은 여행자들이 가고 싶은 가장 ‘핫’한 관광지로 부상했다. 즉 내금강에서 외금강을 거쳐 해금강으로 빠진 여행객은 곧바로 관동 지역으로 발을 돌린다. 이곳에서 관동팔경으로 알려진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의상대,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을 둘러보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이런 ‘여행 붐’의 배경에는 교통, 숙박 등의 ‘인프라’가 잘 갖춰진 덕분이기도 하지만 ‘금강유산기’ 등의 기행문과 ‘금강산도’ 등의 그림이 큰 영향을 끼쳤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여행 계획을 세운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 많은 자료 중에서 가장 많은 여행가들의 조회수를 기록한 글은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이다. 정철은 1580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시절에 ‘관동별곡’을 지었는데 여행의 과정과 느낌을 4음보 연속체 가사에 담았다. 그 속에 담은 뜻이 얼마나 곡진했으면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입에 달고 살았을까.

지나가는 구름이 해 근처에 머무를까…

정철의 ‘관동별곡’ 중 낙산사에 대한 부분은 이렇게 적고 있다. ‘배꽃은 벌써 지고 소쩍새 슬피 울 때, 낙산사 동쪽 언덕으로 의상대에 올라앉아, 해돋이를 보려고 한밤중에 일어나니, 상서로운 구름이 피어나는 듯, 여섯 마리 용이 해를 떠받치는 듯, 바닥에서 솟아오를 때에는 온 세상이 흔들리더니, 하늘에 치솟아 뜨니 가는 터럭도 헤아릴 만큼 밝구나. 아마도 지나가는 구름이 해 근처에 머무를까 두렵구나. 시선(詩仙)은 어디 가고 시구만 남았으니, 천지간 웅장한 기별을 자세히도 표현하였구나.’ 이것은 의상대에서 일출을 보고 지은 가사다. 그런데 정철이 이 글에서 정작 말하고 싶은 바는 일출이 아니다. 일출을 통해 ‘아마도 지나가는 구름이 해 근처에 머무를까 두렵다’는 심정이다. 지나가는 구름은 간신이다. 해는 임금이다. 시선은 이백(李白)으로 그는 ‘금릉 봉황대에 올라’라는 시에서 ‘온통 뜬구름이 해를 가렸으니/ 장안은 보이지 않고 사람을 근심케 하네’라는 표현으로 간신배가 임금의 은총을 가릴까 염려스럽다고 걱정한 바 있다. 정철은 의상대의 일출을 묘사하면서 그 안에 나라 걱정하는 심정까지 담았으니 두고두고 그의 이름을 기억할 만하다. 정철이 우리 시대에 환생한다면 뭐라고 할까. 궁금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전’의 작품이 8월 23일부터 부분 교체된다. 한 장씩 넘겨야 하는 화첩(畵帖)이나 풀고 말면서 봐야 하는 두루마리 그림은 관람자에게 더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도록 교체전시를 해준다. 이전에 봤던 작품 이외에도 다른 작품을 더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활용할 만하다. 기왕에 전시회를 보고 실경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양양과 경주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낙산사에 가면 낙산은 물론이고 정선이라는 큰 산을 만날 수 있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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