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재충전을 위해 독서를 계획하시는 분들께 ‘지금 이 책’ 7권을 권해드립니다. 일본과의 극한 대결부터 ‘조국 사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머릿속을 괴롭히는 현안들이 잔뜩 쌓여 있는 지금, 우리를 정리해보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책들을 선정했습니다. 명절 가을밤, 책과 함께 스스로를 살찌우시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탈리아 기행

“인생을 바꾼 여행의 힘”

명절을 이용한 여행이 대세다. 요즘은 주로 ‘잠깐 쉬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대개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어수선하게 돌아오기 일쑤다. 하지만 간혹 여행을 통해 아예 인생을 바꾼 사람들도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가 대표적이다. 그가 자신의 내밀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이탈리아 여행기(Italienische Reise)’ 제1권(1816), 제2권(1829)이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하지만 늘 문학을 갈망했다. 법원에서 견습생활을 하던 23세 때 마침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하며, 일약 ‘질풍노도’의 기수가 되었다. 27세 때 바이마르공화국의 젊은 영주가 그를 고문관으로 초청했다. 거기서 10년 동안 정무에 종사하며 안정적 생활을 누렸으나, 한편으로 자신의 예술적 감성이 무뎌지는 것을 절감했다.

37세 때 영주 일행과 함께 오스트리아 카를로비바리에 갔다. 바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행으로부터 도망쳤다. “1786년 9월 3일, 새벽 3시. 나는 카를로비바리를 몰래 빠져나왔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지 못하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가방 하나와 오소리가죽 배낭만을 꾸려서 홀로 우편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의 이탈리아 여행은 이렇게 야반도주로 시작된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수시로 바뀌는 기후와 자연을 자세히 관찰하고 끝없는 호기심을 보인다. 하지만 여행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사전준비나 안내도 없이 이 나라에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어느 성터에서는 스케치를 하다가 스파이로 오인받는 촌극도 겪는다.

약 두 달 만에 그는 “드디어 세계의 수도 로마에 도착했다!”. 그는 유적을 탐방하고 예술품을 감상하고 연극도 관람한다. 그때마다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관찰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소감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긴다. 심지어 자신의 해부학 지식을 통해 조각품을 심층적으로 감상하기도 한다. 그는 로마의 유산에 대해 “이루 표현할 수 없다”는 감탄을 연발한다.

그는 이듬해(1787년) 초 나폴리와 시칠리아로 향한다. 화산재를 뒤집어쓰며 베수비오화산을 세 번이나 오른다. 한 번은 용암 분출 때문에 뜨거워서 더 이상 가기 어려운 곳까지 접근한다. 시칠리아의 자연과 유적도 그에게 커다란 위안과 감동을 안겨준다. 남부를 떠나며 자연, 기후와 낙천적 분위기를 아쉬워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역시 다시 로마로 향한다.

1787년 6월 그는 로마로 돌아와 이듬해 4월까지 머문다. 고대문명이 응축된 ‘세계의 수도’를 열광적으로 탐험하며 자신을 깊이 되돌아본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한다. “내 여행의 원래 의도는… 정신적·육체적 상처로부터 내 자신을 치유하고… 또한 진정한 예술을 향한 나의 뜨거운 갈증을 달래는 것이었다. 전자는 어느 정도, 후자는 완전히 뜻을 이루었다.”

그의 생애는 이탈리아 여행의 전과 후로 나뉜다. 전에는 ‘질풍노도’에 앞장섰지만, 후에는 고전주의의 기수가 된다. ‘이탈리아 여행기’는 30대 후반에 경험한 약 20개월 동안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것을 정리해 발표한 것은 67세(제1권)와 80세(2권) 때다. 한마디로 그는 평생을 이 여행과 함께한 셈이다. 이 여행기를 읽으면, 누구나 저절로 내면의 꿈틀거림을 느끼게 된다.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제대로 응답하라, 386세대!”

민주화가 이루어졌는데 도대체 왜 불평등은 심화되고 청년들은 절망하는가. ‘세대’라는 프리즘을 통해 이런 심각한 질문에 도전한 문제작이 있다. 바로 서강대 이철승 교수의 ‘불평등의 세대’(2019)다. 잘 알다시피, 우리 시대의 대표 세대는 산업화세대와 386세대다. 전자가 우리 시대를 조형(造型)했다면, 후자가 지금 그것을 재조형하고 있다.

산업화세대는 대략 1930년대 출생 집단이다. 그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이다.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나왔고 한국전쟁과 보릿고개를 겪었다. 그들은 놀라운 근성을 발휘하며 눈부신 성장을 일궈냈다. 하지만 전통사회의 위계구조를 고스란히 도시의 산업현장으로 옮겨 놓았다. 그 결과, 빛나는 성과의 이면에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인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 세대가 지도적 지위를 점하면, 그 다음 세대는 이 세대의 주변부로 활동하게 된다. 실제로 그 이후 출생 집단은 뚜렷한 특징적 세대를 이루지 못했다. 그 다음으로 맹위를 떨치게 된 세대가 이른바 386세대다. 그들은 1960년대에 출생하여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사회에 나오기 시작한 1990년대에는 30대였다. 그래서 당시에 386세대라는 독특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미 50대가 된 지금은 586세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세대는 20대에 혁명을 꿈꾸며 강력한 저항운동에 동참했고, 30대에는 정치·사회·경제 각 분야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그때(1990년대)는 마침 민주화와 세계화의 시대다. 이런 사조는 산업화세대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혀 그들의 퇴장을 촉진시켰다. 그 빈자리를 386세대가 메웠다.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심지어 사교육 시장까지 차지했다. 특히 금융위기가 아래 세대의 신규 진입을 억제하는 바람에, 조직 내에서 그들의 위상은 한층 공고화되었다.

386세대는 이념·투쟁·학맥 등을 매개로 강력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또한 IT 능력으로 무장한 첫 세대다. 한편으로 연공서열 등 산업화세대의 위계구조는 그대로 온존되었다. 이런 자산과 이점을 바탕으로 그들은 정치를 비롯해 거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들은 민주화의 주역이면서도,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토록 폄훼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각자 열심히 산 결과다.

오늘날 386세대는 대한민국을 접수했다. 그들은 각 분야의 정점에서 연공서열 등 전통적 기득권을 고스란히 누리고 있다. 오로지 내 식구, 내 자식만 챙기며, 청년세대를 무한경쟁으로 몰아넣고 있다. “산업화세대가 첫 삽을 뜨고 386세대가 완성한 한국형 위계구조, 그 희생자는 청년세대다.” 하지만 이런 사회에서 내 식구, 내 자식도 영구히 평온할 리가 없다.

산업화세대는 어두운 그림자도 남겼지만 고도성장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풍부한’ 일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런 수혜 속에 성장한 386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정상에 오른 바로 지금, 386세대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저자는 ‘제2의 희생’을 요구한다. 구체적으로는 임금 동결 및 삭감, 연공서열 폐지, 연금혜택 축소, 재산관련 세금 강화, 사회안전망 확대 등을 제시한다. 한마디로 자기희생적 개혁이다. 그들의 응답을 기대한다.

헬렌 니어링 소박한 밥상

“‘요리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요리책”

오늘날 우리는 먹방과 탐식(貪食)에 묻혀 산다. 미국에서도 1980년대에 ‘먹는’ 문화가 빠르게 확산하면서 비만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미국의 비만 문제는 그때부터 본격화된 것이다. 그런 시대에 “맛있게 요리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이색적인 요리책이 등장했다. 바로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Simple Food for the Good Life·1980)이다.

저자는 스코트 니어링의 아내다. 저항적 지식인이었던 그들 부부는 일찍이 도시생활을 뒤로하고 전원으로 들어가, 평생 자급자족 생활을 영위했다. 그들은 한나절만 노동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독서, 연구, 취미 등에 할애했다. 또한 저술, 기고, 강연 등도 평생 이어갔다. 그런 사람들이 음식을 기름지게 만들어 먹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요리책을 쓰다니….

그들 부부가 자신들의 전원생활을 담담히 소개한 책이 ‘조화로운 삶’(The Good Life·1954)이다. 이 요리책의 원제는 ‘조화로운 삶을 위한 소박한 음식’이다. 저자의 요리가 어떠했을지 대강은 짐작이 간다. 이 책은 제1부에 저자의 독특한 음식철학을 담고, 제2부에는 그가 평소 만들어 먹는 ‘소박한’ 요리를 소개한다. 제1부만 읽어도 충분히 유익하다.

어떤 사람에게 음식은 생활에서 가장 흥미롭고 흥분되며 마음을 사로잡는 주제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사소한 부분일 뿐이다. 선택은 자유다. 전자의 사람들은 과식을 하면서도 시들해진 입맛을 자극하기 위해 맛좋은 음식을 찾아헤맨다. 반면 후자의 사람들은 요리나 음식에 시간을 빼앗기느니 그보다 더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을 추구한다.

저자는 타락한 미뢰(味蕾)를 자극해 굳이 포식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버터, 소금, 설탕 등을 듬뿍 넣은 음식은 그렇지 않은 음식보다 훨씬 더 많이 먹게 된다. 그런 것을 넣지 않아서 입맛이 당기지 않으면 그만큼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이다. 배가 고플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또한 그들은 육식, 즉 동물의 ‘시체’는 먹지 않았다. 가축이나 가금도 아예 기르지 않았다.

“내 조리법은 가능한 밭에서 딴 재료를 그대로 쓰고, 비타민과 효소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가능한 낮은 온도에서 짧게 조리하고, 가능한 양념을 치지 않는 방침을 고수한다. 음식은 소박할수록 좋다.… 이런 식으로 먹으면 조리가 간단해지고, 소화가 쉬우면서 건강에는 더 좋다.” 이런 ‘평범한’ 원칙에 입각해 자신이 평소 즐기는 요리법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예를 들어 ‘기적의 죽’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아침식사 요리를 보자. ‘사과 2개, 당근 1개, 비트 1개, 견과(갈아서) 4분의 1컵. 사과와 당근, 비트를 갈아서 섞는다. 거기에 곱게 다진 견과를 뿌려준다.’ 아침(breakfast)은 금식(fast)을 깨는(break) 정도로 족하다. 그 밖에도 음식 종류별로 다양한 레시피가 소개된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부분 간단하다.

저자는 ‘고금의 요리책 수천 권을 뒤져 다른 사람들이 뭘 적었는지, 또 뭘 적지 않았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요리책에는 다른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을 적었다. 남편은 100세의 천수를 누렸다. 저자는 91세에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소박한 밥상’은 그저 단순한 요리책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삶 전반을 담담히 되돌아보게 하는 인생서다.

박훈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메이지유신을 알면 일본이 보인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했다. 특히 그들의 성공은 우리에게 악몽이 되었다. 이런 사정을 다룬 책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메이지유신의 배경을 아주 명료하게 파헤친 연구서가 있다. 바로 서울대 박훈 교수의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2014)다. 이 책은 매우 수준 높은 연구성과를 담백한 문체로 읽기 쉽게 기술하고 있다.

본래 사무라이는 농사를 짓다가 유사시 무장을 했다. 하지만 일본이 통일되자, 통치자들은 그들을 지역사회에서 분리시켜 성내로 불러들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런 병농분리(兵農分離)를 더욱 철저히 실시했다. 그래서 사무라이는 급료를 받으며 말단 잡무를 담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특히 신분이동이 봉쇄된 채 도시의 소비자로서 대부분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들 사이에 18세기 후반부터 유학이 급속하게 보급되었다. 그들은 유학을 공부하며 점점 국가대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여전히 칼을 차고 사무라이의 정체성을 고수했다. 하지만 과거의 사무라이와는 달리 문(文)과 정치를 논하는 ‘칼 찬 사대부’로 변모했다. 그들은 학적(學的) 네트워크에 기반하여, 전국적으로 활발한 정치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마침 이 무렵에 일본 영해에 외국 함선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일부 소외된 정치가와 재야 지식인들은 실제보다 ‘과장된’ 위기의식을 설파했다. 그들은 소수였지만, 대중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랜 평화가 흔들리고, 또한 항해술의 발전으로 일본이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위기의식이 강해졌다. 여기에 당시 한껏 고취된 ‘일본 순혈’ 관념도 한몫을 했다.

이런 ‘과장된’ 위기의식은 어느 극단으로 향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쇄국파와 개국파가 맞섰다. 하지만 쇄국파는 중국의 아편전쟁으로 곧 영향력을 잃었다. 결국 개국을 하되, 동시에 적극적으로 해외로도 진출하자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때 조선 진출은 단골메뉴였다.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세계정세를 주시하며, 이처럼 매우 도발적인 대응책을 제시했다.

마침내 ‘사대부’ 사무라이들이 본격적으로 무대 전면으로 나섰다. 그들은 유교 이념에 따라 자신을 천하공치(天下共治)의 담당자로 여기고 군주(천황)의 친정을 요구했다. 이런 움직임이 무력에 기반한 병영체제인 막부를 뒤흔들었다. 막부도 여전히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고 반격을 포기했다. 이것 또한 일본적인 특징이다.

드디어 사무라이들의 주도로 메이지유신이 일사천리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유학은 서구식 근대화론에 의해 밀려났다. 그들은 어떤 것도 이데올로기화하지 않는 유연성을 발휘했다. 이런 역사적 격랑 속에서 수많은 사무라이 영웅이 탄생했다. 오늘날 일본은 한마디로 사무라이가 만든 나라다. 그리고 그런 사무라이를 흠모하는 일본인은 그들의 후예다.

이처럼 메이지유신은 지배층의 일부가 나서서 행한 ‘질서 있는 개혁’이었다. 이것이 일본의 전통이 되었다. 지금도 일본은 선진국 중에 일당이 지배하는 유일한 나라다. 특히 그들은 ‘과장된’ 위기론을 통해 내부결속을 도모하고 공세적 대외진출을 기도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메이지유신뿐만 아니라, 작금의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더없이 유용하다.

길가메시 서사시

“알기는 쉬워도 깨닫기는 어렵다”

흔히 고대 그리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서양문명의 시원(始原)이라고 한다. 거기서 인간들은 한결같이 필멸(必滅)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친다. 그런 원초적 욕망이 인류 역사의 원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보다 무려 1000년 이상이나 앞서서 이미 그런 주제를 노래한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가 있었다. 바로 ‘길가메시 서사시’다. 이 시는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19세기에 발굴된 점토판을 통해 마침내 세상으로 나왔다.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는 아버지는 인간이고 어머니는 여신이다. 즉 반신반인(半神半人)이다. 우람하고 용맹하다. 반면 포악하고 거칠다. 백성에게 과도한 부역을 지우고 심지어 초야권(初夜權)까지 행사한다. 그런 왕의 통치를 받는 백성은 결코 평안할 리가 없다. 결국 신들이 백성들의 원성을 듣는다. 신들은 진흙을 뿌려 길가메시에 맞설 엔키두를 만든다.

엔키두는 들판에서 짐승과 섞여 산다. 그를 당할 자가 없다. 그 소식을 들은 길가메시는 빼어난 여사제를 보내 그를 길들이게 한다. 당시 여사제는 고급 창녀이기도 하다. 여사제를 만난 엔키두는 이성에 반응하며 문명에 동화된다. 마침내 그는 문명사회로 나와, 길가메시와 마주한다. 두 용사는 격렬하게 대결하지만, 끝내 승부를 가리지 못한다. 이내 친구이자 연인이 된 그들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다.

드디어 그들은 신들의 거처를 지키는 괴물까지 죽인다. 의기양양한 길가메시는 그의 늠름한 모습에 반한 여신의 유혹도 거절하고 하늘의 황소까지 때려죽인다. 이런 소행을 징벌하기 위해 신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길가메시의 단짝인 엔키두를 죽이기로 한다. 엔키두가 더 난폭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엔키두가 병들어 죽자, 길가메시는 깊은 비탄에 빠진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영생의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우트나피시팀을 찾아나선다. 우트나피시팀은 신에게 순종하여 대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는 ‘머나먼 곳’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다. 이 대목은 창세기의 홍수 서사와 거의 같다. 길가메시는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우트나피시팀을 만난다. 그는 7일간 잠을 안 자면 영생의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잠의 안개가 실뭉치에서 풀리는 보드라운 실처럼 길가메시를 덮쳤다”.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우트나피시팀 아내의 배려로 길가메시는 불멸초가 있는 곳을 알아낸다. 그는 바닷속 심연으로 내려가 불멸초를 뜯어서 귀향길에 오른다. 그러나 샘에 들러 목욕을 하는 사이 뱀이 나타나 불멸초를 먹어버린다. 뱀은 허물을 벗고 젊어진다. 그는 긴 여행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 돌 위에 이 모든 이야기를 새긴다.

이 시에는 그의 여생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길가메시는 천수를 누리고 백성들의 애도 속에 죽음을 맞이한다. 아마도 자신의 필멸을 깨닫고는 난폭했던 과거를 뉘우치며 선정을 베푼 모양이다. 누구나 입으로는 필멸을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불멸인 것처럼 행동하기 일쑤다. 하지만 길가메시는 험난한 구도여행 끝에 필멸을 뼛속 깊이 깨닫고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되었다. 쓰라린 고난 없이 이를 깨닫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배리 골드워터 보수주의자의 양심

폴 크루그먼 진보주의자의 양심

“자유냐 평등이냐, 그것이 문제다”

미국 정치가 배리 골드워터는 ‘보수주의자의 양심’(The Conscience of a Conservative·1960)을 써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에 빗대어, ‘OOO의 양심’이라는 제목의 책들이 줄을 이었다. 최근에는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진보주의자의 양심’(The Conscience of a Liberal·2007)을 펴냈다.(우리말로는 ‘미래를 말하다’로 소개됨.) 왜 그들은 ‘양심’을 걸고 격돌할까.

‘보수주의자의 양심’은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으로 정부가 비대해지고 자유가 훼손되었다고 비판한다. 더구나 골드워터가 보기에 아이젠하워의 공화당 정권도 뉴딜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정부의 무분별한 확대를 억제하고 주(州)와 개인에게 권한을 돌려주라고 외친다. 하지만 그는 극단주의자라고 비난받으며, 1964년 대통령선거에서 참패하고 만다.

그의 주장은 한마디로 ‘작은 정부, 자유시장, 개인의 자유, 강력한 국방’으로 요약된다. 이런 메시지는 젊은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마침내 로널드 레이건이 이런 주장을 내걸고 1980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다. 레이건은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침체된 경제를 부흥시키고, 소련과의 강경한 대결을 통해 동서냉전을 사실상 종식시킨다.

한편 ‘진보주의자의 양심’은 19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100여년간 미국의 정치경제사를 다룬다. 역시 크루그먼이 주목한 것도 뉴딜정책과 레이거노믹스다. 그는 뉴딜정책이 중산층을 키워내고 사회보장을 강화했다고 평가한다. 특히 전시(戰時)에 임금 등에 대한 국가의 강제개입이 1950년대 중산층 중심의 비교적 평등 사회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크루그먼은 레이건이 무분별한 시장주의를 채택해 평등한 사회를 후퇴시켰다고 비판한다. 그 이후로 공화당이 강경파에 의해 장악되어, 불평등을 더욱 확대시키고 있다. 또한 미국은 선진국 중에 국민에게 의료보험을 제공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다. 따라서 그는 국가가 불평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사회보장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미국인들에게 가장 위대한 20세기 대통령을 꼽으라면, 아마 루스벨트와 레이건이 다툴 것이다. 루스벨트는 뉴딜정책으로 미증유의 대공황을 극복하고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이끌었다. 반면 레이건은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침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냉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두 시대를 바라보는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시각은 180도 다르다.

자유와 평등은 인류의 이상이다. 하지만 본질상 상호배타적이기 때문에 동시적 확대는 어렵다. 이로 인해 보수와 진보는 ‘양심’을 걸고 격돌한다. 같은 사실이나 현실을 놓고도 신념이나 양심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만약 보수와 진보의 이런 경쟁이 없다면 자유와 평등의 균형은 일그러진다. 사실 루스벨트와 레이건은 각각 자신의 시대적 소명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처럼 보수와 진보는 자유의 확대를 위해 국가가 물러서느냐, 평등의 강화를 위해 국가가 나서느냐를 놓고 다툰다. 이 대결은 끊임없이 치열한 현실 인식에 근거해야 비로소 생산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보수와 진보는 1970~1980년대에 매몰된 채 진화를 멈췄다. 그것이 양자가 똑같이 수구적이고 교조적인 이유다.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 간절하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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