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잠들지 않는 이 도시 속에서 나는 항상 깨어 있고 싶다.(I want to wake up, in a city that never sleeps.)’ 프랭크 시나트라의 명곡 ‘뉴욕 뉴욕(New York, New York)’의 한 구절이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잠들지 않는 도시, 다시 말해 항상 새롭고 즐거우며 삶의 활기를 느끼는 곳이 뉴욕의 고전적인 이미지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계가 맞이할 미래의 풍경을 창조해내는 전위도시, 쿨(Cool)하고 가슴이 뛰는 공간이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 체감하는 뉴욕은 시나트라의 노래와는 많이 다르다. 2019년 9월, 필자가 경험한 뉴욕의 현실 풍경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교통체증, 고물가, 냉동식품. 복잡하고 비싸고 맛없는, 글로벌 평등시대가 낳은 ‘잡탕도시’가 바로 뉴욕의 진면목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 상품으로 넘쳐나는 상황은 논외로 하자. 좋게 말하면 ‘모두 함께 차별 없이’ 사는 도시라고 할 수 있지만 거꾸로 차별이 아닌 구별도 모호해진 잡탕도시다. 뉴욕에서만 느낄 수 있는 뉴욕만의 정취가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펜트하우스에 살 정도의 억만장자이거나, 사랑에 빠진 청춘남녀에게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천국으로 느껴질 수 있다. 처음 뉴욕에서 생활하는 사람에게도 ‘매일 깨어나 활기를 느끼는’ 도시로 와닿을 수 있다. 하지만 1년 이상 살아 보면 다시 정체가 모호한 잡탕도시다. 세계의 돈 공장 월스트리트 덕분에 나날이 번창하고는 있지만, 전 세계가 흠모하던 뉴욕만의 오감은 하루가 다르게 퇴색해가고 있다. 흑백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기억이 ‘뉴욕만의 로망’일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자세히 열심히’ 관찰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죄인을 가두는 것은 고강도 창살에 국한되지 않는다. 창살과 창살 사이의 좁은 틈이 탈출을 막아내는 요소 중 하나다. 교통체증, 고물가, 냉동식품으로 뒤덮인 도시지만, 구석에 꼭꼭 숨은 것들을 들춰내 보면 뉴욕만의 로망을 재발견해낼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뉴요커’(NewYorker.com)라는 잡지다. 천연기념물로 변해가는 ‘오리지널 뉴욕’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 1925년 창간 이후 94년간 발행돼온 미국 문화지식계를 대표하는 주간지다. 창작 순수문학이 주된 내용이지만, 평론과 인터뷰는 물론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의 이슈를 다루는 종합잡지다. 어휘력이나 단어의 난이도가 신문 수준과는 전혀 다른 격조 높은 잡지다. 미국 미디어의 대부분은 중학교 어휘력 수준에 맞춰 기사를 쓴다. 워싱턴의 정가나 뉴욕의 금융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고학력 전문가용 미디어는 극히 드물다. ‘뉴요커’는 그 같은 고난도 미디어의 최고봉에 해당한다.
뉴욕 시민들의 지지를 업고
간단히 말해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교양지가 ‘뉴요커’다. 당연하지만, 지식인용 잡지답게 ‘뉴요커’에 글을 한번 싣는다는 것만으로도 미국, 아니 세계를 대표하는 문화인으로 통할 수 있다. ‘뉴요커’에 글이 실릴 경우 영미권만이 아니라 유럽과 남미 등 전 세계의 문화계 유명인사로 등극할 수 있다. 매년 10월 초 노벨문학상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를 세계적 작가로 만든 지적 공간이 바로 ‘뉴요커’다. 이미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도 ‘뉴요커’를 통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한국의 경우 소설가 이문열과 고은의 글이 ‘뉴요커’에 실린 바 있다.
잡지 ‘뉴요커’가 뉴욕만의 로망을 일깨워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뉴욕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성원이 가장 큰 이유일 듯하다. 일간 대중지로는 ‘뉴욕타임스’, 고학력 문화 지식인용 주간지로서는 ‘뉴요커’가 맨해튼을 대표하는 미디어 양대산맥이다. 인터넷 시대 사양산업 1호로 불리는 것이 종이 미디어지만, 뉴욕타임스가 그러하듯 ‘뉴요커’도 아직 건재하다. 흥미롭게도 동부만이 아닌 서부 캘리포니아주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열혈 독자들이 많다. 약 100만부에 이르는 판매 부수 중 30% 정도가 서부에서 팔린다고 한다. 사실 뉴욕에서 발행되는 역사가 오랜 잡지에 뉴욕 시민들이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들의 자산인 동시에 자신들의 얘기를 담고 있어서다. 뉴욕 곳곳에서의 화젯거리는 물론 문화행사 스케줄에서부터 문화 관련 비평이 거의 리얼타임으로 실린다. 필자가 즐기는 ‘뉴요커’ 지면이기도 한, 뉴욕 내 가십을 모은 ‘도시 내 얘기들(The Talk of the Town)’은 뉴욕 스포츠클럽 아침 잡담에 빠지지 않는 소재다.
그러나 ‘뉴요커’가 뉴욕의 로망으로 불릴 수 있는 진짜 이유는 그 같은 텍스트 파워에 그치지 않는다. ‘뉴요커’는 사진이 극히 드문 잡지다. 어떻게 경영을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광고도 최소한에 그친다.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작은 글씨로만 빽빽하게 메워진 소논문처럼 느껴지는 무거운 잡지다. 깊기는 하지만, 딱딱하고도 심각한 내용이 주류로, 작심을 하고 읽지 않는 한 대충 넘기기 십상이다. 그러나 뉴요커는 고난도 어휘와 단어만이 아닌, 특유의 청량제도 잡지 곳곳에 심어놓고 있다. 무라카미의 단편소설도 좋지만, 텍스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비주얼 공간’이야말로 ‘뉴요커’를 읽게 만드는 또 다른 맛 중 하나다. 바로 카툰(Cartoon)이다. 9월 23일자 ‘뉴요커’를 보면, 전체 74쪽에 17개 카툰이 등장한다. 대략 4쪽당 카툰 하나가 나오는 셈이다. 다른 일반 종합잡지들에 비해 양적으로 많다.
필자가 ‘뉴요커’ 카툰이란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워싱턴 사교클럽 코스모스(CosmosClub.org)에 들렀다가 옆좌석에 앉은 뉴욕 출신 60대 후반 여성과 얘기를 나누게 됐다. 이 할머니는 자신의 손녀가 ‘뉴요커’ 카툰 공모에 통과했다면서 엄청 자랑을 했다. 프린스턴대학 역사학과 출신이란 손녀가 무려 10년간에 걸쳐 줄기차게 응모한 끝에 마침내 2개의 카툰이 통과했다는 것이다. 학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할머니의 자랑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 모두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면서 상황을 이해하게 됐다. 필자가 전혀 모르던 뉴욕, 아니 미국의 속살을 제대로 안 것이다.
당시 할머니의 배경 설명은 아직도 뇌리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뉴욕이 전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진짜 뉴욕 시민은 다른 나라나 세계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잡지 ‘뉴요커’의 카투니스트(cartoonist)들은 뉴욕 문화 매니아의 대명사다. 평생 반경 5마일 속에서 움직이면서 맨해튼 밖에 나간 적이 없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오직 뉴욕에 관한 것만이 이들의 관심사의 전부다. 손녀는 초등학교 때부터 ‘뉴요커’ 카투니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다. 대중들과 무관하지만, 향수 제조 감별 전문가야말로 프랑스 지식인들이 손꼽는 최고의 문화인이다. 뉴욕, 아니 미국에서는 잡지 ‘뉴요커’의 카투니스트가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