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과 조커, 조커와 배트맨. 고담시(市)에서 가장 미친 두 사람.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인 운명의 상대. 최악의 맞상대이자 최고의 이해자. 배트맨과 조커는 그런 사이다. 모든 수퍼 히어로는 각자의 숙적(Arch enemy)이 있지만, 이 둘만큼 단단히 엮인 사이는 없다.

둘은 모순적인 존재다. 배트맨은 수퍼맨·원더우먼과 함께 DC코믹스를 대표하는 히어로지만, 여느 수퍼 히어로와는 다르다. 어둡고 고독하다. 화려한 코스튬을 뽐내지도 않고 대중의 인기를 갈구하지도 않는다. 얼굴을 가린 채 밤의 구석에서 범죄자의 악몽으로 남는 쪽을 택한다. 무채색 배트맨의 대척점에는 광대의 얼굴을 한 형형색색의 악당 조커가 있다. 입이 찢어져라 웃는 표정과 과장된 몸짓, 선동적인 궤변과 농담으로 상대를 현혹하고, 자신만의 미학으로 악행을 실천한다. 둘 모두 초능력은 없지만 누구보다 유능하고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분노를 힘으로 삼고 두려움을 무기로 쓰는 심판자 배트맨과, 광기를 벗 삼아 불가해(不可解)의 존재로 태어난 악당 조커는 첫 등장부터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둘 사이의 관계성에 주목한 작가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설정을 덧붙이고 더 독하고 질긴 인연을 끌어냈다. 조커와 배트맨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둘을 함께 놓고 봐야 하는 이유다. 히어로 영화 최초로 제76회 베네치아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 영화 ‘조커’(2019)도 마찬가지다. 조커 홀로 이끌어가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웨인가(家)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지난 몇십 년간 극장가에 걸린 배트맨과 조커의 흔적을 되짚어보자. 조커의 ‘개 같은 코미디’가 언제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다만 콧수염 기른 조커 시저 로메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사랑꾼 조커’ 자레드 레토는 제외했다.

광기의 탄생 : 배트맨(1989)

팀 버튼 감독이 높이 세운 모던 히어로의 급자탑, 영화 ‘배트맨’은 날개 달린 자경단원 배트맨을 만화 지면과 브라운관 TV 화면을 넘어 할리우드의 흥행 보증수표로 끌어올리면서, 동시에 조커라는 미치광이 악당을 대중에 각인시켰다.

마피아 조직의 간부인 잭 네이피어는 두목의 함정에 빠져 화학공장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배트맨과 조우한 그는 배트맨이 튕겨낸 자신의 총탄에 상처를 입고 화학물질이 가득 찬 통 속으로 빠진다. 잭은 살아났지만 돌팔이 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웃는 표정만 지을 수 있는 미치광이 조커로 다시 태어난다. 화학물질에 빠져 얼굴이 이상하게 바뀐 탓에 조커가 되었다는 설정은 1951년 출간된 책 ‘디텍티브 코믹스’ 168호에서 따온 것이다. 실력파 배우 잭 니컬슨이 연기한 조커는 히스 레저가 열연한 ‘다크 나이트’(2008)가 개봉하기 전까지 30년간 최고의 조커로 손꼽혔다. 특히 미술관에 살인 가스를 주입해 관객들을 몰살하고는 거장들의 작품들을 박살내는 장면은 삐뚤어진 예술관을 지닌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다.

배트맨의 탄생기는 1939년 11월 발간된 DC코믹스 ‘디텍티브 코믹스’ 33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책에 수록된 ‘배트맨의 전설(The Legend of the Batman)’ 편 도입부는 영웅의 탄생을 묘사하는 가장 압축적인 2페이지일 것이다. 만화 원작에서는 꼬마 브루스 웨인의 눈앞에서 부모가 살해된다. 그것을 목격한 트라우마가 브루스 웨인을 범죄자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배트맨으로 만든다. 영화는 여기에 팀 버튼 감독의 극적인 상상력을 가미한다. 젊은 시절의 잭 네이피어, 즉 조커가 브루스 웨인의 부모를 살해했다는 설정이다. 처음에는 그것을 모르던 배트맨도 조커의 “창백한 달빛에서 악마와 춤춰 본 적 있나?”라는 대사를 듣고 그가 부모의 원수임을 깨닫는다.

서로가 서로의 창조주인 셈이다. 영화 후반부 맞대결에서 조커가 “네가 날 만들었잖아(You made me, remember?)”라고 말하자 배트맨은 “네가 먼저 날 만들었어”라고 응수한다.

본질의 충돌 : 다크 나이트(2008)

히어로 영화의 역사를 다시 쓴 걸작.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에 쏟아지는 평단과 관객의 찬사는 과찬이 아니다. 전작 ‘배트맨 비긴즈’(2005)를 통해 ‘배트맨은 왜 배트맨이 되었는가’를 보여준 놀란 감독은 숙적인 조커를 등장시켜 배트맨의 신념을 끊임없이 시험한다.

놀란 감독은 배트맨을 이전 시대의 배트맨보다 더 섬세하고 더 강박적이며 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인물로 그려낸다. 작중 배트맨은 끊이지 않는 범죄와의 전쟁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잠도 자지 않고 밤이 오길 고대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여 신체를 한계치까지 단련한다. 배트맨 수트를 벗고 나서는 그저 돈 많고 생각 없는 대부호 브루스 웨인을 연기할 뿐이다. 부유한 귀족의 삶을 영위하면서 사회생활과 연애도 나름 열심이었던 선대 마이클 키튼표 배트맨과는 거리가 멀다.

‘다크 나이트’에서처럼 배트맨으로서의 자아에 매몰된 브루스 웨인은 원작 코믹스에서도 여러 차례 묘사된 바 있다. 1987년 출간된 ‘디텍티브 코믹스’ 574호 ‘나의 시작과… 혹시 모를 나의 끝(My beginning… And My Probable End)’에서 배트맨은 플레이보이와 멍청한 도련님을 연기했던 자신의 대학 시절을 고백하며 이렇게 말한다. “브루스 웨인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가면들 중 하나가 되어버린 건 아닌지.”

불살(不殺)주의도 배트맨을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다. 팀 버튼의 배트맨이 적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고, 잭 스나이더 감독의 배트맨이 도시 곳곳에 미사일을 퍼붓는 등 작품에 따라 불살주의가 간과되는 경향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배트맨은 살인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고(故)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혼돈 그 자체다. 뚜렷한 목적을 지닌 악당이 아닌, 세상을 혼돈에 빠트리고 싶어하는 순수한 악(惡)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조커의 본명도, 과거도, 조커가 된 계기도 알려주지 않는다. 뜬금없이 등장해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뿐이다. 이는 원작 코믹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커의 정체는 조커가 1940년 출간된 배트맨 독립 시리즈 첫 작품인 ‘배트맨 #1’에 등장한 이래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 조커 관련 코믹스 원작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킬링 조크’(Batman: The Killing Joke·1988)에서는 아예 조커 스스로 “만약 나에게 과거가 있다고 한다면, 다지선다로 하고 싶군! 하하하!”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 역시 입가에 흉터가 생긴 이유에 대해 그때그때 다르게 말한다. “왜 그리 심각해?”라고 비웃으면서 말이다.

조커는 배트맨의 모든 것을 시험대에 올린다. 소꿉친구이자 첫사랑인 레이첼 도스를 납치해 폭사시키고, 정의로운 검사이자 고담의 백기사인 하비 덴트를 타락시켜 악당 투 페이스로 만들고, 자신을 죽이라며 배트맨을 도발한다. 고담의 마지막 희망인 배트맨을 타락시켜 시민들을 절망과 혼돈에 빠트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왜 자신을 죽이려 하느냐는 배트맨의 질문에 대한 조커의 대답은 이 둘의 관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난 널 죽일 생각 없어! 네가 없으면 뭘 하고 살라고? 다시 마피아나 등쳐 먹던 시절로 돌아가? 안 돼, 안 되지. 안 돼! 넌, 넌 날 완성시켜!(You complete me!)”

조커의 말처럼 배트맨의 존재는 조커를 단순한 범죄자에서 혼돈과 광기의 화신으로 완성시킨다. 배트맨에 대한 조커의 집착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이 집착은 때론 연인의 애증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프랭크 밀러의 걸작 코믹스인 ‘다크 나이트 리턴즈’(1986)는 배트맨이 은퇴 10년 만에 복귀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이때 아캄 정신병원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던 조커가 배트맨의 복귀 뉴스를 접하고 예의 살인미소를 지으며 “배트맨, 우리 자기(Batman, Darling)”라고 말한다.

소외가 낳은 광인 : 조커(2019) *스포일러 있음

드디어 이 조커다. 감독 토드 필립스가 판을 깔고 명배우 호아킨 피닉스가 완성한 인물, 아서 플렉은 세상의 모든 불행이 들러붙은 듯한 인물이다. 아서 플렉은 이벤트 대행 전문 업체에서 광대 분장을 해가면서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는 서민이다. ‘세상에 웃음과 행복을 선사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성공한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약을 한 번에 7가지나 복용할 정도로 정신질환 및 신경질환에 시달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잘것없는 하루는 평범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자신을 괴롭히는 무리를 우발적으로 살해하면서 불행한 소시민 아서 플렉은 조커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특히 빈민층의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조커의 범죄는 ‘사악한 부유층을 죽인 광대 자경단’으로 미화되고 시내 곳곳에서 시위와 소요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이후 몇 차례의 살인을 거쳐 아서 플렉은 조커로 완전히 변모하게 된다. 실패한 코미디언이 조커가 된다는 플롯은 원작 코믹스 ‘킬링 조크’와 유사하다. 이 같은 반(反)영웅 서사시에 배트맨이 개입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영리하게 웨인가(家)의 비극을 조커의 탄생기에 끼워 넣는다.

우선 아서 플렉이 자신의 아버지로 철석같이 믿는 토머스 웨인은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조커가 배트맨의 이복형제인 셈. 또 1989년작 ‘배트맨’처럼 조커와 배트맨이 서로를 만들어주는 관계다. 아서 플렉이 토머스 웨인의 회사에 다니던 직원 3명에게 폭행을 당하다 그들을 살해하며 조커로서 눈을 떴고, 조커로부터 촉발된 폭동 때문에 배트맨의 부모는 목숨을 잃는다. 꼬마 브루스 웨인이 부모의 주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과 조커가 눈을 뜨고 자신의 피로 입술을 그리는 장면이 겹치는 까닭은 이 둘의 존재가 운명적으로 엮여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다.

여기에 더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구금된 조커가 상담사에게 낄낄거리며 “조크가 하나 떠올랐다”고 말하면서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선을 긋는 장면에서 브루스의 모습이 교차돼 지나간다. 조커의 농담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조커만큼이나 망가지고 고장 난 자, 배트맨밖에 없다는 얘기다. 당신이 배트맨 코믹스의 팬이라면 ‘킬링 조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조커가 던진 농담에 함께 폭소하는 배트맨이 떠오를 터다.

국내외에서 영화 ‘조커’ 열풍이 뜨겁다. 세상 밖으로 밀려난 여백의 인간이 점차 광기에 물드는 음울한 영화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반응이다. 광대를 만났으니, 이제 박쥐를 만날 차례다. 로버트 패틴슨이 주연을 맡은 배트맨 신작 영화 ‘더 배트맨’(가제)이 2021년 개봉할 예정이다. 아쉽게도 신작에 조커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지난 80년 세월이 증명하듯 광대와 박쥐는 언젠가는 만나기 마련이다. 두 광인의 해후(邂逅)를 기대해본다.

홍성윤 매일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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