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빛이 가득하니 사랑이 끝이 없어라’. 한지에 채색. 95×70㎝. 2019년
강찬모. ‘빛이 가득하니 사랑이 끝이 없어라’. 한지에 채색. 95×70㎝. 2019년

조선시대 그림 중 가장 많이 그려진 분야는 산수화다. 우리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것만 봐도 산수화가 발달한 이유가 이해된다. 조선시대 때 도화서(조선시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을 그리던 관청)의 화원을 뽑는 시취(試取)에서도 산수화는 대나무 다음으로 중요한 과목이었다. 산수(山水)는 산(山)과 물(水)의 합성어이니 산수화는 ‘산과 물을 그린 그림’이다. ‘산수’에서 물이 산을 앞서지 않는 이유는 산이 있어야 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은 또한 계곡물, 시냇물, 강물, 바닷물 등 그 물이 흐르는 장소에 따라 다른 말로 표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물은 ‘수’로 대변된다. 산 옆에 아무리 멋진 강이 있어도 그저 산수화일 뿐 ‘산강화’라고 하지 않는다. 계곡물이나 시냇물을 그릴 때도 ‘산곡화’나 ‘산계화’ 대신 그저 산수화라고 표현한다.

조선시대에 산수화가 많이 그려진 이유는 단지 산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름다움의 근원이 산수로 대변되는 자연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산수가 사람의 성정(性情)을 맑게 하고 호연지기를 길러준다고 여겨 발품을 팔아 명산대천을 찾아다녔다. 이런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는 산수의 즐거움을 말할 때 흔히 ‘요산요수(樂山樂水)’라 한다. 줄여서 ‘이요(二樂)’라고도 한다. 이요는 공자께서 ‘가라사대’ 하신 말씀으로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나온다. 공자는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을 산을 좋아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라고 했다. 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할까. 산행을 하면서 그 해답을 찾는 것이 공부의 과정이었고 목적이었다. 사람들은 산수를 거닐면서 꾸밈없는 성정인 천기(天機)를 이해하고 심성 수양의 발현이 대자연에 합치되도록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사색과 관찰을 통해 자연과 사회의 발생과 운동을 이(理)와 기(氣)라는 개념으로 압축 설명하고, 인간과 사물의 원리적 보편성을 설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리학(性理學)이다. 그러니 성리학을 근본으로 한 조선시대는 산수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나이 들어 더 이상 산에 오를 수 없게 되면 자신이 유람했던 곳을 그려서 방에 걸어 두었다. 걸어 둔 그림을 보면서 ‘직접 산에 왔다’ 치고 눈으로 보며 그림 속을 유람했다. 이것을 와유(臥遊)라 한다. ‘누워서 산수를 노닐다’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산수화는 현장에 직접 가서 보고 그린 실경산수화보다 와유산수화가 더 많다. 현장이든 그림이든 나무 한 그루만 봐도 그것을 매개체로 해서 우주의 원리까지 파고들 수 있었던 철학자들. 그들이 바로 조선시대 사람들이었고 산수화의 역할이었다.

히말라야에서 만난 뜻밖의 깨달음

가도 가도 산이다. 넘어도 넘어도 눈 덮인 산뿐이다. 산과 눈뿐인 히말라야를 그리면서 강찬모(70)는 오늘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빛이 가득하니 사랑이 끝이 없어라’는 그가 히말라야에서 느낀 우주의 감동을 풀어낸 작품이다. 화면은 온통 산 넘어 산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산들은 단지 파란색의 산과 하늘뿐인 줄 알았는데 산이 끝나는 지점에 온통 눈으로 뒤덮인 설산이 우뚝 서 있다. 히말라야(Himalaya)라는 말 자체가 산스크리트어인 ‘Hima(눈)’와 ‘Alaya(거처)’의 합성어인 것만 봐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듯 사시사철 눈이 덮여 있다. 눈 덮인 산은 신령스러운 우주의 정기만이 내려앉는 장소다.

강찬모 작가가 히말라야를 찾은 것은 40대 중반이던 1994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평생 풀어내도 다 풀어낼 수 없는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아니 작품만을 위한 영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그저 화가이기 때문에 붓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한계를 그렇게라도 말했을 뿐이다. 무엇이 그를 히말라야로 이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갑작스러운 네팔행이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4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가져오는 삶의 공허함이었을 수도 있고, 40을 넘기기 직전부터 빠져들었던 기(氣) 수련의 영향이었을 수도 있다. 하여간 40이라는 나이는 자꾸 뭔가를 결정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게 만드는 불안함이 등짝을 미는 시기다. 그만큼 히말라야의 부름은 강렬했고,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히말라야는 세계의 지붕이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해발 5000m가 넘는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다. 세계에서 해발 8000m 이상 높이를 가진 14개의 봉우리 중 9개가 히말라야에 있다. 이렇게 험준한 산이다 보니 동네 뒷산이나 다니던 실력으로는 세계의 지붕 위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다. 먹을 수도 없고 잠들 수도 없으며 걷기도 힘들고 눈 뜨기도 힘든 고산병이라는 난관부터 외부인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런 모든 한계를 기꺼이 밀어내고 쿰부히말라야에서 에베레스트를 처음 봤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지구상에 이런 웅장한 세계도 있었구나.”

히말라야는 산이라는 개념을 훌쩍 뛰어넘은 성스러운 장소다. 푸른 하늘에는 흰색의 구름만이 떠 있고 그 위는 백색의 침묵만이 가득한 공간이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접근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 완강한 침묵의 세계는 빙하기 때부터 쌓인 만년설에 덮여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었다. 산은 산이로되 있는 그대로 지구의 역사를 증언하는 말없는 스승이자 위대한 성인의 화현이었다. 작가는 수만 년 동안 눈에 덮여 있으면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히말라야를 보면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그 생명체들은 온통 사랑의 빛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이 계시처럼 느껴졌다. 지구는, 히말라야는 그 사랑의 빛을 오롯이 간직한 채 니르바나, 열반에 든 에너지로 보였다. 사람의 생각과 계산이 다 끊어진 상태에서만 다가설 수 있는 세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영혼과 육신이라는 이분법마저 버릴 수 있는 곳, 그곳이 히말라야였다. 석가모니가 고행을 위해 들어간 곳이 왜 히말라야였는지 비로소 이해되었다. 당나라 왕발(王勃)이 ‘등왕각서(滕王閣序)’에서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강찬모 작가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로지 히말라야만 그리고 있다. 제목은 한결같이 ‘빛이 가득하니 사랑이 끝이 없어라’ ‘무엇이 우리를 서로 사랑하게 하는가’ 등 사랑타령이다. 사랑도 무채색 사랑이 아니라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환희로운 사랑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 마음을 감출 수 없듯, 사랑을 그린 그의 작품도 붉은색과 노란색, 청색과 흰색 등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자칫 작품성을 떨어뜨릴 만큼 산만하고 난삽한 색채들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특별히 색깔을 다독거리거나 가라앉히지 않는다. 그가 히말라야에서 올려다본 밤하늘의 풍경이 전해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하늘의 별을 보며 놀라움을 넘어 공포심마저 느낄 정도였다. 도시에서 어쩌다 본, 그것도 거의 꺼지기 직전의 호롱불 같은 별만 보다 어지러울 정도로 하늘을 뒤덮은 별을 보니 그 별들이 곧 쏟아질 것 같은 공포심이었다.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별의 기운을 받자 마흔 해 동안 찌들어있던 오욕(五慾)이 비늘처럼 떨어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감동을 어찌 버릴 수 있으랴. 그날 이후 작가는 설산의 이미지가 주는 신비로움에 빠져 기회만 되면 히말라야를 찾았고 화폭에는 여전히 히말라야가 들어와 있다.

김하종. ‘계조굴’ 해산도첩. 1815년. 비단에 연한 색. 29.7x43.3㎝. 국립중앙박물관
김하종. ‘계조굴’ 해산도첩. 1815년. 비단에 연한 색. 29.7x43.3㎝.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사람들이 찾았던 설악산

필자는 지난 10월 마지막 주에 설악산에 다녀왔다. 낙산사 일출도 보고 싶었고, 하늘의 신선들이 놀러왔다 눌러앉은 듯한 울산바위도 궁금해 떠난 여행이었다. 역시나 기대했던 대로 흰색 바위로만 이루어진 울산바위는 울창한 나무 사이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듯 여전히 설악산을 잘 지키고 있었다. 비록 히말라야까지는 갈 수 없어도 바위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끼기에는 울산바위로도 충분했다. 김하종(1793~1875 이후)이 1815년에 그린 ‘계조굴(繼祖窟)’은 울산바위와 그 앞에 있는 거대한 암벽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해산도첩(海山圖帖)’에 들어 있는 실경산수화다. 계조암은 바위 속에 법당이 들어있고 그 앞에는 흔들바위도 있다. 그 풍경을 김하종은 사진 찍듯 생생하게 그렸다. 그림 속의 울산바위들은 매우 날카롭게 각이 져 있고, 청색빛을 머금은 먹색의 농담으로 음영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계조굴의 바위는 가운데 부분은 밝고 주변으로 갈수록 점점 진해지면서 입체감을 드러낸 것도 서양화풍의 영향을 반영한다.

김하종의 ‘해산도첩’은 당시 38세였던 노론계 경화거족(한양에 거주하며 관직과 부를 누렸던 양반 가문) 이광문이 23세였던 화원화가 김하종을 대동하고 금강산, 관동팔경, 설악산 등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그리도록 했다. 당시 춘천부사였던 이광문 일행은 내금강→외금강→해금강을 둘러본 후, 낙산사를 들렀다가 마지막으로 설악산을 여행했다. 이 여행코스는 조선 후기에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구경하는 가장 일반적인 루트였다. ‘계조굴’은 ‘해산도첩’ 25폭 중 맨 마지막에 부분에 실린 작품이다.

정선과 김홍도에 의해 제작된 ‘금강산도(金剛山圖)’는 19세기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김홍도가 18세기 사람이라면 김하종은 19세기에 활동했다. 김하종은 그의 조부인 김응환을 필두로 아버지 김득신과 작은아버지 김석신, 둘째 작은아버지 김양신, 그리고 김하종의 형제인 김건종과 김수종이 모두 화원을 지낸 개성 김씨 화원 집안이었다. 화원 집안에서 나름 기반을 잡은 축에 속했다. 김하종의 조부인 김응환은 김홍도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실경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금강산 일대를 그린 ‘금강사군첩’이 현존한다. 아버지 김득신은 실경산수화는 물론 풍속화도 잘 그렸다. 그런 배경에서 자란 김하종 역시 ‘모태’ 산수화가였다. 김하종은 김홍도와 김응환의 영향을 받아 ‘해산도첩’을 그렸지만 새로운 장소도 추가했다. ‘해산도첩’ 안에 있는 설악산 풍경 중 ‘계조굴’을 제외한 ‘설악경천벽’ ‘설악전경’ ‘설악쌍폭’은 김하종에 의해 처음 그려진 명소였다.

그렇다면 설악산 지역은 어떻게 해서 인문 공간으로 명승지가 되었을까. 그 이유에 대해 최지은은 ‘19세기 조선 유당 김하종의 실경산수화 연구’(홍익대 석사논문)에서 이광문이 노론의 문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광문의 조부 이재와 친부 이채가 노론계 김창흡 문인에 속했는데 김창흡의 은거지가 설악산이었다. 김창흡은 사경이 단순한 외형의 묘사가 아니라 천기를 담아내서 신운을 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사실 정신을 주장했던 사람이었다. 그 후 설악산은 노론계 지식인들에게 반드시 들러봐야 할 순례지가 되었다. 단지 설악산이 멋있어서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그곳에 존경해야 할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유명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사람이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산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깨닫게 해준다.

공자가 말한 ‘요산요수’는,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로 끝나지 않는다. 그 말 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뒤따른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 이 문장의 끝부분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仁者壽)’에서 ‘인수지역(仁壽之域)’이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누구나 천수를 다하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태평성대라는 뜻이다. 태평성대가 지혜로움과 어짊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선이 살아야 명산이다

그런데 공자의 말은 무슨 뜻일까. 조선 중기의 문신 조호익은 ‘지산집’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산을 좋아하는 것은 어짊을 권면하는 것이고, 물을 좋아하는 것은 지혜로움을 권면하는 것이다. 지혜로우면 한쪽 구석에 정체되지 않고, 어질면 처하는 데 따라서 편안한 법으로, 산과 물을 즐기는 것은 환난에 처하는 도인 것이다.” 결국 산과 물을 보면서 사람의 도리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호남의 학자 위백규는 좀 더 넓게 해석했다. “인(仁)의 이치가 보편적으로 두루 흐르는 것이 물과 같고, 지(智)의 이치가 미묘하고 응결되어 있는 것이 산과 같지만, 굳이 얽매여 볼 필요는 없다.” 하늘같이 떠받드는 공자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조금 위안을 받는다. 우리가 생각했던 조선시대가 의외로 자유로운 사상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립(1539~1612)도 ‘간이집’에서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최립은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칭송받는 선조 말의 대표적 문인이다. “가령 인자요산이라든가 지자요수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산이나 물을 마침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스르르 풀리면서 함께 동화된다는 말이지, 어찌 꼭 산과 물을 의지해야만 즐거워진다는 말이겠는가?”

인용이 조금 많아졌는데 이제 결론에 도달했다. 당나라의 시인 유우석은 ‘누실명’에서 이렇게 적었다. “산이 높아 명산이 아니라 신선이 살아야 명산이 된다.” 그 글 끝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나온다. “이것은 바로 누추한 집이지만, 오직 나의 덕이 향기로울 뿐이다.” 당나라 왕발의 ‘인걸은 지령’이라는 말도 맞지만, 당장에 히말라야까지 갈 수 없는 내게는 유우석의 말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강찬모가 만난 히말라야도, 김하종이 찾아간 설악산도 그곳에서 신선(혹은 깨달음)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갖고 산다면 우리 동네 뒷산인들 명산이 아니겠는가.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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