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정. ‘매화를 찾아 파교를 건너며(灞橋尋梅)’. 1766년. 비단에 연한 색. 115×50.5㎝. 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 ‘매화를 찾아 파교를 건너며(灞橋尋梅)’. 1766년. 비단에 연한 색. 115×50.5㎝. 국립중앙박물관

집에 군자란을 기르고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주황색 꽃을 보는 즐거움이 매우 컸다. 그런데 3년 전에 지금 집으로 이사 온 후부터는 꽃이 피지 않았다. 화분을 햇볕이 가장 많이 드는 베란다에 놔두었는데도 꽃대가 올라오지 않으니 답답해서 전문가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군자란은 수선화과로 추위를 겪어야 꽃대가 제대로 나옵니다. 겨울을 너무 따뜻하게 나고 추위를 겪지 않으면 안 필 수도 있어요. 그러니 집에서 가장 추운 곳에 두세요.”

하루 종일 햇볕이 드는 양지바른 곳에 놔두면 좀 더 많은 꽃이 필 거라고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꽃마다 다른 특성이 있다는 것을 간과한 탓이다. 군자란 덕분에 몰랐던 지식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우수도 경칩도 지났으니 이제 본격적인 봄이다. 봄은 봄이로되 봄 같지 않은 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우리 집 군자란의 꽃이 안 피어서가 아니라 코로나19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나도 모르게 이상화의 시 구절을 저절로 읊게 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매화를 찾아 파교를 건넌 맹호연

산과 나무에 눈이 수북이 쌓였다. 초봄이라고는 하나 추위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당나귀를 탄 선비가 외출하기에도 꺼려지는 추위를 뚫고 다리를 건너려 한다. 어깨에 짐을 멘 시동이 선비 뒤를 따른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는 ‘파교심매(灞橋尋梅)’라는 화제가 적혀 있다. 매화를 찾아 파교를 건넌다는 뜻이다. 이 그림 제목 때문에 심사정(沈師正)이 그린 ‘파교심매’가 중국 당(唐)대의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에피소드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맹호연은 이른 봄이 되면 항상 파교를 건너 매화를 찾으러 산으로 향했다. 파교는 당나라 수도 장안의 동쪽에 있는 파수(灞水)에 놓인 다리다. 맹호연이 눈 내리는 날 비쩍 마른 나귀를 타고 매화를 찾아 파교를 건넜다는 이야기는 ‘파교심매’ 또는 ‘답설심매(踏雪尋梅)’라는 제목으로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鄭敾)도 ‘파교설후(灞橋雪後)’라는 작품을 남긴 바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맹호연이 ‘파교심매’하던 고결한 행적을, 단지 그림으로만 감상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맹호연 따라하기’를 통해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래서 겨울이 끝나갈 무렵의 동네 산 입구에는 항상 나귀 타고 매화를 찾으러 나선 선비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선비들 사이에서 맹호연 따라하기 열풍이 불어닥친 것은 단지 그 행동이 멋져 보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맹호연의 모습을 두고 송대의 시인 소식(蘇軾)은 이렇게 묘사했다. “또한 보지 못했는가. 눈 속에서 나귀를 탄 맹호연이 이마 잔뜩 찌푸린 채 시 지으며 웅크리고 있는 것을.” 소식에 의하면 맹호연이 매화를 찾아나선 것은 시를 짓기 위해서였다. ‘파교심매’를 ‘기려색구(騎驢索句)’로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귀 등에서 시 구절을 찾는다는 뜻이다. 누군가는 “맹호연의 시사(詩思)는 파교에 풍설이 부는 가운데 나귀의 등 위에 있다”고 평가했다.

소식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된 맹호연의 탐매행은 당나라의 정계(鄭綮)라는 시인 때문에 더 알려지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정계에게 물었다. “요즈음 새로운 시를 얻었는가.” 그러자 정계가 이렇게 대답했다. “시흥(詩興)은 파교에서 풍설을 맞으며 나귀를 몰아가는 때라야 떠오른다. 어찌 이런 데서 될 법이나 한 말인가.” 정계의 이 대답은 어찌나 큰 유명세를 탔던지 시대를 대물림하면서 인구에 회자되었다. 더불어 맹호연의 명성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공행진했다.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은 청나라 때 간행된 그림 교본책이다. 이 책에도 나귀 탄 맹호연과 시동이 ‘시사재파교려자배상(詩思在灞橋驢子背上)’이라는 화제와 함께 등장한다.

맹호연은 자연 경물을 시로 묘사하는 데 특출난 재능이 있는 시인이었다. 그는 ‘시불(詩佛)’이라는 칭호를 받는 왕유(王維)와 함께 ‘왕맹(王孟)’으로 불릴 정도로 시를 잘 지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왕맹처럼 좋은 시를 지을까 고민하던 조선시대의 시광들에게 맹호연은 따라하기 좋은 롤모델이었다. 이것이 맹호연 따라하기 열풍의 전말이다. ‘팔로어’에게 롤모델은 사소한 것도 특별하게 보이는 법이다. 맹호연이 쓴 두건이 그렇다. 그는 추위를 막기 위해 머리에 방한모자를 썼는데 그 안에 등 뒤로 허리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천을 드리웠다. 사람들은 이것을 맹호연이 쓴 두건이라 하여 호연건(浩然巾)이라고 불렀다. 심사정의 그림 속에서도 호연건을 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심사정 역시 맹호연의 에피소드를 그리기 위해 철저히 고증했음을 알 수 있다.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은 임포

맹호연과 더불어 북송(北宋)의 임포(林逋)는 매화를 언급할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시인이다. 매화와 연관되었으되 임포의 매화 그림은 맹호연의 그것과 갈래가 조금 다르다. 맹호연에게 매화가 시흥의 매개체였다면 임포에게 매화는 탈속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언제나 매화 매니아의 핵심인물로 거론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송상기(宋相琦)는 ‘매화’라는 시에서 ‘처사는 서호 위에서(處士西湖上)/ 시옹은 파수 언덕에서(詩翁灞水涯)/ 고아한 정취 천년토록 남았지만(高情千古在)/ 그 멋을 아는 사람 몇이던가(勝賞幾人知)’라고 읊조렸다. 서호의 처사는 임포를, 파수 언덕의 시옹은 맹호연이다.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李睟光)은 ‘오랜 여행에 지치다’라는 시에서 ‘서호엔 매화 찾는 조각배가 움직이려 하고…(중략) 어깨 웅크리며 시 읊는 파교의 정취 보리라’라고 하였다. 역시 임포와 맹호연에 대한 얘기다.

임포는 북송의 은사였다. 그는 항주(杭州)의 서호가 내려다보이는 고산에 은거한 후 성시에는 일절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동안 장가를 가지 않았다. 대신 매화 삼백 그루를 심고 학을 기르며 살았다. 사람들은 그가 매화를 부인 삼아, 학을 자식 삼아 살았기 때문에 ‘매처학자(梅妻鶴子)’라 불렀다. 그는 사후에 화정(和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집에서 흔히 ‘화정선생’이라는 칭호를 받는 사람이 바로 임포다. 임포는 매처학자답게 매화에 대한 시를 여러 편 남겼다. 그가 남긴 시 중에서 ‘산원소매(山園小梅)’의 한 구절은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성긴 그림자는 맑고 얕은 물 위에 비스듬히 드리우고(疎影橫斜水淸淺)/ 그윽한 향기 떠도는데 달은 이미 어스름(暗香浮動月黃昏)’이라는 구절이다.

정선이 그린 ‘고산방학(孤山放鶴)’은 임포의 삶을 상상해서 그린 작품이다. 그림 중앙에는 매화나무에 두 팔을 걸친 임포가 서 있고 그 뒤에는 시동이 서 있다. 산과 시냇가는 온통 눈이 뒤덮여 있는데 테두리만 그려진 산 위로 학이 날아온다. 우측 상단에 ‘고산에서 학을 풀어놓다’라는 뜻의 ‘고산방학’이라는 화제가 적혀 있다. 이와 거의 비슷한 구도의 정선 그림이 간송미술관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화제는 ‘매학생애(梅鶴生涯)’다. 매화와 학과 함께한 생애라는 뜻이니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않고 은거한 임포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한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아내와 자식이 곁에 있으니 세상과 격리되어 있어도 아쉬울 것이 없는 삶이었을 것이다. 정선의 화제 속에는 임포에 대한 긍정과 찬탄이 들어 있는 듯하다.

정선. ‘고산방학(孤山放鶴)’. 18세기. 비단에 색. 29.1×23.4㎝. 왜관수도원
정선. ‘고산방학(孤山放鶴)’. 18세기. 비단에 색. 29.1×23.4㎝. 왜관수도원

선비들이 매화를 사랑한 까닭

매화는 흔히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 칭송받는다. 신선의 풍채와 도인의 골격이란 뜻으로 매화의 고상한 자태를 칭찬한 말이다. 매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찬탄해 마지않았지만 다른 꽃들에 비해 그렇게 화려하지도 눈부시지도 않다. 매화와 비슷한 벚꽃과 복숭아꽃을 생각한다면 그 차이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두 꽃에 비해 매화는 오히려 심심할 정도로 수수하다. 그런데도 시인 묵객들은 벚꽃과 복숭아꽃 대신 매화를 향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17세기의 도학자이자 정치가인 이현일(李玄逸)의 문집 ‘갈암집’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이현일이 쓴 ‘수우당(守愚堂) 선생 최공(崔公) 행장’에는 이런 일화가 적혀 있다. 수우당은 대숲 속에 집을 짓고, 뜰에는 매화와 국화를 심고, 백학 한 쌍을 길렀는데 좌우에는 도서를 쌓아놓고 그 속에서 독서하면서 도를 즐겼다. 고상한 살림살이가 임포 못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수우당이 한강의 백매원(百梅園)에 들렀을 때였다. 때는 2월이라 매화가 만개해 있었다. 음력 2월이니 양력으로 3월쯤 되었을 것이다. 매화를 보고 있던 수우당이 갑자기 시동을 불러 도끼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온 뜰의 매화나무를 모두 찍어서 넘어뜨리라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만류하였다. 그러자 수우당이 웃으면서 그만두게 하고 이렇게 말했다.

“매화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눈 내린 골짜기의 추위 속에서 온갖 꽃들에 앞서 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복숭아, 자두와 봄을 다투고 있으니 어찌 귀할 것이 있겠는가?”

다른 꽃이 다 필 때 피는 매화는 굳이 박수받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한겨울의 추위를 뚫고 나와 가장 먼저 봄소식을 알려주기 때문에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중 한 사람인 장유(張維)의 시문집 ‘계곡집’에는 또 다른 일화가 등장한다. 그가 광주(光州)에 사는 정모씨(丁某氏)를 위해 쓴 ‘삼매당기(三梅堂記)’라는 글에 나오는 얘기다. 정모씨는 광주에서 상당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는 자신이 은거하고 있는 곳에다 몇 칸짜리 초옥을 마련하고서 방 안에 도서를 빙 둘러놓은 다음 대나무와 작약 등을 섞어서 심어 앞뒤로 그 집을 감싸게 하였다. 수우당과 정모씨의 주거공간을 보면 조선시대 선비들의 누리고 싶은 사치가 가볍지 않고 매우 고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모씨의 화원에는 오래된 매화나무 세 그루가 처마 위로 높이 솟아 있었다. 어느 날 그 가지가 기이하게 뻗어 내려 창문을 가리며 드리워 있었다. 정모씨는 그것을 보고 집 이름을 ‘삼매당’이라고 내걸었다. 세 그루 매화가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자 어떤 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당신의 화원에는 온갖 꽃들이 다 갖추어져 있소. 붉은색, 자주색에 짙은 빛, 옅은 빛의 꽃들이 사계절 내내 끊이지 않고 피는데, 그 선명함이나 화려함의 정도를 따져 본다면 세 그루 매화보다 필시 몇 배는 나을 것이오. 그런데 그런 꽃들은 그만두고 하필이면 매화를 취해 편액을 내걸다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정모씨는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군자가 외물을 취함에 있어 눈요기만으로 만족하려 한다면야 어느 것인들 안 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오. 그러나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할진대 어찌 아무것이나 구차하게 택해서야 되겠소? 내 화원에 있는 꽃들로 말하자면 따스한 봄철에서부터 낙엽 지는 가을까지 연이어 피는 기화요초가 상당히 많다고 할 만하오. 그러나 색깔을 좋아하는 것은 덕을 애호하는 이가 취할 것이 못 된다고 할 것이오. 뭇 화초류와 선두를 다투지 않고, 기후의 변동에 자기 지조를 바꾸지 않은 채 맑은 향기를 내뿜어 높은 품격을 보여주면서 곧장 고인(高人) 운사(韻士)와 서로 어울릴 그런 꽃을 찾는다면, 우리 매형(梅兄)을 놔두고 어디에서 따로 구하겠소?”

그러면서 정모씨는 ‘세한 무렵에 된서리가 내리고 눈발이 흩날려 모든 꽃들이 시들어버릴 때’ 이 매화나무 세 그루야말로 “비로소 준수한 자태를 선보이며 화원에 우뚝 서서 그 정채를 발산하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그때의 매화의 남다른 향기와 차고도 고운 영상이 그의 방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와 금서에 반사되어 비칠 때, 곧장 사람의 마음을 한 점의 티도 없이 맑고도 시원스럽게 해준다고 덧붙였다.

이현일과 장유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자명하다. 매화보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은 많지만 매화만큼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꽃은 없다는 사실이다. 매화가 겨울이라는 극한의 시간을 견딘 후 꽃을 피운 것을 보고 지금 인생의 겨울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은 힘을 냈을 것이다. 나도 지금의 겨울만 견디면 내 인생의 꽃을 피울 수 있겠구나 하는 격려 말이다.

궁해진 뒤에야 좋은 시가 나온다

송나라 시인 구양수(歐陽脩)는 ‘매성유시집’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세상에서는 시인들이 영화를 누리는 경우는 드물고, 빈궁하게 되는 경우만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맞는 말이겠는가. 대체로 시는 빈궁해질수록 더욱 멋진 표현이 나오게 되나니, 그렇다면 시가 사람을 빈궁하게 만든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궁하게 된 뒤에야 멋진 시가 나온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구양수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어찌 시에만 국한되겠는가. 사람 살이에는 전부 다 해당할 것이다. ‘맹자’의 ‘고자장구’를 보면, 궁하게 된 뒤에야 멋진 시가 나오는 이치를 짐작할 수 있다. 워낙 유명한 문장이라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기를 거듭한 명문이다.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이 사람에게 내리려 하실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 심지를 괴롭게 하며, 그 힘줄과 뼈를 수고롭게 하고, 그 몸과 피부를 굶주리게 하며, 그 몸을 빈궁하게 하여, 행함에 그 하는 바를 어그러지게 하니, 이것은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 능하지 못한 바를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동안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의 공포심 때문에 봄이 왔는지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 매화가 활짝 피었다. 매화를 보니 밤새 신열에 시달리다 아침을 맞이한 사람처럼 유난히 반갑고 기쁘다. 한겨울 추위를 이기고 피어난 매화처럼 우리 인류 또한 우리에게 닥친 이 재난을 슬기롭게 극복할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욱더 지혜롭고 성숙한 새 인류로 거듭날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늘이 내린 큰 임무를 맡아’ 몸을 사리지 않고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힘내시라는 격려의 응원을 보낸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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