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반틴 바다에서 북쪽으로 70㎞ 정도 떨어져 있는 아나바르자성. 150m 높이 수직 바위 위에 세워진 십자군의 성이다.
레반틴 바다에서 북쪽으로 70㎞ 정도 떨어져 있는 아나바르자성. 150m 높이 수직 바위 위에 세워진 십자군의 성이다.

7월부터 터키 레반틴(Levantine) 바다 근처에 머물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지중해 동쪽 끝 바다를 지칭한다. 터키·시리아·레바논·사이프러스·이스라엘·이집트와 접하는 바다로, 광의적으로 보면 지중해권이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기반으로 한 인류 역사에 등장한 최초의 바다이다. 레반틴을 기점으로 에게해와 지중해 나아가 대서양, 인도양으로 서진(西進)한 것이 서방의 역사다. 전쟁으로 얼룩진 곳이지만, 최근에는 천연가스가 발견돼 벼락부자로 만들어줄 희망의 바다로 변신 중이다. 분위기만 보자면 에게해보다는 시끄럽고 지중해보다는 조용한 곳이다.

성(城)은 레반틴 주변을 오가면서 발견한 새로운 관심사 중 하나다. 해안가는 물론 조금 떨어진 내륙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성이 들어서 있다. 개인적 소감이지만, ‘축성(築城) 3년 낙성(落城) 하루’라는 말은 성에 관련한 첫 번째 이미지다. 아무리 크고 강해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낙성은 성이 부서지거나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안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성 밖으로 떠났다는 의미다. 만리장성 아니라 우주장성을 쌓아도 성 내부의 단결과 결의가 없는 한 무용지물이다. 2020년 한국에서 벌어지는 시대착오, 자가당착, 내로남불 현실은 좋은 예다. 교과서에서나 나오던 사색당파와 죽이고 살리는 각종 사화(士禍)들로 날과 밤을 새고 있는 느낌이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이후 반세기 동안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듯하다.

레반틴 주변에서 접한 성의 첫인상은 지금까지 만났던 성의 이미지와 전혀 다르다. 고대 유물·유적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혼(魂)’에 있다. 눈앞에 드러난 모든 것에 인간의 생명, 기원, 희망, 나아가 죽음이 새겨져 있다. 체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레반틴 주변 성들을 보는 순간 그 같은 혼이 가슴속에 와 닿았다. 지난해 암스테르담 뮤지엄에서 만났던 17세기 네덜란드 상선에서 받은 느낌과 비슷하다. 위에서 지시해 노예가 만든 배가 아니다. 배를 타고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로 향하는 시민 모두가 구석구석 함께 건조한, 시민 개개인의 분신 같은 전함이다. 자신의 목숨을 지켜주는 배이기에 두 눈을 부릅뜬 채 배의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것이다. 17세기 황금기의 네덜란드인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배와 무기 전문가들이다.

레반틴 곳곳에 지어진 십자군의 성

‘축성 10년 낙성 10년’으로 느껴진 레반틴 성도 마찬가지다. 왕의 명령으로 성 전문가나 포로들이 만든 방어시설이 아니다. 상하 구별 없이 일심동체가 되어 축성에 참여한, 인간 개개인의 혼이 모인 시설로 느껴진다. 성을 창조해낸 노력과 정성만이 아니라 성을 지키려는 의지와 결의도 강렬한 혼으로 발산된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러한 혼에 압도될 정도다. 성을 만들고 지켜온 수많은 영령의 그림자가 넘실댄다고나 할까? 90도 기암절벽 꼭대기 위에 들어선, 말 그대로 난공불락 철옹성이 레반틴에서 만난 수많은 성의 공통분모다. 이들 성의 대부분은 1096년부터 1271년까지 벌어진 십자군전쟁의 흔적들이다. 십자군과 이슬람이 벌인 8차례에 걸친 ‘문명과 피’의 충돌 현장이 레반틴 주변에 뿌려져 있다. 흔히들 십자군전쟁이라고 하면 예루살렘에 관한 이미지부터 떠올릴 듯하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터키·시리아·레바논·사이프러스·이집트를 포함한 레반틴 주변 전부가 십자군전쟁의 무대였다. 심지어 가톨릭 유럽제국(諸國)의 맏형 비잔틴제국도 피의 현장 중 하나다.

십자군전쟁은 900여년 전의 사건이다. 오늘날과 전혀 다른 양상의 전쟁이다. 한꺼번에 곧바로 이스라엘로 진격해서 현지 이슬람과 싸울 수 없다. 먼 길을 단 한 번 만에 갈 수도 없고, 수백 명 단위를 실어나를 큰 배도 없었던 시대다. 육로와 해로로 번갈아가면서 이동하는 식이다. 식량과 무기에 관련한 보급 문제도 있고, 적의 공격에서 벗어난 안전망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레반틴 주변 곳곳이 요새화된다.

성은 그중 핵심시설이다. 십자군은 21세기처럼 단일 명령하의 체계화된 군사작전과 무관하다. 교황 우르반 2세가 주창한 성지 회복이란 명분을 내세우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각 나라, 각 지역 지도자의 목적이 전부 다르다. 따라서 성 구축 같은 것도 십자군 각자의 상황과 여건에 맞게 임의로 진행됐다. 모두 함께 만드는 성이지만, 그래도 현지에서의 재료와 장비 구입에 따른 돈이 필요하다. 성을 가진 십자군은 혼만이 아니라 재력도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레반틴 주변에 남은 수많은 성은 백인백색 십자군이 만들어낸 중구난방 연합군의 유물·유적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엉성한 명령 체계라 해서 성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각자도생이라고나 할까? 적과 싸워 살아남기 위해, 최후의 목표인 이스라엘 탈환을 위해 모두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돌로 지어진 아나바르자성 내부.
돌로 지어진 아나바르자성 내부.

어떻게 저런 곳에 성을?

아나바르자(Anavarza)성은 십자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최적의 현장이다. 레반틴 바다에서 북쪽으로 70㎞ 정도 떨어진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에 들어선 성이다. 7월 중순에 들렀지만, 첫눈에 빠져들었다. 150m 높이 수직 바위 위에 ‘살짝’ 올려진 성이다. 탄성조차 터뜨리기 어려운 ‘신비와 신성’으로 채워진 공간이다. 체감온도 40도를 넘어선 견딜 수 없는 더위였지만, 곧바로 바위 위 성으로 향했다. “어떻게 저런 곳에 저런 성을 만들었을까?” 유럽에서 접했던 미와 예로서의 성이나, 건축학적 차원의 호기심과는 전혀 다르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혼은 혼을 부른다. 위선과 변명이 넘치는 척박한 삶일수록, 혼의 목소리에 한층 더 빠지게 된다. 한여름 절벽 위에서 뿜어나오는 혼의 현장을 몸으로 체득하고 싶었다. ‘축성 3년, 낙성 하루’는 성만이 아닌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건강과 체력에 자신이 있더라도 나이에는 장사가 없다. 말도 안 통하는 현지 주민에게 찾아가 길 안내를 부탁했다. 하산(Hassan)이란 이름의 10살 어린이가 길라잡이로 나섰다. 운동화가 아닌 슬리퍼를 신었다.

아나바르자는 고대 로마 때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됐다. 그러나 곳곳에 존재하는 돌무덤을 보면, 이미 로마가 들어오기 수천 년 전에 인간이 정주했던 곳이라 판단된다. 십자군이 만든 성의 대부분은 ‘유(有)에서 유(有)’의 산물이다. 원래부터 존재하던 인류 문명을 기반으로 한 성이 대부분이다.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인간이 갖는 공통적인 세계관이다. 지중해 에게해 레반틴 주변을 돌면서 느낀 것이지만, 자연과 세계 나아가 신을 대하는 고대·중세·현대 인간의 눈은 대동소이하다. 신전이나 고대 도시의 위치를 보면, 아시아에서 온 필자조차도 납득할 만한 공간이다. 물이 넘치고 적의 공격에 맞설 공간이란 점 외에도, 인간의 내면에 울려 퍼지는 설명하기 어려운 뭔가가 존재한다. 앞서 말한 혼이다. 20세기 들어 인구가 급증하면서 혼과 무관한 공간으로 떠밀려가지만, 현대인이라도 보는 즉시 선조가 공유했던 혼을 다시 체득할 수 있다. 레반틴의 수많은 성이 선사시대,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어 십자군과 이슬람의 도시로 살아남은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두 번째는 재료다. 성은 노력·결의만이 아닌, 축성을 위한 재료가 필요하다. 레반틴에서 만난 성의 100%가 돌로 구축된 것이다. 독일에서 볼 수 있듯이, 부분적으로라도 나무로 만든 성은 전혀 없다. 축성용 돌은 단단하고 커야 한다. 새로운 돌을 찾아 옮기고 깎을 만한 시간적, 금전적 여유도 없다. 대안은 기존의 건축물에 사용된 돌들의 재활용이다. 로마 신전에 활용됐던 초대형 대리석은 가장 좋은 재료다. 비잔틴 시대 교회도 축성 재료로 재활용된다. 당시 가톨릭 십자군은 그리스정교의 비잔틴을 이단이나 사교로 취급했다. 같은 기독교 교회라고 하지만, 정통이 아닌 한 부수고 재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십자군 성은 보통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2구역부터는 사다리를 타고 절벽을 넘어야 들어갈 수 있다.
십자군 성은 보통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2구역부터는 사다리를 타고 절벽을 넘어야 들어갈 수 있다.

사다리 타고 올라가야 하는 요새

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성 뒷부분에서 시작한다. 나무 하나 없이, 어디 숨을 곳 하나 없는 바위 길이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지만, 습기와 열기로 숨이 막힐 정도다. 거의 사우나 상태에서 성문 앞에 도달했다. 밑에서 보던 난공불락 이미지에 비해 비교적 간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성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오판이란 것을 알게 됐다. 레반틴에서 만난 다른 성들에도 적용될 수 있지만, 십자군 성은 보통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바깥쪽 3구역은 주민들의 출입이 가능하다. 식량이나 물이 공급되는 곳이다. 2구역부터는 군인들에게만 허용된 십자군 요새다. 3구역에서 2구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절벽 하나를 넘어야 한다. 절벽은 말 그대로 절벽이다. 아나바르자의 경우 2구역 성으로 넘어가는 절벽의 높이가 약 7m 정도다. 그렇게 높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전문 등산가가 아니면 넘어설 수가 없는 형세다.

십자군들은 어떻게 2구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2구역 안에서 내려다주는 사다리가 답이다. 십자군 동료가 같은 편이란 것을 확인한 뒤 사다리를 내려주면 그걸 타고 올라가는 식이다. 친절하게도 900여년 전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듯, 작은 철제 사다리 하나가 절벽 위에 설치돼 있다. 민첩하게 움직이는 하산을 흉내 내 곧바로 올랐지만, 사다리에 발을 디디는 순간 공포가 밀려왔다. 사다리 바로 왼쪽이 수직 낭떠러지다. 게다가 협곡 속 절벽이라 없던 바람이 어딘가에서 한꺼번에 밀려왔다. 부끄럽지만, 사다리 두세 개를 오르다 다시 내려왔다. 고소공포증 때문이기도 하지만, 150m 수직 낭떠러지를 보는 순간 팔다리가 떨려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1구역은커녕 2구역 입구에서 주저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3구역에서 쉬는 동안, 십자군들이 얼마나 혹독한 환경에서 싸웠는지, 2구역 입구 협곡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뿌려졌을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육지에서 300m 떨어진 메르신 바다 섬에 들어선 해상 공격용 십자군 성 키즈카레시.
육지에서 300m 떨어진 메르신 바다 섬에 들어선 해상 공격용 십자군 성 키즈카레시.

프랑스군 이끌던 스테판 공작의 편지

1098년 제1차 십자군전쟁 당시 프랑스군을 이끌었던 스테판 공작(Stephen, Count of Blois and Chartres)이 부인 아델(Adele)에게 보낸 편지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단서 중 하나다. ‘5000명 이상의 용감한 터키군과 함께 사라센·아랍·시리아 혼성군들이 성안(안티코)으로 밀려들어왔다. 우리는 신의 적(이슬람군)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난과 악을 인내해야만 했다. 신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대부분은 이미 지쳐버린 상태였다. 만약 우리가 도와주지 않았다라면, 다른 십자군 상당수가 이미 기아로 숨졌을 것이다. 안티코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우리는 추위와 차가운 폭우로 고생을 해야만 했다. 시리아의 뜨거운 햇볕이 있는데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겨울의 여기(레반틴)는 유럽과 크게 다를 바 없다.(1098년 3월 29일)’

스테판은 편지를 쓴 지 4년 만인 1102년 5월 19일, 56세의 나이로 예루살렘에서 전사한다. 스테판이 출정한 제1차 십자군전쟁은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 승전사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한다. 전부 8차에 걸친 성지회복 군사작전을 통틀어 유일하게 승리한 것이 제 1차 십자군전쟁이다. 나머지는 대실패에다 대학살, 나아가 적이 아닌 비잔틴 점령과 유대인 말살로 변해간다. 스테판이 언급한 ‘고난·악·인내·기아’는 서막에 불과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측은하게 쳐다보는 하산의 눈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2구역 진입에 나섰다. 낭떠러지 방향인 왼쪽 눈을 아예 감은 채 사다리를 타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대략 3년에 한 명 정도 낙상 사고가 발생한다고 한다. 4년 전에는 20대 미국인이 낙상해 헬리콥터까지 동원됐다고 한다.

2구역에는 실내 건물 5개가 들어서 있다. 전부 990㎡(300평) 정도 크기의 공간이다. 교회와 더불어 숙소·식량·무기 보관소로 활용됐다. 아예 바위를 판 공간도 있지만, 기반을 아치형으로 만들어 아래와 위 공간을 전부 활용하는 식이다. 그리스 로마 신전처럼 대리석 기둥이 건물 곳곳을 지지하고 있다.

놀랍게도 건물 사이에 작은 우물 하나가 들어서 있다. 어떻게 물을 모았는지 궁금하지만, 이슬람과 전쟁 당시 피보다 더 중시했던 곳이었을 것이다. 2구역을 넘어서 1구역으로 통하는 절벽이 눈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15m 정도 높이다. 어느 틈엔가 하산이 위로 올라가 기다리고 있다. 이성이 있다면 접을 때 접어야 한다. 무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1구역은 그만두기로 했다. 강풍을 동반한 양쪽의 낭떠러지에다 아예 사다리도 없기 때문이다. 작은 돌들의 틈새를 이용해 올라간 하산이 마치 지중해 절벽 위 산양처럼 느껴졌다.

난공불락의 성도 결국 함락된다

현재 서부·동부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성의 대부분은 십자군전쟁 이후의 작품들이다. 십자군전쟁은 유럽의 성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꿨다. 원래 재료이던 나무와 흙을 대신해, 돌로 전면 개조·확장한다. 성 주변은 물로 채워 장애물로 바꾸고, 암반을 성의 기반으로 활용한다. 비잔틴 건축공법이자, 십자군 성을 본뜬 구도다. 그러나 성의 역사는 이후 장거리 대포의 출현과 함께 잊히기 시작한다. 난공불락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 3중 철옹성조차 1453년 터키에 함락된다. 19t 초대형 청동대포 다르다넬레스(Dardanelles)가 주인공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십자군이 만든 ‘축성 10년 낙성 10년’은 13세기 말 십자군전쟁 종식과 함께 이슬람의 수중에 넘어간다. 기본적으로 이슬람은 고착형이 아닌, 이동형 전쟁을 기본으로 한다. 이후 대부분 방치된 상태에서 21세기 들어 관광지로 변해가고 있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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