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미상. ‘명현제왕사적도(名賢帝王事蹟圖)’ 중 ‘부열축암(傅說築巖)’. 비단에 색. 107.3×41.8㎝. 국립중앙박물관
필자미상. ‘명현제왕사적도(名賢帝王事蹟圖)’ 중 ‘부열축암(傅說築巖)’. 비단에 색. 107.3×41.8㎝. 국립중앙박물관

생각이 사무치면 꿈으로도 그 생각이 연장된다. 꿈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도 있고 병이 나을 수도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문으로 유명한 성철 스님은 ‘몽중일여(夢中一如)’를 강조했다. 참선할 때 잡은 화두가 깨어 있을 때는 물론이고 꿈속에서도 한결같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타성에 젖은 참선 수행 풍토에 일침을 가하기 위한 법문이었다고 해석된다. 그런데 몽중일여를 다른 측면에서 해석해 보면 무의식의 세계라고 여겼던 꿈마저도 지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생각이 절실하면 꿈속에서도 지속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 같아 매우 신선하게 들렸다. 그 생각이 화두일 수도 있고 소원일 수도 있고 기도일 수도 있다.

필자가 아는 사람 중에 불치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물 한 모금 삼킬 수도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 누워서 링거를 맞으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뼈만 남은 팔에는 더 이상 링거 바늘을 꽂을 자리도 없었다. 그는 어차피 죽을 거라면 죽기 전에 기도나 한번 해보자고 결심했다. 눈만 뜨면 염불하기를 몇 달. 어느 날 꿈속에 흰옷 입은 여인이 나타나 주삿바늘로 아픈 부위를 찌르더니 고름을 짜냈다. 고름을 짜낼 때의 고통이 얼마나 생생하던지 비명을 지르다 잠에서 깨어났다. 다음 날부터 그는 미음을 삼키고 일어나 걸을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을 회복했다. 꿈속에서 그를 고쳐준 여인은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었다. 필자도 몇 해 전 뇌종양 수술을 받기 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죽을지도 모르는 수술을 앞두고 죽자사자 염불에 매달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수없이 많은 벌레를 토해내는 꿈을 꾸었다. 그런 다음 수술을 받았고 완치되었다.

기적이나 가피라고 하는 이런 이야기는 불교든 기독교든 무속이든 상관없이 어떤 종교 집단에서든지 흔하게 들을 수 있다. 초자연적인 얘기가 싫다면 그냥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로 대신해도 좋다. 정성을 다하면 하늘마저 감동하게 만드는 것이 기적이고 가피이기 때문이다. 기적과 가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부분에 대해 간절하게 구하는 목소리에 대한 하늘의 응답이다. 이것을 감응이라고 표현한다. 꿈을 통해 하늘의 감응을 받은 이야기는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 오늘 살펴보게 될 상나라의 고종(高宗)과 부열(傅說)의 만남 그리고 다음 글에 나올 문왕(文王)과 강태공(姜太公)이 모두 꿈을 통해 하늘의 감응을 받은 사례다.

꿈에서 본 초상화의 주인공을 찾아라!

탕 임금이 상(商)나라를 세우고 한참 지난 뒤였다. 상나라는 누가 다스리느냐에 따라 번영과 쇠락을 거듭했다. 탕 임금이 이윤과 손발을 맞춰 선정을 베푼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 내려왔다. 그 과정에서 고종이 즉위했다. 고종은 즉위하자마자 상나라를 부흥시키려고 했으나 이윤같이 자신을 보좌할 어진 신하를 얻지 못했다. 그는 이윤 같은 신하가 없는 상황에서 탕 임금 같은 정치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라를 망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3년 동안 결코 말을 하지 않았다. 왕이 입을 다물어버리니 답답한 것은 신하들이었다. 신하들은 왕에게 “말씀을 안 하시면 명령을 받들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소연했지만 왕의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고종은 꿈속에서 성인(聖人)의 모습을 보았다. 그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이윤처럼 자신을 보좌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는 꿈에서 본 사람의 모습을 초상화로 그리게 한 후 똑같이 생긴 사람을 찾아오라고 명령했다. 수많은 대신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초상화의 주인공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마침내 부암(傅巖)이라는 공사판에서 성벽을 쌓으며 막노동을 하고 있는 부열을 찾아냈다. 고종은 부열을 재상으로 삼아 탕 임금 때의 영화를 되살릴 수 있었다.

필자미상의 ‘부열축암(傅說築巖)’은 고종이 보낸 관리가 부암에서 초상화와 부열을 대조해 보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부열축암은 ‘부열이 바위를 쌓는다’는 뜻이다. 네 명의 관리는 초상화를 펼쳐 놓고 앞에 선 인물이 ‘진품’이 확실한지 거듭 살펴보는 중이다. 두 손을 맞잡고 선 부열 뒤에는 그가 성벽을 쌓기 위해 방금 전까지 흙을 담던 삼태기와 가래가 놓여 있다. ‘부열축암’은 ‘명현제왕사적도(名賢帝王事蹟圖)’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부열축암’은 여러 화가들에 의해 그림의 주제로 자주 등장했다. 민화에도 단골메뉴로 선택되었다. 이 주제가 유행하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고종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워 줄 훌륭한 재상을 얻기 위해 간절히 기도한 결과 꿈속에서 그 응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줄거리다. 그러나 진짜 속 깊은 이유는 어느 시대고 인재를 얻기 위해 정성을 다한 위정자의 노력이 그만큼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종과 부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서경’의 ‘상서’ 중 ‘열명’에 나온다.

사도세자의 교육자료로 쓰인 ‘만고기관첩’

진재해(秦再奚·?~1733)가 1720~1730년경에 그린 ‘부열축암’도 같은 내용의 작품이다. 차이가 있다면 ‘명현제왕사적도’의 ‘부열축암’이 전경, 중경, 후경으로 다채롭게 구성되었다면 진재해의 작품은 위아래가 생략되고 중경만 근접 촬영하듯 강조되었다. 이것은 세로가 긴 병풍 그림과 가로가 긴 화첩 그림이라는 재료의 차이에서 온 변화일 것이다. 진재해의 ‘부열축암’은 오른쪽에 그림이, 왼쪽에는 그림에 대한 설명이 들어간 우도좌문 형식이다. 그림과 글이 서로 보충하는 관계다. 그림 왼쪽에는 ‘서경’의 ‘상서’ 중 ‘열명’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임금이 글을 지어 훈계하기를, “나는 덕이 (선왕들과) 같지 않을까 두려워해서, 공손하게 침묵하며 도를 생각했었는데, 꿈에 하느님께서 내게 좋은 보필을 주셨으니, 그가 나를 대신해서 말할 것이다”라고 하며, 그 인상을 자세히 기억하여 그 형상을 가지고 온 천하에 두루 찾게 하니, 부열이 부암이란 들판에서 성을 쌓고 있었는데, 꼭 닮아 그를 세워 재상으로 삼았다.’

진재해의 ‘부열축암’은 ‘만고기관첩(萬古奇觀帖)’에 들어 있다. ‘만고기관첩’은 양기성이 그린 ‘이윤경신’을 감상할 때 본 그 화첩이다. 진재해는 국수(國手)라 일컬어질 정도로 인물화를 잘 그린 화원(畫員)이었다. ‘국수’는 말 그대로 ‘나라의 손’이니 손재주라면 나라에서 으뜸인 사람을 일컫는다. 바둑의 신 조훈현을 국수라고 칭하듯 바둑이나 장기, 활쏘기 등의 기예가 뛰어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호칭이다. 병을 치료하는 명의도 국수에 포함된다. 그림 세계의 국수 진재해는 바둑 세계의 조훈현급으로 봐도 무방하다. 진재해는 숙종의 어용을 그린 인물화가로 이름을 날렸고, 사대부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도 실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국수였다는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매우 드물다. 숙종의 명으로 그린 ‘농사짓기와 누에치기(蠶織圖)’(국립중앙박물관), 두 선비가 소나무 아래 앉아 피리를 불며 달을 감상하는 ‘월하취적도(月下吹笛圖)’(서울대학교박물관)가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두 작품은 과연 한 작가의 솜씨로 그린 작품일까 의심이 들 정도로 필치가 다르다.

진재해는 이렇게 다양한 화법의 그림 세계를 펼쳐 보였는데 ‘부열축암’의 화풍은 의외다. 양기성의 ‘이윤경신’과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평이하다. 그림의 왼쪽 상단에 제목을 쓰고 오른쪽 하단에 이름을 적는 형식도 똑같다. 만약 ‘진재해’라는 화가 이름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양기성의 작품으로 착각할 정도다. 이렇게 비슷한 형식으로 그림이 제작된 이유는 ‘만고기관첩’이 화가의 재량을 드러내기 위한 화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화첩은 사도세자의 수업에 쓰이는 교재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자의 수업에 쓰이는 교재이니만큼 화첩 안에 든 그림들은 마치 한 작가가 그린 것처럼 통일성 있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화가의 개성보다는 교재라는 쓰임새에 충실한 작품이어야 했다. 세자는 오른쪽의 그림을 보면서 왼쪽에 적힌 ‘열명’의 내용을 소리 내어 낭독하며 상나라의 고종과 같은 임금이 되기를 열망했으리라. 물론 그는 왕이 되기 전에 아버지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는 불운한 최후를 맞았지만 말이다.

진재해. ‘만고기관첩(萬古奇觀帖)’ 중 ‘부열축암(傅說築巖)’. 1720~1730년경. 종이에 색. 37.9×29.4㎝. 일본 대화문화관(大和文華館)
진재해. ‘만고기관첩(萬古奇觀帖)’ 중 ‘부열축암(傅說築巖)’. 1720~1730년경. 종이에 색. 37.9×29.4㎝. 일본 대화문화관(大和文華館)

부열은 어떻게 왕을 보좌했을까

그렇다면 부열은 어떤 방식으로 고종을 보좌해 훌륭한 정치를 실현했을까. 고종은 꿈속에서 본 인물을 실제로 만나게 되자 이렇게 말했다.

“아침저녁으로 가르침을 주어 나의 덕을 보좌하라. 만약 쇠를 다룬다면 그대를 숫돌로 삼을 것이며, 만약 큰 시내를 건넌다면 그대를 배나 노로 삼을 것이며, 만약 어떤 해에 큰 가뭄이 든다면 그대를 장맛비로 삼을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전권을 줄 테니 그대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보아라. 이런 뜻이었다. 궁벽한 오지에 꼭꼭 숨어 있는 자신을 발탁한 것도 모자라 전적으로 믿고 맡긴다는 말에 부열은 감격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자신을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왕 앞에 나아가 넙죽 엎드려 감동의 절을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부열은 달랐다. 그는 왕 앞에서 절을 하고 비위를 맞추는 대신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곧바로 현명한 왕 만들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오직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반듯해지고, 임금은 간하는 말을 따르면 성스러워집니다. 임금이 성스러워지면 신하들은 명령하지 않아도 잘 받들 것이니 누가 감히 임금님의 아름다운 명령을 공경하거나 따르지 않겠습니까?”

훌륭한 정치를 하려면 임금이 먼저 훌륭하게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훌륭한 신하의 말을 잘 받아들이라는 충고였다. 훌륭한 신하야말로 울퉁불퉁한 나무도 반듯하게 만들 수 있는 먹줄이기 때문이다. 부열의 간언(諫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벼슬자리를 남발하지 말고 인사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총애하는 자에게 틈을 주지 않아야 한다, 자기의 잘못을 숨기려고 거짓말하거나 다른 일을 꾸미지 않아야 한다, 사치를 하지 않아야 한다, 각종 행사를 번거롭게 해서 백성들을 힘들게 하지 않아야 한다 등등 임금의 도리에 대한 간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간언은 임금이나 윗사람에게 올리는 충고나 다름없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계속되면 잔소리로 들리기 마련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아무리 참을성 많은 왕이라도 슬쩍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이게 조금 추켜세워줬더니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기어오르려고 하네. 내가 감히 누군 줄 알고 대들어!’ 이렇게 생각했더라면 고종과 부열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종 역시 평범한 왕은 아니었다. 부열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 다음 이렇게 대답했다.

“아름답구나, 열아! 그대가 말을 잘해주지 않았다면, 내가 실천하는 것에 대해 듣지 못했을 것이다.”

의례적인 말이었을까? 고종의 진심을 확인하기 어려웠던 부열이 다시 한번 간언했다.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행하는 것이 오직 어렵습니다.”

고종이 다시 대답했다.

“그대는 오직 내 뜻에 맞게 가르쳐 달라. 만약 술과 단술을 만든다면 그대가 누룩이 되고, 만약 간을 한 국을 만든다면 그대가 소금과 매실이 되라. 그대가 나를 하나하나 닦아서 나를 버리지 않도록 하라. 나는 오직 그대의 가르침에 매진할 것이다.”

신하 앞에서 이렇게까지 솔직하고 겸손한 왕이 있었을까. 왕의 진심을 확인한 부열은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자신이 모실 수 있는 주군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부열은 지금까지 왕을 강하게 몰아붙이던 태도를 풀고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임금이시여. 사람이 많이 듣고자 하는 것은 오직 일을 잘 이루기 위해서이니 옛 가르침에서 배워야 비로소 얻음이 있을 것입니다. 배워서 옛것을 본받지 않고서도 세상을 길게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은 제가 듣지 못했습니다. 오직 배우는 자세는 마음을 겸손하게 가져야 하는 것이니, 배우는 일에 민첩하면 그 닦여짐이 비로소 다가올 것이고, 진실로 이에 대해 마음을 쓰면 도가 몸에 쌓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열은 왕이 배움에 한결같이 모범을 보이면 자신은 경건한 마음으로 뜻을 받들어 빼어난 인재들을 사방에서 불러들이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고종의 꿈은 현실이 되었고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역사책에 영원히 기록되었다. ‘장자’의 ‘대종사(大宗師)’에는 부열의 죽음에 대해 신화적으로 적고 있다. 부열이 죽은 뒤에 그의 정신이 하늘로 올라가 기성(箕星)과 미성(尾星) 사이에 별자리를 이루었다고 한다. 임금을 보좌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는 그의 열망이 죽어서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부열의 신화를 전해들은 위정자들은 밤하늘에 뜬 별을 보면서 그의 노고를 생각하고 그를 닮기 위해 노력했을까.

기도니 감응이니 하는 이야기는 다분히 신화적이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어서까지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려는 의지는 신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진인사대천명’의 세계가 바로 신화와 현실이 만나는 접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종과 부열의 이야기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전해 내려왔을까. 백성을 위하는 위정자와, 백성을 위해야 한다는 위정자의 본분을 일깨워준 신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백성을 위하기보다는 자신의 권위에 도취하고, 위정자의 본분을 일깨워주기보다는 자리 보전하기 위해 굽신거리는 신하들이 더 많았다. 백성들은 그런 일탈된 위정자 무리들을 보면서 탄식하고 절망하면서 고종과 부열을 떠올렸을 것이다.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정치인은 없을까, 하고 말이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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