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는 ‘세종 컬렉터 스토리’에 평생 모은 3000여점의 미술품 중 120여점을 공개하는 문웅 전 호서대 교수. ⓒphoto 주민욱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11월 10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는 ‘세종 컬렉터 스토리’에 평생 모은 3000여점의 미술품 중 120여점을 공개하는 문웅 전 호서대 교수. ⓒphoto 주민욱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특별한 기획전이 열린다. 컬렉터의 애장품을 소개하는 ‘세종 컬렉터 스토리’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이다. 진짜 미술을 사랑하는 컬렉터의 애장품과 그에 얽힌 스토리를 통해 미술품 컬렉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마련한 전시이다. 올해의 주인공은 문웅(69) 전 호서대 교수이다. ‘저 붉은 색깔이 변하기 전에’라는 제목으로 11월 10일부터 29일까지 열리는 전시에는 문 교수가 평생 모은 3000여점 중 오윤, 홍성담, 오지호, 배동신, 이응노, 박고석, 이대원, 우제길 작가 등의 작품 120여점을 공개한다. 그는 작품 수집을 통해 작가들을 후원하고 자신의 호를 딴 인영미술상을 만들어 17년째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있다.

문 교수에게 들은 50년 컬렉터의 삶은 흥미로웠다. 그는 “돈도 많이 날리고 시행착오와 실패를 수없이 겪으면서 안목을 키웠습니다. 세상에 편하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가치란 잡는 것이 아니고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터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수천만원을 주고 샀는데 가짜인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무명작가 돕자고 산 수십 점의 작품이 엄청나게 값이 뛴 경우도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작가들과의 인연은 어떤 작품보다 값지다”고 말했다.

50년 동안 한 작품도 안 팔아

컬렉션의 양도 놀랍지만 더 대단한 것은 한번 손에 들어온 작품은 절대 팔지 않는다는 철칙을 세우고 50년 동안 어긴 적이 없다는 것이다. 딱 한 번의 예외가 있었다. 그가 생애 처음으로 산 작품이었다. 71학번이니 50년 전의 일이다.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때입니다. 서예 동아리에 들어가 서예를 배우다 보니 표구점에 자주 출입하고 직원과도 친해졌어요. 어느 날 그 직원이 그림을 사라고 권해요. 의재 허백련 화백의 10폭 병풍이었어요. 돈이 되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라 30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작품을 샀죠. 7년 후 의재가 죽고 표구점 직원이 작품을 다시 팔라고 하더니 200만원을 받아줬어요. 얼마 후 거리를 걷다 한 화랑에 그 작품이 걸려 있는 겁니다. 호기심에 물어보니 그새 작품이 300만원으로 뛰어 있었어요. 얼마나 아쉽던지요.” 그는 ‘다시는 내 손에 들어온 작품은 내보내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고 한다. 작품을 사는 기쁨을 알고 컬렉터의 길을 걷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수집한 작품에 얽힌 스토리는 숱하게 많다. 전시 제목은 오랜 친분인 홍성담 작가가 옥중에서 그에게 보낸 엽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민주화운동으로 감옥에 간 홍성담 작가가 교도소 운동장에 있는 나팔꽃 씨를 종이컵에 심어 꽃을 피웠더란다. 그 꽃잎을 압화로 만들어 우편엽서에 붙여 보내면서 ‘저 붉은 색깔이 변하기 전에’ 엽서가 도착하길 바란다는 간절함을 적어 보냈다고 한다. 홍성담의 작품은 유화부터 판화까지 수십 점을 소장하고 있다.

강연균 작가와도 오랜 인연이다. 강연균이 무명작가일 때의 일이다. 선배 집에 놀러 갔는데 강연균의 그림을 방바닥에 좍 펼쳐놨더란다. 백지수표를 건네고 원하는 가격을 적게 하고 작품을 모두 가져왔다. 몇 개월 후 소식을 듣고 연락한 강연균에게 그는 “선생님께 투자한 겁니다. 크게 안 되시면 저는 망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 유명작가가 된 강연균이 “자네 때문에 열심히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하더란다. 우제길 작가가 1980년대 전시를 할 때였다. 전시 전에 미리 화실에 가서 살 작품을 찍어놓고 해외출장을 다녀왔다. 정작 전시에서 작품을 한 점도 못 판 우제길은 “덕분에 전시를 치를 수 있었다”며 엽서 수십 장에 그림을 그려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는 “작가들이 힘들 때 작품을 사주는 것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충동구매는 안 하는 그가 욕심을 낸 적이 있다. 한국 수채화의 선구자인 고 배동신 화백의 작품 중에 희귀한 자화상이 경매에 나왔다. “저 작품은 꼭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응찰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무려 31번이나 응찰을 거듭한 끝에 결국 시작가의 9배를 주고 낙찰을 받았다. 그는 “컬렉터는 점잖게 미친 것입니다. 안 그러면 작품을 모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일이다. 결혼반지를 맞추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보통 결혼반지로 5부 다이아몬드 반지를 해주던 때였다. 집에서 반지값 60만원을 받아 부인을 데리고 금은방이 아니라 화랑으로 갔다. 물어보지도 않고 오지호의 ‘바다’ 작품을 덥석 골라 “당신 것이다”라며 줬다. 싫다는 말도 못 하고 느닷없이 그림을 받아든 부인이 아이 둘을 낳고서야 서운한 마음을 내비쳤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다이아몬드는 250만원으로 올랐는데, 오지호의 ‘바다’ 시리즈는 3000만원이었다.

미래의 가치에 투자한다

이쯤되면 ‘도대체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돈 자랑 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할 것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27살 때 건설회사를 세웠다. 연립주택, 건물을 지어 돈을 꽤 벌었다.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술, 담배는 입에 대본 적이 없고 흔한 골프도 안 쳤다. 유일하게 돈을 쓴 곳이 그림이다. 돈이 많아서만도 아니다. 한때 사업이 부도 위기에 처했다. 작품을 몇 점 팔면 해결이 되겠지만 그는 그림을 지키고 대신 집을 팔았다. “집은 다시 사면 되지만 그림은 다시 찾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좋은 작품을 보면 품에 안고 와야 직성이 풀리고, 자다가도 일어나서 만지고, 누워도 웃음이 나고,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지요.” 그림이 그렇게 좋냐는 질문에 그가 배부른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친구도 자주 보면 알아지는 것처럼 그림을 자꾸 보면 알게 되고,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갖고 싶어진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취미는 그의 인생을 바꿨다. 미술을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에 예술경영학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땄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교수를 거쳐 호서대에서 11년간 강의를 하고 정년퇴임했다. 16~17년 전부터는 ‘문웅다운 수집을 하자’는 생각으로 자신의 호를 딴 인영미술상을 만들었다. 중앙대 졸업반 학생 중 매년 3명의 작품을 사주고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자신의 건물 인영아트센터에서 전시도 해준다. 그는 “가장 뛰어나다는 학생들인데 몇 년 후 작가로 남는 비율이 5퍼센트도 안 된다”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만큼 전업작가로 살기 힘든 것이 우리 미술계의 현실이다.

“그렇게 모은 작품으로 뭘 할 거냐”고 묻는 사람이 많지만 계획이 있어서 모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일생을 목표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멋진 일 아닙니까? 딱히 뭘 할지보다 평생을 바쳐 수집한 작품을 한곳에 모아 놓았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는 돈을 벌려면 부동산, 주식 투자를 했겠지만 미술품에 투자한 덕분에 누구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는 “월급을 쪼개 작은 소품이라도 사보면 그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라면서 플라톤의 말을 전했다. “인생에서 살아볼 만한 가치를 부여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일이다.”

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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