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간조선 로고

상단주메뉴

  •  객사한 로마 최고 황제 트라야누스의 최후
  • facebook네이버 밴드youtubekakao 플러스친구
  • 검색
  1. 문화/생활
[2654호] 2021.04.19

객사한 로마 최고 황제 트라야누스의 최후

가지파샤(터키)= 글·사진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2021-04-22 오전 10:34:34

▲ 원정 중 객사한 트라야누스 황제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트라야누스 성곽 위에서 내려다본 지중해.
사르코파구스(sarcophagus). 고대 유물·유적이나 고고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어디선가 접했을 법한 단어다.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이 단어의 본래 뜻은 ‘육신을 먹는 것(Flesh Eater)’. 이 살벌한 단어가 사각 입체형 돌과 무거운 뚜껑으로 장식된 석관(石棺)을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탄생한 사르코파구스는 로마시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최고급은 대리석 제품이지만 대부분은 석회암으로 만든 사르코파구스를 선호했다. 석회를 통한 화학작용으로, 보관된 시신을 가장 빨리 분해할 수 있는 돌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사르코파구스는 어느 정도 이름이 난 박물관에 가야만 만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조각이 있는지와 함께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표현된 사르코파구스가 전시되는지 여부가 박물관 수준을 결정하는 상수다.
   
   
   로마인들이 사르코파구스를 통해 꿈꾼 것
   
   로마 시민들의 평균수명은 28세였다고 한다. 태어나 대략 한 살 내에 숨지는 영아가 30% 정도였다. 40세를 넘기는 사람은 전체 출생자의 30%에도 못 미쳤다. 기아와 전쟁을 통한 죽음의 공포가 로마의 일상 풍경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음 관련 비즈니스가 흥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시대 부자들은 화장보다 토장을 선호했다. 그냥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르코파구스를 이용한 매장을 선호했다. 파노라마 같은 풍경이 둘러싼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이 사르코파구스가 묻힐 명당이다. 로마의 풍습이지만, 젊을 때 건강한 사람일수록 사르코파구스를 준비하는 데 집착했다.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지만 워낙 무겁기 때문에 지정된 명당 자리에 미리 갖다 놓고 ‘만약의 사태’에 임했다고 한다.
   
   예술의 가치와 효능 중 하나지만 죽음을 초월해 모두의 기억에 새겨질 수 있다. 육신은 사라지지만 예술적 상상력을 동원해 저세상에 간 사람과 만날 수 있다. 차갑고도 밋밋한 석관이 아니라 사망자의 따뜻한 흔적이 예술로 표현된 사르코파구스를 통해 연출된다. 로마에서는 대략 2세기부터 4세기까지 미적 차원의 입체 조각 사르코파구스가 등장한다. 기독교와 관련한 종교적 표현은 대략 4세기 중반 이후부터 나타난다. 당시 크게 두 가지 유형의 장식이 유행했다. 눈에 보이는 앞부분만 장식으로 표현하고 뒤쪽은 생략하는 로마식, 반면 바깥쪽 사방 전부를 조각으로 장식하는 그리스식이다. 사르코파구스에 장식된 조각은 사망자나 유가족의 관심사나 세계관을 반영한다. 생전에 고인의 자랑이기도 했던 전쟁터 무용담, 그리스 신화 속 신들에 대한 찬양과 찬미, 나아가 죽음과 관련한 그리스 신화 속 짧은 스토리 등이 장식으로 등장했다.
   
   
▲ 로마에 있는 트라야누스 전승기념 탑. 맨 위의 동상은 사도 베드로다. photo 셔터스톡

   바쿠스의 삶인가 헤라클레스의 삶인가
   
   백인백색 사르코파구스를 감상해본 필자 나름의 결론으로는 크게 두 가지 주제로 압축할 수 있다고 본다. 첫 번째는 와인의 신 바쿠스(그리스명 디오니소스)를 내세운 조각이다. 와인을 즐기는 바쿠스를 찬미하면서 추종자들과 즐겁게 행진하는 식으로 표현된다. 사랑의 메신저인 큐피드(그리스명 에로스)도 조연으로 등장해 분위기를 북돋는, 환희의 사르코파구스다. 즐거운 인생을 주변 모두와 함께 보냈다는 의미를 담은 ‘집단 속에서의 개인의 인생’에 주목하는 세계관이기도 하다. 현세적 즐거움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쾌락주의 학파 에피쿠로스(Epicurs)의 생각에 준하는 주제로 비친다. 두 번째는 헤라클레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조각이다. 부인과 아들을 죽인 죄로 12개 과업에 처해진 슬픈 영웅의 인생을 조각으로 펼쳐 보여주는 사르코파구스다. 사자·뱀·멧돼지를 죽이면서 서서히 늙어가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고통을 이겨내면서 불굴의 투지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고독과 절제의 삶’이다.
   
   두 유형의 조각은 전혀 다른 듯한 세계관이자 인생관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한다면 종극적으로는 같은 의미로 귀결될 주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키워드는 부활이다. 정신적 차원이 아닌 ‘육신적’ 측면에서의 부활이다. 바쿠스와 헤라클레스는 죽음을 체험한 반신반인(半神半人)들이다. 아버지는 제우스이지만 어머니는 인간이다. 둘 다 제우스의 불륜으로 탄생했다. 따라서 출생 때부터 헤라의 미움과 저주가 따라다닌다. 바쿠스는 출생 직후, 헤라클레스는 12개 과업을 끝낸 뒤에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다. 그러나 아버지 제우스의 도움으로 부활을 통해 불사신이 된다. 모두와 재미있게 보낸 바쿠스 인생, 시련 속에서 책임을 다한 헤라클레스 삶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부활이다. 로마가 애용한 사르코파구스는 그 같은 육신의 부활을 준비하는 보금자리에 해당하는 셈이다. 땅에 묻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르코파구스 안에 보존된 상태에서 부활을 꿈꾸는 것이다.
   
   로마 5현제(Five good Emperors)란 말은 15세기 피렌체 역사가인 마키아벨리를 통해 유명해진, 로마 역사의 기본상식이다. 세계사 시험에도 자주 등장하는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는 5명의 황제가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재위기간은 로마의 최전성기로, 대략 2세기부터 100여년간 구가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의 평화)’ 시기와 겹친다. 부활의 터전으로 활용된 사르코파구스가 로마 부자들의 필수품으로 정착했던 때이기도 하다. 5현제에 관한 필자의 평소 의문이지만, 황제의 서열에 관한 부분이 마음에 걸린다. 5명 가운데 보통 최고 주역으로 등장하는 황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하드리아누스로 모아진다. 대략 20세기까지는 ‘명상록(瞑想錄)’의 저자이자 철학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21세기 들어서는 문학과 예술에 정통한 리버럴 아트(Liberal Arts)의 화신 하드리아누스가 5현제의 중심에 서 있다. 기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두 사람을 너무 강조하는 과정에서 다른 황제가 저평가된다는 점이 불만이다. 너무 빛나기 때문에 바로 옆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라고나 할까? 바로 5현제의 두 번째인 트라야누스다.
   
   
▲ 헤라클레스 일대기가 새겨진 로마시대 석관 사르코파구스.

   최대의 영토 확장을 이룬 트라야누스
   
   주관적 평가지만 필자는 트라야누스야말로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5현제 신화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트라야누스가 없었다면 다른 4명의 황제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트라야누스는 다른 4명의 황제가 없었다 하더라도 로마의 현제로 살아남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다른 4명은 다르다. 트라야누스가 없었다면 독립된 현제로 살아남기 어려운 황제들이었다. 4명의 황제 모두가 현제 트라야누스의 덕을 직접·간접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한강 철교를 예로 들자면, 상판 철로를 지지하는 물속에 뿌리박힌 하부 철교와 같은 역할이 트라야누스의 행적이었다. 하부 철교가 그러하듯 황제 트라야누스의 모습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하드리아누스처럼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모습과는 거리를 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유형으로 나뉜 사르코파구스 조각으로 볼 때 바쿠스가 아닌 헤라클레스 인생으로 일관한 황제가 바로 트라야누스였을지 모르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12개의 과업을 묵묵히 실행하면서 로마의 번영과 안정, 나아가 5현제의 터를 닦은 고독한 행적이 바로 트라야누스의 삶 그 자체였다.
   
   서기 117년 8월 8일 트라야누스는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왜 트라야누스가 로마 5현제의 하부 철교라 부를 수 있는지, 5현제의 주역으로서 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하드리아누스에 버금가는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서기 117년 어느 더운 여름날은 그 같은 의문을 해결해줄 최적의 답일 듯하다. 1904년 전인 8월 8일 아침, 트라야누스는 고대 로마 속주 실리시아(Cilicia)의 작은 도시 셀리누스(Selinūs)에 도착했다. 당시 세계 최고 권력자이자 늠름한 황제로서가 아닌, 병으로 쓰러진 약한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시리아 안티오크(Antioch·현재 터키의 안타키아)에 머물던 중 갑자기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치료를 위해 로마의 병원으로 향하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행선지를 급히 셀리누스로 돌린 것이다. 인구 5000명에 불과하던 지중해 작은 변방 도시가 황제 친위부대와 호위병사들로 메워진다. 트라야누스는 도착하자마자 약 한 번 쓰지도 못하고 저세상으로 간다. 원인은 고혈압으로 인한 뇌경색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정로마 13대 황제의 최후는 바로 지중해 작은 도시에서의 객사(客死)였다.
   
   트라야누스의 통치기간은 무려 19년6개월11일에 달한다. 통치 1년은커녕 황제 등극 21일 만에 저세상에 간 황제들과 비교해 보면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로마 황제는 종신 직업이다. 죽지 않는 한 평생 유지될 수 있다. 로마 역사, 아니 세계사와 한국사를 봐도 알 수 있지만 통치기간이 길수록 말년이 엉망이 되기 십상이다. 지도자 자신의 능력이나 결의도 문제지만 권력누수와 주변의 부정부패로 인해 그렇게 된다. 트라야누스는 20년에 가까운 장기 통치기간에도 불구하고 로마를 빛낸 최고의 황제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로마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다는 점은 최고의 업적 중 하나다. 제정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래 최대 규모의 영토 확장에 성공한 인물이 바로 트라야누스였다. 원래 로마 국경선이던 라인강을 넘어 현재의 다뉴브강 하류와 중동의 이라크, 이란 동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로마 콜로세움에서 시작되는 ‘황제의 포룸(Imperial fora)’ 거리는 이탈리아 관광객들이 찾는 영순위 방문지다. 전부 중요하지만 기념사진을 필요로 하는 곳이 30m 높이의 ‘트라야누스 기둥(Trajan’s Column)’이다. 다키아 전쟁(Dacian Wars), 즉 현재의 루마니아를 상대로 한 트라야누스의 정복 과정을 조각으로 표현한 기둥이다. 영토 확장만이 아니라 경제·정치·문화라는 측면에서의 공적도 남다르다. 다방면에서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통치 7년 만인 서기 105년 상원의원 격인 원로원으로부터 ‘옵티무스(Optimus)’ 황제란 칭호도 받는다. 영어로 최고(The Best)란 의미다. 정치적 차원에서 얻은 명예라 볼 수도 있지만 원로원과의 관계도 좋았다는 것을 증명한 본보기라 볼 수 있다. 로마 정치의 특징이지만 원로원과의 협조 여부가 평화와 번영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양측의 관계가 좋을수록 로마 시민 모두에게도 좋다. 자기 사람을 심어 원로원을 통제·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수평관계를 유지하면서 황제가 리더십을 발휘하는 게 좋은 정치다. 원로원과의 협조라는 측면에서 볼 때 트라야누스는 5현제 가운데 선두에 서 있다.
   
   
▲ 터키 가지파샤에 있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무덤.

   원정 도중 병사한 ‘옵티무스’ 황제
   
   트라야누스의 셀리누스 객사는 영토 확장과 보전에 총력을 기울이던 황제의 마지막 유산에 해당한다. 당시 황제가 시리아 안티오크에 머문 이유는 이스라엘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반란 때문이었다. 자신이 일군 새로운 영토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진압을 위해 전쟁 사령관으로 참전한다. 로마에서 출발해 배로 한 달 가까이 걸리는 시리아 출병을 63세 나이에 단행한 것이다. ‘최고사령관(Commander-in-Chief)’은 미국 대통령이 갖는 직함 중 하나다. 군대를 통솔하는 최고사령관이란 의미로, 로마 황제의 직함인 ‘총사령관(Imperium)’이란 말에서 유래한 단어다. 한국에서는 군을 통제하는 문민 대통령이란 의미로 사용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경우 실천적 의미의 군사 지휘관이란 의미로 통용된다. ‘황제=군대를 직접 지휘하는 총사령관’이란 로마의 전통이 서방 지도자에게 이어진 것이다. 환갑을 넘긴 황제 트라야누스의 시리아 출병은 그 같은 로마의 전통과 의무에 기초한 결과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같은 임무를 실천하던 중 이름도 모를 지중해 작은 마을에서 객사하게 된 것이다. 로마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의 행적을 증명해 보인 ‘롤모델’을 모두에게 보여준 셈이다.
   
   태풍의 중심은 침묵 그 자체라고 한다. 너무도 소박하고 조용해서 간과하기 쉬운 곳이 트라야누스 최후의 현장 셀리누스다. 지명이 터키어인 ‘가지파샤(Gazipaşa)’로 바뀐 탓도 있지만, 필자 역시 지중해 주변의 해적 동굴을 찾던 중 우연히 위대한 황제가 머물던 마지막 현장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서자 언덕 위 큰 성이 눈이 들어온다. 해발 300m 높이에 들어선 성의 정상까지 올라가봤다. 원래 히타이트 제국의 신전으로 사용됐던 공간이었을 듯하다. 로마 당시에는 트라야노폴리스(Traianopolis)란 이름의 도시였다고 한다.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의 영향이지만 로마의 황제나 장군은 점령지 지명을 자신의 이름으로 대신했다. 트라야노폴리스란 이름의 도시도 로마권 내에 3개나 있다. 기록에 따르면 트라야누스는 이곳에서 사망하자마자 시리아 안티오크로 다시 옮겨졌다고 한다. 화장을 한 뒤 재를 로마로 갖고 가서 거기서 장례를 치렀다. 셀리누스의 황제 시신 보관소는, 나중에 만들어진 추모 사원 정도라 보는 것이 정확할 듯 하다.
   
   황제를 추모하는 사원이 지중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성 위 언덕에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의외로 성 아래 서쪽에 단출하게 남은 건물이 추모 사원이다. 실제 급사하기 전까지 이곳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워낙 병세가 위중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언덕 위까지 모시고 갈 시간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추모 사원은 아치형으로 된 165㎡(50평) 정도 크기의 공간이다. 원래 2층이었지만 아랫부분만 남은 채 전부 허물어진 상태다. 입구가 서쪽의 로마를 향하고 있다. 보리밭 한가운데 들어선, 문화유적이란 생각이 전혀 안 드는 사원이다. 낙서와 오물로 채워진 폐가 같은 공간이 쓸쓸함만 안긴다. 상징적이었겠지만, 트라야누스의 시신을 담은 사르코파구스나 조각이 사원 내부 어딘가에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로마 황제 대부분이 그러하듯 트라야누스도 사후 신격화됐다. 사후 생로병사 문제를 해결해줄 신으로서 방문객들을 맞이했을 듯하다. 그러나 사후 1900여년이 흐른 지금, 어제의 영광과 기도 소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아우구스투스보다 더 큰 행운이, 트라야누스보다 더 잘할 수 있도록(Felicior Augusto, Melior Traiano).” 트라야누스가 세상을 떠난 후 원로원이 신임 황제에게 올린 축복 의식 속의 한 구절이다. 63세의 나이로 시리아까지 가서 로마군 총사령관으로 일하던 중 객사한 트라야누스. 과연 그를 능가할, 더 잘하는 황제가 로마에 있었는지 의문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FT 새로운 가능성과 규제 샌드박스
신협 어부바 콘텐츠 공모전
마감을 하며
검은 호랑이의 해 정장열 편집장

격화되는 대선전에 오미크론 사태까지 더해져 연말이 어수선합니다. 한 해를 정리할 때면 지나온 날을 되돌아보지만 다가...

주간조선 대학생 기사 공모
주간조선 칼럼마당
기업소식
네이버 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