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말 제주도에 폭설이 내려 8만명이 사흘 동안 갇혔다. 이들은 8만가지 사연으로 발을 동동 굴렀고 분통을 터뜨렸다. 하늘에다 대고 하소연할 수 없으니 공항과 항공사에 화풀이를 했다. 누구라도 그런 마음이 생겼으리라. 그 8만명 중에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하는 가까운 친구도 있었다.

미국 동부나 중부에서는 폭설로 인한 공항 마비가 거의 매년 연례행사처럼 반복된다. 그때마다 그들은 그런 천재지변에 면역이 되어 그런지 담담해 보인다. 한국에서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보니 공항이나 항공사나 당황했고 허둥지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이 사태를 지켜보면서 처음부터 엉뚱한 생각을 했다.

한국인들은 육지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제주도 공항 마비사태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 갇힌 사람들의 육지 일정이 헝클어지는 게 어느 정도는 양해가 되었을 것이다. 육지의 어느 대기업 사장도 제주공항 로비에 골판지 상자를 깔고 잠을 청하는 출장간 직원들에게 뭐라 다그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사히 육지로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하기만을 고대했을 것이다.

8만명은 제주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강제로 주어졌다. 알리바이도 완벽하다. 천재지변인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출근길의 다다다 총총걸음도, 회의시간을 알리는 부저도…. 나는 제주도에 갇힌 친구에게 이런 카톡을 보냈다. 그는 대학 시절 독문학을 전공했다. ‘소설을 써도 되겠네. 그런 특별한 경험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야.’

8만명 중에 작가가 포함되어 있다면 틀림없이 언젠가는 사흘의 고립 경험이 시(詩)로, 소설로, 희곡으로, 드라마로 승화되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8만명은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이때의 경험을 ‘짜릿한 화젯거리’로 두고두고 곶감 빼먹듯 할 것이다.

내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한 데는 시인 문정희의 ‘책임’이 크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의 불온한 발상은 모두 ‘한계령을 위한 연가’에서 비롯되었다.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

봄바람이 치맛자락에 살랑살랑해지면 폭설에 갇혔던 사람들은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폭설로 제주도에 갇혀본 게 일생일대에서 가장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그 사흘의 지연과 순연(順延)이 실은 인생에서 다시 찾아오기 힘든 무위(無爲)의 자유였다고. 일상의 모든 속박과 구속의 톱니바퀴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된 환희였다고.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경험을 쓸모없게 만드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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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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