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던 칠월 첫날, 토요일 아침이었다. 한 뼘쯤 열어놓은 창문 틈 사이로 새어들어온 ‘소음’에 잠을 깼다. 소음은 아파트 옆 중학교 운동장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숲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볼륨감이 압도적이었다. 황소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나팔을 불어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지난해 이맘때쯤 산동네에서 처음 맞은 여름철에는 이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는데. 맹꽁이였다.

맹꽁이들은 하루종일 경연하듯 소리를 질러댔다. 밤에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꼭, 남아공월드컵 때 들었던 부부젤라 소리 같았다. 일요일에도 맹꽁이들은 멈추지 않고 맹렬히, 정말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도시에 살면서 오랫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그리운 소음이었다.

보이진 않지만 소리로 분명 존재하는 맹꽁이들. 일요일 해질녘, 소리가 울려나오는 숲속을 바라다보았다. 이 반가운 소음을 다시 듣게 되다니! 어딘가에 있을 숲속 서식지를 생각하다가 스마트폰을 가져와 녹음했다. 그리고 짧은 메모와 함께 페이스북에 올렸다.

올해 가뭄은 정말 끔찍했다. 간신히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농작물들은 단맛은커녕 쓰고 떫었다. 앞산을 오르며 걸음걸음 풀풀 날리는 황톳가루를 뒤집어써야 했다. 돈황의 사막을 걷는 것도 아닌데. 흙길에서 발자국을 타고 올라오는 비릿한 냄새가 역겨웠다. 송장 냄새 같기도 했다. 산은 그렇게 타들어갔다. 윤기를 잃고 축축 늘어져가는 잎사귀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만 했을 뿐이다. 산길을 오르내리면서도 야트막한 산에 맹꽁이가 서식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맹꽁이가 울면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맹꽁이 노래는 가뭄의 끝을 알리는 축가(祝歌)다. 맹꽁이는 앞발이 짧아 행동이 굼뜨다. 그래서 행동이 느려터진 사람을 가리켜 맹꽁이 같다고 한다. 맹꽁이는 개구리와 같은 양서류이지만 앞발에 물갈퀴가 없어 물속에서 살지 못한다. 일 년 중 대부분을 흙속에 숨어 있다가 장마철에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만일 장맛비가 끝내 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시나브로, 어둠에 잠겨가는 산을 보면서 생각했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 맹꽁이가 비를 고대하며 기다리고 기다렸을 인고(忍苦)의 시간을, 메마른 흙 속에서 감긴 눈꺼풀로 맹꽁이가 꾸었을 황홀한 꿈을, 살가죽이 타들어가면서도 장맛비를 그리며 상상했을 은밀한 행복을. 살짝만 비틀어도 물기가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은 찐득한 공기는 설렘이며 청춘의 울렁거림이고,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은 축제의 서곡이다.

대지가 장맛비에 흥건해지면 맹꽁이의 꿈은 대지를 뚫고 찬란하게 솟아오른다. 짝짓기와 산란! 모든 동물의 생애는, 결국 짝짓기와 산란으로 수렴된다. 어둠 속에서 비탈길을 짝을 찾아 어기적어기적 기어가고 있을 맹꽁이들. 장대비 내리는 이 밤 숲속 맹꽁이들은 짝짓기의 황홀감을 누릴 것이다. 누가 맹꽁이들이 부르는 생명의 찬가를 운다고 말했나. 열락(悅樂)의 시어(詩語)를 가리켜 어찌 시끄럽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나올 때를 기다리고 기다려 기어코 나오고야마는 맹꽁이. 장마가 그치고 땡볕이 내리쬐면 이제 매미가 맹꽁이의 바통을 이어받아 우주를 향해 장엄한 메시지를 발신할 것이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미물(微物)조차 우주의 섭리에 따라 때를 기다려 자신을 드러낸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 군상만이 나서야 할 때를 모르고 나타나 불쾌한 소음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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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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