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에서 ‘영국 국립미술관 테이트명작전-누드’가 전시 중이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이 전시회에서 관람객들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로댕의 ‘Kiss’가 아닐까. 관람객들은 ‘키스’를 에워싼 채 함묵(緘默) 속에 작품을 감상한다. 로댕의 ‘키스’가 한국에 전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로댕의 ‘키스’를 파리 로댕미술관에서 감상했다.

인간은 언제부터 키스를 하게 되었을까?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불을 찾아서’를 보면 그 시점을 추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나온다. 성행위의 체위 변화! 선사시대 인류는 오랜 기간 후배위(後背位)로만 섹스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상위(正上位)로 진화되었고, 그러면서 남녀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예술가 중 가장 먼저 키스를 오브제로 삼은 사람은 누구일까? 이 질문은 마치 최초의 화가가 누구냐는 것처럼 난해하다. 하지만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꾸면 답이 금방 나온다.

‘키스’라는 제목의 예술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클림트의 ‘키스’, 로댕의 ‘키스’, 브랑쿠시의 ‘키스’ 순이다. 이를 제작연도 순으로 나열하면 로댕의 ‘키스’(1901~1904), 브랑쿠시의 ‘키스’(1907~1908), 클림트의 ‘키스’(1909~1910)가 되겠다.

파리지앵인 오귀스트 로댕(1840~1918)과 루마니아 출신인 콘스탄틴 브랑쿠시(1876~1957)는 파리에서 활동하다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오스트리아 빈 태생인 구스타브 클림트(1862~1918)는 빈에서 나서 빈에서 죽었다. 세 사람은 서로 얽히고설킨 인연이 있다. 세 사람은 여성에게서 창작의 열정과 영감을 공급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루마니아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브랑쿠시는 조각을 배우려 1903년 스물일곱에 파리로 왔다. 브랑쿠시는 최고의 조각가로 명성을 날리던 로댕의 작업실에 문하생으로 들어갔지만 2개월 만에 나온다. 이후 브랑쿠시는 추상 조각의 세계로 뛰어들어 로댕과는 다른 조각 세계를 구축한다. 그는 몽파르나스에서 모딜리아니·피카소·마르셀 뒤상 등과 어울렸는데, 특히 모딜리아니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다. 브랑쿠시는 술과 마약에 절어 방황하던 모딜리아니에게 조각을 권했다. 모딜리아니는 돌을 쪼면서 비로소 자신이 갈구하던 회화 세계에 눈을 뜬다.

클림트는 1902년 빈을 방문한 로댕과 만났다. 로댕과 클림트의 여성 편력은 화려함을 넘어 세기적이다. 유부남이었던 로댕은 주로 나이 어린 예술가들과 사랑을 나눴고, 독신인 클림트는 귀족부인부터 창녀까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쾌락에 탐닉했다. 로댕의 연인들은 주로 로댕을 숭배하는 나이 어린 예술가들.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과 영국 화가 그웬 존이 그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번 소마미술관 전시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웬 존과 로댕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로댕은 ‘키스’를 단테의 ‘신곡’에서 소재를 가져왔다. 관람객들은 로댕의 ‘키스’에서 황홀한 육체의 떨림에 몰입한다. 클림트의 ‘키스’에는 키스를 받는 여인의 발그레한 홍조(紅潮)가 강조된다. 클림트의 영원한 뮤즈였던 에밀리 플뢰게가 모델이라는 게 정설이다. 클림트는 인생에서 쾌락만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믿었던 화가였고 쉰여섯 생애를 통해 그것을 실천했다.

로댕 하면 ‘생각하는 사람’만을 떠올리는 한국인에게 ‘키스’는 로댕의 광대(廣大)한 조각 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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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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