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길 정동교회 앞, 광화문 미대사관 옆, 금화터널 아래, 잠수대교 남단, 상암중학교 정문 앞….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서울의 이 장소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곳에는 라운드어바웃(round-about), 회전교차로가 설치되어 있다. 회전교차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양상이다.

지난 10월 13일 금요일 밤.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 4차전이 경남 창원야구장에서 열렸다. TV 중계 화면에 홈플레이트 뒤편의 현수막이 잡혔다. ‘회전교차로는 회전차량이 우선’.

창원시는 천만 야구팬이 주목하는 경기장에 왜 이런 현수막을 게시했을까. 이 문구는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일부 운전자가 회전차량에 우선권을 주지 않아 종종 문제가 발생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 말은 창원을 비롯한 경남에 회전교차로가 많이 설치되어 있다는 뜻도 된다. 어디 경남뿐일까? 충남의 군 단위만 가도 곳곳에서 회전교차로와 만난다. 제주도에 가면 도처에 회전교차로가 있다.

내가 회전교차로와 처음 만난 것은 10여년 전 호주에서였다. 호주 교민이 모는 자동차 안에서 먼저 진입한 차량에 우선권을 주는 운전자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뒤로 영국에서 많은 회전교차로를 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회전교차로가 영국을 비롯한 호주, 뉴질랜드 같은 나라에서만 정착된 교통체계인 줄로 알았다. 2016년 3월, 런던 ‘팔리아멘트 스퀘어’는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 광장에 간디 동상이 세워져서다. 비폭력투쟁의 상징인 마하트마 간디 동상을 영국 정부가 ‘팔리아멘트 스퀘어’에 세웠다는 사실. 이 광장에는 윈스턴 처칠의 동상도 있다.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구부정한 모습의 처칠이다. 그런데 이곳이 사실은 영국에서 가장 큰 회전교차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파리의 개선문 주변도 회전교차로이다. 개선문 주변은 파리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은 곳이다. 차량들은 거대한 회전교차로를 돌며 차례대로 방사형(放射形)의 12개 대로로 빠져나간다. 신호등 하나 없는데도 차량들은 우측 차 우선의 원칙을 지킴으로써 소통이 유지된다. 개선문에 올라가려는 사람들은 지하도를 통해 개선문에 접근한다. 베를린의 명소 중 하나인 전승기념탑(지게스조일레)도 회전교차로이다.

회전교차로는 어느 나라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을까. 1768년 영국에서 라운드어바웃의 원조가 태어났다. 1907년, 현재와 같은 회전교차로가 영국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회전교차로에는 실용주의와 배려정신이 함축되어 있다.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에서는 교통의 흐름이 잠깐씩 끊어진다. 회전교차로는 신호등이 없다. 신호등이 없으니 전기가 들 일도 없다. 복잡한 규칙도 없다. 단지 진행 방향만 화살표로 정해주면 된다. 차량들은 어느 때든 진입한 순서대로 오른쪽으로 회전교차로를 돌다 원하는 길로 빠져나가면 된다. 속도는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흐름은 계속 이어진다. 적어도 회전교차로에서는 사고가 나지 않는다. 누구나 속도를 줄이기 때문에 신호가 바뀔까봐 전속력 질주하다 벌어지는 사고가 없다. 회전교차로는 타인(他人)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누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의 책임하에 질서에 따르는 시스템이다.

우리나라에 회전교차로가 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회전교차로는 먼저 온 사람(first come)의 우선권을 인정해주는 게 핵심이다. 타인의 우선권을 존중해주는 문화. 우리가 정신문명에서도 선진국이 되려면 반드시 습득해야 할 가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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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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