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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이나 인사이드] 천안문 30주년, 고발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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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0호] 2019.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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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인사이드]천안문 30주년, 고발은 끝나지 않았다

박승준  아시아 리스크 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sjpark7749@gamil.com

“천안문사태 30주년, 중국 인민해방군 내부자가 ‘사태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민해방군 소속 전직 기자였던 이 내부자는 그날 베이징에서 있었던 유혈진압을 정치적인 금기로 삼아서는 안 되며 중국 사회 전체가 이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천안문(天安門)사태’ 30주년을 일주일 앞둔 지난 5월 28일 이런 제목의 베이징발 기사를 실었다. 1989년 6월 3일 밤부터 4일 새벽까지 베이징(北京)시 중심부 천안문광장에서 벌어진 중국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를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과 중국 인민해방군이 유혈진압한 사건을 잊지 말자는 내부자의 경고를 담은 기사다. 이 기사의 인터넷 중국어판 제목은 ‘30 Years After Tiananmen, a Chinese Military Insider Warns: Never Forget’이라는 영어판 제목보다 더 끔찍하다. ‘영원히 잊지 못할 6·4사태 30주년: 전 군관의 천안문 도살(屠殺) 회고(永志不忘:六四30年,前軍官回忆天安门屠杀)’.
   
   뉴욕타임스는 자신들이 발굴한 ‘장린(Jiang Lin·江林)’이라는 이름의 내부자가 30년 전 천안문사태 당시 36세의 해방군 소속 기자로 계급은 중령이었다고 밝혔다. 지금은 66세 초로의 예비역 군인인 장린은 그해 6월 3일 밤 12시 가까운 시각에 천안문광장으로 달려갔다. 사복 차림을 한 채 자전거를 타고 계엄령이 내려진 천안문광장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취재하던 중 무장경찰이 휘두른 방망이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장린은 시위 군중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은 건졌으나 머리에는 지금도 당시의 상처가 흉터로 남아 있다고 뉴욕타임스에 증언했다. 뉴욕타임스는 장린이 “당시 인민해방군 일부 지도부는 민주적 시위를 하는 시민들을 상대로 무력진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으나 덩샤오핑(鄧小平·당시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이끄는 당과 군의 최고 지휘부는 해방군 내부의 그런 견해를 묵살했다”고 증언했다.
   
   인민해방군 내부자 장린의 이야기를 전하는 뉴욕타임스 기사 중 ‘crush student protest in Tiananmen Square’라는 푸른 글씨를 클릭하면 30년 전 6월 4일 당시 뉴욕타임스 베이징 특파원이었던 니컬러스 크리스토프 기자가 쓴 ‘CRACKDOWN IN BEIJING; TROOPS ATTACK AND CRUSH BEIJING PROTEST; THOUSANDS FIGHT BACK, SCORES ARE KILLED(베이징의 진압; 군대가 베이징 시위를 진압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진압에 저항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기사가 뜬다.
   
▲ 1989년 5월 27일 천안문광장에서 민주화 시위를 이끌고 있는 대학생 지도자 왕단. photo 뉴시스

   “수만 명의 중국 군대가 오늘 아침 이른 시간에 수도 중심부의 광장을 민주적 시위자들로부터 되찾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수의 학생과 시민들이 죽었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시위 군중들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다. 군대는 천안문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베이징의 주요 도로를 따라 광장으로 진입했고, 길을 비켜주지 않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하거나 공중으로 총을 발사했다.”
   
   니컬러스 크리스토프 특파원은 6월 3일 자정쯤 광장에서 시작된 총성을 듣고 광장에서 서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있던 뉴욕타임스 베이징지국 사무실에서 자전거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용감한 취재정신으로 다음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물론 혼자 달려간 것은 아니고 몇 명의 중국인들에게 카메라를 쥐여줘서 현장 사진을 찍게 했다.
   
   당시 천안문광장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후야오방(胡耀邦) 전 당 총서기가 그해 4월 8일 정치국 회의 도중 심장병 발작으로 쓰러져 4월 15일 사망한 직후부터였다. 후야오방은 1986년 말 중국 대륙 전역에서 벌어진 대학생 시위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1987년 1월 당내 원로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다 실각했었다. 광장의 시위대는 처음에는 후야오방 당 총서기 추도를 내걸었지만 구호는 점차 반(反)부패와 민주화 요구로 바뀌어갔다. 처음 시위를 주도한 것은 베이징대학을 비롯한 베이징 시내 대학 재학생들이었지만, 시위에는 일반 시민과 대학교수를 비롯한 지식인과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와 관영 신화통신 기자들도 포함돼 있었다. 시위 군중의 수는 100만명 가까이로 불어났다.
   
   당시는 한·중 간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기 전이었다. 홍콩에 특파원으로 주재하던 필자를 포함한 한국 기자들은 마침 5월 16일로 예정돼 있던 덩샤오핑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간의 ‘30년 만의 중·소 화해’를 취재하러 베이징에 갔다가 천안문광장의 시위를 목격하게 됐다. 당시 필자를 포함한 한국 언론사 홍콩특파원 대부분은 취재 목적이 아니라 홍콩 기업의 컨설턴트 자격으로 비자를 받아 취재를 하던 상태였다. 비자 만료일인 5월 30일, 천안문광장 시위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지만 홍콩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홍콩으로 나온 직후 비자를 다시 신청해 인민해방군의 유혈진압이 있은 5일 후인 6월 9일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취재를 계속했다.
   
   뉴욕타임스 베이징특파원 크리스토프 기자의 6월 4일자 기사는 천안문사태 유혈진압 사망자 수와 관련해 이렇게 보도했다. “베이징 시내 3개 병원에 68구의 시민들 시신이 들어왔고, 다른 4개 병원에도 다수의 시민들 시신이 들어왔으나 그 숫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적어도 50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대부분은 총상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일부 사망자들은 해방군의 장갑차들이 시민들이 설치해놓은 바리케이드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장갑차에 깔려 죽기도 했다고 한다.”
   
▲ 1989년 6월 5일 시위대가 인민해방군에 진압된 이후 탱크들이 진주해 있는 천안문광장. photo 뉴시스

   크리스토프 기자는 퓰리처상을 수상할 자격이 있는 냉정한 기자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베이징발 서양 통신사 기사들은 1500명이 넘는 시민, 대학생들이 사망했다고 전하기도 했으나 크리스토프 기자는 ‘냉정’을 유지했다. 사태가 한참 지난 후 발표된 중국 국무원 대변인의 발표도 “시민과 군인들 합해서 수백 명 정도의 사망자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천안문사태는 덩샤오핑이 이끄는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1978년 12월에 시작한 개혁개방 정책이 10년쯤 지나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덩샤오핑이 이끄는 ‘빠른 속도의 개혁개방’을 주장하는 이른바 ‘개혁파’와, ‘사회주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는 천천한 속도의 개혁개방’을 주장하는 천윈(陳雲)의 ‘보수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개혁파와 보수파 지도부들은 시위 때문에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장안대로를 통과하지 못하고 뒷길로 돌아간 점, 시위대들이 덩샤오핑의 이름과 발음은 같고 글자는 다른 샤오핑(小甁)을 낚싯줄에 매달아 광장에서 끌고 다닌 점, 천안문 바로 앞에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본떠 만든 ‘민주 여신상’을 세운 점 등에 격분해서 시위를 강경진압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나중에 알려졌다.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지도부와 천윈을 중심으로 한 개혁보수파 지도부들은 천안문사태를 진압한 후 사태의 흔적을 지워나갔고 시위의 기본 성격도 ‘부르주아 리버럴리즘’을 추종하는 일부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벌인 ‘폭란(暴亂)’ 또는 ‘동란(動亂)’으로 규정했다. 이들 지도부는 아예 사태의 기억을 중국인의 머릿속에서 지우는 작업을 벌였다. 이와 함께 경제발전에 집중해서 중국 인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자전거 이론’ 방식을 적용했다.
   
   실제 지난 30년간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빠른 경제발전에 집중함으로써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민주화에 관심을 두지 않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자신들이 구상했던 장기적인 정국타개 방안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천안문사태는 중국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실제 지워지거나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뜻에 맞는 방향으로 성격 규정이 이뤄졌다. 다음은 현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1989년의 정치 풍파’라는 제목으로 정리한 천안문사태에 대한 공식 입장이다.
   
   “1980년대 말 우리 사회에는 자산계급 자유화 사조가 유행했다. 자유화 분자들은 부르주아들의 민주와 자유 개념을 선전하고 반당(反黨), 반(反)사회주의적 활동을 진행했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 전 당 총서기 서거를 계기로 청년학생들과 많은 군중들은 추도 활동을 했는데, 극소수의 자유화 분자들이 추도 활동을 구실로 반당, 반사회주의적 활동을 벌였다. 이들의 선동으로 수도와 지방의 각 대학 학생들은 시위 활동을 벌였고, 시안(西安)과 창사(長沙) 등 지방의 불법분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부수고, 불태우고, 약탈을 자행하는 동란 사태를 벌였다. 이에 인민일보는 ‘동란에 반대하는 기치를 선명하게 들자’는 사설을 발표해서 당의 영도와 사회주의 제도에 반대하는 동란을 제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사태 당시 인민일보의 사설을 정당성의 근거로 내세운 중국공산당 원로들은 6월 3일 밤 10시쯤부터 100만명이 시위 중인 천안문광장 좌우 장안가 도로 동서쪽에 2개 군단을 투입했다. 그리곤 다음날 새벽 4시 이전에 광장 중심부 인민영웅기념비 주위에 시위본부를 설치해두고 있던 학생 지도부를 ‘청소’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천안문사태’라는 단어는 중국 지식인은 물론 일반 인민들 사이에서도 청소된 듯 금기어가 됐다. 그동안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대학생을 포함한 청년들이 할 일은 오로지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부도 축적하는 길을 걷는 것이 최선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려고 노력했다.
   
   천안문사태에 대한 공식 평반(平反·재평가)은 아직까지 중국 내부에서 제기되지 않고 있지만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언론들은 해마다 6월 4일이 되면 천안문사태를 기사로 다시 불러오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당 총서기를 비롯한 현재의 중국공산당 지도부 역시 당시 사태에 대한 재평가 언급이 전혀 없다. 시진핑 당 총서기는 1989년 천안문사태 당시 36세로, 중국 남부 푸젠(福建)성 닝더(寧德)지방 당 서기여서 사태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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