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일본 군국주의가 패망한 지 74년, 한국전쟁이 휴전한 지 66년이 되는 해다.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주축이 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10월 1일) 이런 때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뜬금없이 1898년에 출생해 1958년에 사망한 김원봉이라는 인물을 “약산 김원봉 선생”이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 그 바람에 우리 사회에서 뜻밖에 격렬한 좌우 대립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문 대통령의 추념사 가운데 김원봉에 대한 표현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지난 3월 충칭에서 우리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청사복원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광복군을 앞세워 일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습니다. 그 힘으로 1943년, 영국군과 함께 인도-버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고, 1945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았습니다. 김구 선생은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이뤄지기 전에 일제가 항복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 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지난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는 뜻깊은 날 미국 의회에서는,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건국의 시초로 공식 인정하는 초당적 결의안을 제출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한국 민주주의의 성공과 번영의 토대가 되었으며 외교, 경제, 안보에서 한·미 동맹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앞뒤 맥락을 잘 짚어보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한 주체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아니라 한국광복군이었고, 조선의용대를 흡수한 광복군의 역량이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었으며, 나아가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됐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추념사는 광복군의 다른 주체세력과 인물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됨으로써 민족의 독립 역량이 결집됐다”고 표현함으로써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이 결집한 민족 독립운동의 역량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적시해버린 셈이 됐다. 이에 따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가장 중요한 힘을 구성한 광복군의 역량이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었으며,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됐다는 결론을 내는 난센스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전범 가운데 김일성, 박헌영과 함께 가장 중요한 3인 중 한 명인 김원봉에 대해, 그것도 한국전쟁 때 희생당한 국군 용사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 현충원에서 대통령이 존경을 표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크게 훼손돼버렸다.

김원봉은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도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중국 최대의 관영 검색엔진 바이두(百度)는 중국공산당의 역사 평가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김원봉의 일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용군을 이끌던 김원봉(가운데).
조선의용군을 이끌던 김원봉(가운데).

‘김원봉(金元鳳), 일명 김약산, 한국 독립운동가, 의열단 단장, 조선의용대 총대장, 한국광복군 소장·부총사령관, 조선민족혁명당 부당수 겸 총서기, 인민공화당 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 후 초대 감찰상, 조선전쟁 폭발 후 검열상, 전쟁 후 1954년 노동상, 1956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당선, 1957년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1958년 11월 남조선노동당과 연안파(延安派) 숙청 때 피살. 학력 진링(金陵)대학 졸업, 신앙은 공산주의, 애국주의, 민족주의….’

김원봉에 대한 중국공산당 평가의 결론은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김원봉은 1898년 8월에 출생해 어릴 때는 고향 밀양에서 한문과 전통 유가 교육을 받았다. 12세 때 밀양 동화(同和)학당이란 곳에서 교장 전홍표(全鴻杓)로부터 배일(排日)사상을 배운 후 16세 때 분을 이기지 못하고 서울로 상경해서 애국지사가 설립한 중앙고보에 입학해 무예 연마단을 조직했다. 이후 항일 역량을 기르기 위해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항일 의사(義士)들과 만나 거사를 일으킬 방안을 논의했다고 중국공산당은 기록했다.

김원봉은 그러나 일본의 무력이 강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18세 때인 1916년 중국 톈진(天津)으로 건너가 덕화(德華)학당이란 곳에서 독일어를 배워 독일의 선진 군사학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917년 당시 중화민국 정부가 1차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단교하는 바람에 독일어 공부를 중단했다. 독일로 유학해서 군사학을 공부하려던 계획이 좌절되자 김원봉은 1918년 20세 때 중국 남부 난징(南京)으로 가서 진링대학에 입학해 서양 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진링대학은 기독교 침례회가 설립한 대학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시각으로는 “독일을 비롯한 서양을 공부해서 일본을 극복한다”는 김원봉의 점진적인 독립운동 방식이 무력을 통한 조선 국권회복(武力復國)으로 바뀐 것은 1919년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이 계기가 됐다. 1919년 21세의 김원봉은 난징을 떠나 현재 중국의 동북지방 지린(吉林)시로 가서 단순한 무장투쟁으로는 국권회복의 희망이 멀기만 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한다.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은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과 김원봉이다. 일본이라는 ‘강도’를 쫓아내려면 폭력혁명적 수단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며 특무를 동원해서 조선 혁명의 적들을 소멸하고 민중이 기초가 되는 이상국가를 만드는 것이 의열단의 목표였다. 의열단의 당장의 목표는 일본 식민통치를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조선이 독립국가가 되고 나면 조선의 공인(工人) 계급과 농민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강령으로 세워두고 있었다. 의열단의 주요 투쟁 수단은 홍색 공포였으며, 조선 각지의 경찰서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 신문사, 일본 행정기관 등을 파괴한다는 ‘5파괴’와, 조선 총독과 총독부 고관들, 일본군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와 앞잡이들, 민족을 배반한 토호(土豪) 등 일곱 부류를 죽여 없앤다는 ‘7가살(可殺)’이라는 규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김원봉은 1927년 8월과 12월에 중국공산당이 최초로 일으킨 무장폭동인 난창(南昌)폭동과 광저우(廣州)폭동에 ‘아리랑’의 주인공이었던 김산(金山)을 비롯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참여했다가 100여명의 조선인 동지를 죽게 만드는 희생을 겪은 뒤 의열단의 분열이라는 흐름과 부딪히게 된다. 중국공산당이 무력을 동원해서 국민당 세력과 싸우기 시작한 난창폭동과 광저우폭동을 겪으면서 의열단은 공산주의자로 자임하는 그룹과 무정부주의자로 전향하는 그룹으로 나뉘게 된다. 이때 김원봉은 공산주의 좌익사상을 견지했다. 반면 김산은 무정부주의를 지향했다. 김원봉은 1930년에는 당시 베이핑(北平)으로 불리던 현재의 베이징(北京)에서 조선 독립의 방향을 공산주의 국가 건설로 잡고, 레닌주의 학습을 위한 정치학교 설립과 간행물 ‘레닌’을 출판하는 등 본격적인 공산주의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 중국공산당의 평가다.

이후 김원봉은 1931년 일본이 9·18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다시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가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광복동지회 등 조선인들의 항일 조직을 묶어서 ‘한국 대일(對日) 통일전선 동맹’과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다. 1932년 3월부터는 ‘천궈빈(陳國斌)’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흐름과는 별도로 조선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는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중국공산당의 평가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김원봉의 사상적 흐름과 행적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평가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이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한국광복군이 조선 민족의 독립 역량을 결집했다고 평가한 것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원봉은 1948년 11월 김구 선생과 함께 평양에 가서 연석회의를 하기 무려 21년 전인 1927년에 중국공산당이 난창과 광저우에서 일으킨 무장폭동에 가담한 이후 의열단이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의 두 개의 흐름으로 갈라질 때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견지했다고 정리돼 있다. 김구 선생과 평양으로 갈 때 김원봉의 생각은 이미 다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1950년 김일성과 함께 일으킨 6·25전쟁은 이미 30세가 되기 전에 품게 된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무산계급의 이익을 위한 새로운 조선 건설’에 따른 것이었다는 사실을 중국공산당의 김원봉에 대한 공식 기록은 증언하고 있다.

1921년 창당해서 올해 7월 1일로 창당 98주년을 맞는 중국공산당은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중요한 고비에서 회의를 열어 당의 입장을 정리하는 관행을 갖고 있다. 입장을 정리한 다음에는 특정 역사 문제에 대한 ‘결의’라는 형식으로 당내의 역사 문제에 대한 통일적인 견해를 발표하는 전통도 갖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뜬금없이 김원봉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다시 내리려는 시도를 했다면 문 대통령의 시도는 무모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많은 역사학자들과 역사연구학회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의 연구와 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나서서 특정 역사 문제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다면 중국공산당으로부터도 웃음을 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통령이 공식 연설을 통해 분위기를 띄운 ‘김원봉 서훈’에 대해 청와대가 금방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발표를 하고, 국방부는 국방부대로 “조선의용대 결성과 광복군 참여를 군의 역사 기록에 편입시킬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히는 것도 중국공산당의 시각으로 보면 웃음거리가 될 만한 일이다.

박승준 아시아 리스크 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