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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7호] 2020.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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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인생극장]‘공정사회’에서 활보하는 ‘일그러진 영웅들’

함영준  마음건강 길 대표 jmedia21@naver.com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월 21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2차 국정원·검찰·경찰 개혁 전략회의에서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월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1회 청년의 날 기념식에서 ‘공정(公正)’이란 단어를 37회 언급했다. 요즘 전성기를 구가하는 방탄소년단(BTS)을 ‘청년대표’로 참석시키고 문 대통령이 한 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기성세대는 오랫동안 특권과 반칙이 만연한 사회에 살았다. 기득권은 부와 명예를 대물림하고, 정경유착은 반칙과 특권을 당연하게 여겼다. 기성세대가 불공정에 익숙해져 있을 때, 문제를 제기하고 우리 사회의 공정을 찾아나선 것은 언제나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공정하다는 청년들의 분노를 듣는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 같은 불공정의 사례들을 본다. 공정이 우리 사회의 문화로 정착될 때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며, 시행착오나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공정의 길로 가겠다. 공정은 촛불혁명의 정신이다.”
   
   그는 요즘 ‘불공정(不公正)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추미애 법무부 장관에 대해서는 끝내 일언반구도 없었다. 지난 9월 21일 권력기관장회의 때는 아예 추 장관과 동시 입장을 했다. 일국의 법무장관(Minister of Justice)이 아들의 군 시절 ‘휴가 특혜 및 민원’ 문제로 수개월씩이나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실 대통령의 이런 모습은 한두 번이 아니다. 작년 이맘때 조국 전 법무장관 때도 그랬다. 그가 자녀 무시험 입학, 장학금, 허위 인턴증명서, 대리시험, 대학 표창장 위조, 사모펀드, 웅동학원 문제 등 온갖 비리 의혹에 연루됐고 이로 인해 국민 여론이 두 동강이 났을 정도로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대통령은 오히려 ‘마음의 빚’ 운운하며 조국을 감쌌다.
   
   오랜 기간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기부금을 착복한 혐의로 기소된 윤미향 의원, 여비서 성추행 사건이 터지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해서도 대통령은 침묵을 지켰다. 지난 3년여간 서울 집값·전셋값이 50% 이상 급등해 국민들의 절망과 원망이 사회 도처에서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주무장관인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오히려 이 정권 ‘최장수’ 장관으로 예우받고 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태연히 ‘공정’을 얘기한다. 여전히 과거를 탓하고 사회를 비판하며, 전임자들에게 책임을 돌린다. 성난 민심이 들끓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내 편은 빼고 네 편을 탓한다. 그것이 공정이다. 그들만의 공정이다.
   
   이 대목에서 30여년 전 읽은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줄거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골 초등학교 5학년생인 주인공 엄석대는 전교 1등에 반장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이 학교 최고의 모범학생으로서 선생님의 두터운 신임과 아이들의 절대적 복종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대리시험으로 성적을 조작하고 동료 학생들을 겁박해 지배하고 있었으며, 선생님들에겐 겉으로 절대 복종하는 ‘순한 양’으로 행세하는 매우 음험한 아이였다.
   
   서울서 살다 시골 학교로 전학 온 소설 속 ‘나’ 한병태는 이런 낌새를 알아채고는 엄석대에게 저항하려고 했으나 결국 위력에 밀려 그의 수하로 들어가고 만다.
   
   그러나 엄석대의 ‘절대권력’은 6학년 올라가면서 새로 부임한 담임선생님에 의해 깨지고 만다. 우등생을 시켜 완성한 그의 시험지 조작사건이 드러나면서 학생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이후 그의 비행을 낱낱이 담임에게 일러바쳤다. 결국 엄석대는 학교에 불을 지르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 소설은 엄석대라는 인물을 통해 권력의 속성,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 무기력한 대중들, 인간의 기회주의적 속성들을 기발하게 그려냈다. 1987년 6월항쟁과 6·29 민주화선언 직후인 당시 한국적 상황과 오버랩되면서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런 엄석대가 2020년 지금 한국 사회에 살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우리들의 어린 시절에도 물론 커닝이 있었다. 나도 가끔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지만 부정행위란 사실은 알았다. 만약 들통이 났다면 당연히 매 맞고 반성하고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10대도 그런 상식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사는 엄석대라면 어땠을까. 그는 우선 ‘물귀신 작전’을 폈을 것이다.
   
   “나만 그랬느냐, 다들 그러지 않았느냐, 그런 적 한번도 없는 사람 손들어 봐라.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나.”
   
   그리고 그는 ‘과거’를 탓했을 것이다.
   
   “이 모든 부정행위는 과거 선배들의 관행이었고 청산됐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나나 여러분이나 우린 그런 관행과 관습의 피해자들이다.”
   
   소설 속의 엄석대는 어린 학생들의 소심함과 부끄러움, 두려움을 역이용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는 엄석대보다 훨씬 교활하고 지능적인 인간들이 수두룩 천지다.
   
   작년 이맘때 조국 자녀들의 편입학 문제로 시끄러울 당시 나는 어린 시절 동네 인쇄소집 아들이 생각났다. 동갑내기 그 녀석은 대학 졸업 후 직장 입사시험 때 자기 집 인쇄기를 이용해 가짜 성적증명서를 만들어 제출해 합격했다는 소리를 마치 무용담처럼 주위에 하고 다녔다.
   
   그때 명백한 범죄행위인데도 부끄러움 없이 스스로 떠벌리는 모양새를 전해 듣고 아마 그 녀석은 그전부터 그런 일을 상습적으로 해오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한두 번 할 땐 죄책감이 들지만 자주 하면 일상적 관행으로 뇌는 받아들이니까.
   
   나는 40여년 전 유신 말기 때 군대생활을 했다. 그땐 밤 12시 통행금지(통금)가 있던 시절이었다. 만약 사병이 통금에 걸리면 그대로 수도군단 헌병대로 끌려가 수십 일 영창살이를 해야만 했다. 더구나 정식 절차를 밟지 않은 휴가 미복귀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미도 사건’(1971) 등 탈영사고가 자주 나던 시절이라 군기가 매우 엄격했다.
   
   물론 당시는 군사독재 시대라 이른바 실력자 자제거나 ‘백’이 있다면 유야무야되는 일도 간혹 벌어졌겠지만….
   
   이후 시간은 흘러흘러 독재사회가 민주사회가 되고, 산업화 시대가 정보화 시대로 바뀌었으며,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가 넘는 선진부강 나라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정의가 불의로 매도되고, 불의가 정의인 양 행세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한때 정의를 부르짖은 사람들이 추락해 이제는 불의를 저지르고 감싸는 세력이 됐으며, 그 반대의 모습도 오버랩된다.
   
   그러나 보다 엄밀히 말해보자. 도대체 누가 정의고 누가 불의인가? 그런 이중 잣대로 ‘내 편은 정의’ ‘네 편은 불의’로 규정하는 세상에서 ‘공정’은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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