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치매를 막연하게 ‘늙으면 생기는 병’ ‘정신 질환’ 정도로만 생각한다. 치매에 걸린 환자나 그 가족은 미처 질병에 대응할 준비나 노력 없이 그저 받아들이고 포기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치매는 뇌의 기질적 원인에 의해 신체의 기능이 떨어지는 병이며, 처음부터 정신이나 마음에 생기는 질환이 아니다. 관리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생존 기간과 삶의 질은 확연히 달라진다.

치매는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가족력도 5~10% 이내인 질병이다. 65세 이후부터 유병률이 빠르게 올라가는데, 이때부터는 누구나 치매를 조심해야 한다.

치매가 오면 가장 먼저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부위의 신경세포 수가 감소하면서 기억 장애가 생긴다. 시간이 지나면 뇌의 전반적인 기능을 통제하는 전두엽 등이 제 구실을 못하게 돼 일상생활이 어려워지기도 한다. 이는 전체 치매의 50~60%를 차지하는 알츠하이머성 치매뿐 아니라, 뇌 혈관에 문제가 생기거나 혈액순환이 잘 안 돼 뇌 기능이 떨어지는 혈관성 치매(전체 치매의 20~30%)와, 단백질 덩어리인 루이소체라는 물질이 대뇌피질에 쌓이는 루이소체 치매(10~20%)도 마찬가지다.

그중 알츠하이머성 치매는 특히 뇌조직을 손상시키는 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이 뇌에 과도하게 쌓여서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우리 몸은 뇌에 쌓인 아밀로이드를 청소할 능력을 갖고 있는데, 나이가 들면 그 기능이 점점 떨어져 결국 치매가 오기 쉬운 상태가 된다. 또 ‘SUMO1’이나 ‘S100a9’이라는 유전자를 갖고 있으면 아밀로이드가 많이 만들어진다.

아밀로이드는 해마부터 시작해 전두엽·후두엽·두정엽 등 뇌 전반에 걸쳐 쌓인다. 그러면 해당 부위의 뇌 기능이 떨어져 점점 더 많은 증상이 새로 나타난다. 증상은 서서히 발현되기 때문에 정확히 언제부터 치매 증세를 겪기 시작한 것인지 알기 어렵다. 특히 발병 초기부터 전두엽과 측두엽이 망가지는 전두·측두엽 치매환자는 초기에 나타나는 기억력 장애 없이 곧바로 다른 증상을 겪기도 한다.

치매가 일단 발병하면 다음의 과정을 거쳐 병이 진행된다. 치매를 진단받은 후의 수명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 기간 동안의 삶을 조금이나마 존엄하고 가치 있게 만들고 싶다면, 어떤 증상을 겪게 되는지 미리 알고 그에 맞는 대처법을 익혀둘 필요가 있다.

자료: 한국치매협회
자료: 한국치매협회

인지기능 장애

- 최근 일부터 기억 못하기 시작

75세 황모씨는 친구들의 생일은 물론, 그들의 자녀 이름까지 모두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친구들의 자녀가 몇 명인지, 자신의 아침 식사 메뉴가 무엇이었는지 등 사소한 것들을 깜빡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나이가 든 탓으로만 여겼는데, 최근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어떤 주제로 대화하고 있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한 경험을 하고서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다. 황씨는 ‘알츠하이머성 치매’ 초기 진단을 받았다.

기억 장애는 치매의 가장 초기에, 가장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다.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부위의 신경세포 수가 감소하면서 기억 장애가 생긴다. 주로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최근에 겪었던 일을 생생히 떠올리지 못하는 게 특징이다. 상대적으로 오래전의 일은 잘 기억하지만, 병이 진행될수록 이마저도 어려워진다. 초기 치매 환자는 자신의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는 경우도 있다. “무언가를 설명하려 할 때 특정 단어가 생각이 안 난다” “자꾸 주변 사람의 이름을 잊어버린다”는 식이다. 이런 기억 장애를 방치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공간지각 장애를 겪기도 한다. 늘 쓰던 물건을 엉뚱한 곳에 두거나, 매일 다니던 곳에서 길을 헤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일을 겪어도 치매를 의심하는 경우는 드물다. 단순 노화 증세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치매를 발견하고 증상을 늦추는 치료를 받으면 이후에 나타날 증상 발현 시기를 늦출 수 있고 생존 기간도 늘릴 수 있다. 따라서 기억력 감퇴가 시작됐을 때 빨리 검사를 받아보라고 전문가들은 권한다.

서울시와 구청이 운영하는 치매지원센터를 찾으면 무료 검사를 받을 수 있다. 치매 선별 검진을 받고, 치매가 있는 것으로 의심되면 신경·심리 검사와 문진 과정 등을 거쳐 인지건강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치매 확진을 위해서는 병원에서 MRI·소변·혈액 검사 등을 받아야 하는데, 일부 구청에서는 저소득층 노인에게 검사비를 지원한다. 서울 이외 지역은 보건소가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사고력 장애

- 사소한 것도 혼자 결정 못하게 돼

치매 초기에는 주로 기억 장애를 겪지만, 아밀로이드가 뇌의 전두엽(판단력·사고력을 주관하는 곳)까지 침범하면 추상적 사고를 하거나 결정을 내리는 것이 힘들어지고, 문제 해결 능력도 떨어진다. 이 때문에 주식 투자를 하거나 사업 등을 할 때 큰 어려움을 겪게 돼, 점점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업 수완이 좋다”는 말을 들으며 주변인들로부터 늘 인정을 받았던 박모(70)씨는 치매 진단을 받기 몇 해 전까지 회사 운영을 하면서 곤란한 상황을 여러 번 겪어야 했다. 그전부터 사소한 것들을 깜빡하는 일이 자주 있었지만,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 증상으로만 여겼었다. 거래처와 문제가 생겼을 때도, 심지어 지인들에게 보낼 명절 선물을 고르는 것까지 혼자의 힘으로 결정하는 게 어려워져서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갔는데, 그곳에서 “치매가 의심되니 병원을 찾아보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병원에서 검사를 한 결과 박씨는 치매를 앓고 있었고, 결국 지금은 회사 일을 다른 가족에게 넘긴 상태다.

이처럼 치매가 점점 진행되면 직업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직업은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느끼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라서,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게 하면 환자의 충격과 상실감이 클 수 있다. 치매 환자는 충격을 받으면 증상이 갑자기 심해질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따라서 이때는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이유를 환자가 이해할 때까지 충분히 설명하고,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고 느끼지 않도록 수시로 산책을 하거나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가거나 가정에서 소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렇게 하면 환자의 충격이 덜해, 심리적인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

정신·행동 장애

- 우울증 겪고, 환각·환청 경험하기도

치매가 중·후기로 진행해 감정을 주관하는 뇌 부위인 측두엽이 망가지면 비정상적인 정신·행동 증상이 나타난다. 환자의 90%는 정신·행동 이상 증상을 한두 가지씩 겪는데, 대표적인 게 우울증이다. 치매 환자의 80%가 우울증을 경험한다. 하지만 환자와 가족 간의 의사소통이 어려워진 상태이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밥을 잘 안 먹거나 무기력한 증상을 보이면 우울증을 의심해봐야 한다. 평소 환자가 좋아하던 일을 해주거나, 환자의 좋았던 추억을 얘기해주는 것만으로도 우울감 해소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망상과 환각도 잘 겪는다. 누군가가 자신의 물건을 훔쳤다고 화를 내거나, 세상을 뜬 배우자가 보인다고 하는 식이다. 이럴 때 환자를 나무라거나 그 사실을 부인하면 환자가 혼란을 겪을 수 있다. 없어진 물건을 함께 찾아보자고 제안하거나 아끼는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상자를 마련해주고, 환각의 대상에 대해 물어보거나 인정해주면 된다.

치매를 앓던 어머니가 세상을 뜬 지 3년이 지났다는 주부 김모씨는 “어머니가 매일 밤마다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을 크게 외치는 탓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치매에 걸린 모친이 환각을 경험한다는 것도, 같은 말을 반복해 소리치는 것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오셨네요. 기분 좋으시죠?”라며 안심시켰고, 그제야 가족 모두가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뇌 기능이 전반적으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집중력도 낮다. 치매환자 대부분이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끈기 있게 환자를 집중시키고 눈높이에 맞춰서 대답을 해주는 것이 중요한데, 환자가 펜을 보며 “무엇이냐”고 물으면 “볼펜이다”라고 답하는 대신 직접 사용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글씨를 쓰는 물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지남력(시간과 장소를 인식하는 능력)이 떨어지면 한 사람에게 집착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가족 중 한 명이 안 보이면 불안해하고 소리를 지른다. 만약 환자를 두고 외출을 해야 한다면 시계를 이용해 돌아올 시각을 알려주고, 화장실에 갈 때는 환자가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는 게 도움이 된다. 치매환자 가족이 힘들어하는 부분 중 하나가 환자의 성적 행위다. 환자의 최대 70%가 성적 행위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보고 과민 반응을 하면 환자가 위축감을 느껴 우울증 등으로 연결될 수 있다. 환자가 성적 행위를 시도하려고 한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해주자. 성적 행위를 하는 대상을 배우자로 오해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지를 벗거나 성기를 만지는 행동이 모두 성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대소변이 마렵거나 그 부위가 불편한 것일 수 있다.

결국엔 신체 기능 떨어져 사망

자료: 보건복지부·대한의학회
자료: 보건복지부·대한의학회

치매환자의 사망은 치매가 직접적 원인이 아니다. 폐렴, 탈수증, 감염, 영양결핍, 패혈증, 폐색전증 등 치매로 인한 합병증이 치매환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치매가 오면 결국 모든 뇌 기능이 떨어져서 걷거나, 손을 움직이거나, 음식을 씹고 삼키거나, 대소변을 보거나, 숨을 쉬는 등 생존에 필요한 아주 기본적인 일들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치매가 일단 시작되면 증상 관리를 철저히 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한다.

현재는 치매의 근본적인 치료법이 아직 없다. 다만, 기억력을 증진시키는 물질인 아세트콜린의 분해를 억제하는 약물을 써서 중증 치매로 진행되는 기간을 2~3년 정도 늦출 수는 있다. 치매를 치료하는 약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는 국내외에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특히 치매 치료 백신, 즉 아밀로이드의 활동을 막는 항체 백신 주사에 대한 임상연구가 여러 다국적 제약회사에 의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런 백신이 개발돼 뇌에 쌓여 있는 아밀로이드를 제거하더라도 이미 죽은 뇌세포는 되살릴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매 치료법도 연구 중인데, 상처를 치유하는 성질을 가진 성체 줄기세포를 치매환자에게 투여하면, 뇌에 쌓였던 아밀로이드가 없어질 뿐 아니라 망가진 뇌세포도 제 기능을 찾는다는 원리다. 이런 치료가 상용화되려면 5~10년 정도 걸릴 것으로 보인다.

아밀로이드

치매 유발 물질 아밀로이드 걷기·숙면이 뇌에 쌓이는 것 막아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유발하는 아밀로이드를 줄이는 방법은 없는 걸까? 여러 연구를 통해, 잘 걷고 잘 자면 아밀로이드가 뇌에 쌓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숙명여대 체육교육학과 정지혜 교수팀은 평균 연령 71세인 여성 40명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에게는 6개월간 신체자극운동과 걷기운동을 합해서 매일 45분~1시간 시켰고, 다른 그룹은 운동을 시키지 않았다. 신체자극운동이란 팔다리 들어올리기·스트레칭·어깨 두드리기·엉덩이 흔들기 등으로 구성한 프로그램이다. 그 결과, 운동 그룹은 아밀로이드 수치가 0.2pg/dL에서 0.16pg/dL로 떨어졌고, 대조 그룹은 0.18pg/dL에서 0.22pg/dL로 오히려 올라갔다. 이 연구에 대해, 아주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이윤환 교수는 “전신 운동은 아밀로이드 분비를 줄여 주는 동시에 뇌의 신경세포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치매를 막아 준다”며 “1주일에 세 번씩 3㎞ 거리를 땀이 날 정도의 강도로 걷고, 온몸 체조를 하면 이 같은 효과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사이언스 온라인판에는 최근, 인간이 잠을 자는 근본적인 목적이 뇌에 쌓인 독성 물질을 청소하기 위함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국 뉴욕 로체스터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수면 중에는 ‘글림프 시스템’으로 불리는 뇌의 독성물질 제거 활동이 이뤄진다. 이로 인해 알츠하이머성 치매와 같은 신경 질환을 유발하는 아밀로이드 등의 독성 물질이 제거된다고 한다. 연구팀은 또한 “인간의 뇌는 잠잘 때와 깨어 있을 때 기능이 다르다”며 “수면 중 뇌세포가 60%나 줄어들기 때문에 노폐물 제거 과정이 깨어 있을 때보다 10배 가까이 빠르게 이뤄진다”고 말했다.


도움말

김어수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이동우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참고서적 ‘36시간-길고도 아픈 치매가족의 하루’

한희준 헬스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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