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해상 실크로드의 기점
저장재벌의 주류 ‘닝보방’ 중국 최고 재벌 집단 군림
상하이와 닝보를 연결하는 ‘바다 위의 만리장성’ 항저우만 해상대교. ⓒphoto 신화통신
상하이와 닝보를 연결하는 ‘바다 위의 만리장성’ 항저우만 해상대교. ⓒphoto 신화통신

상하이(上海)남역 장거리버스 터미널서 출발한 시외버스가 항저우만(杭州灣)에 이르러 잠시 멈췄다. 이어 버스가 올라간 곳은 ‘바다 위의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항저우만 해상대교’. 총연장 36㎞에 달하는 항저우만 해상대교는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해상대교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 잠에서 깬 버스승객들은 카메라를 꺼내며 연방 감탄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36㎞의 다리를 건너 도착한 곳은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 자욱한 바다안개를 헤치고 다리를 건너는 데는 25분이 걸렸다. ‘바다 위의 만리장성’이란 말을 실감케 했다. 지난해 12월에는 ‘해천일주(海天一洲·바다와 하늘의 큰 섬)’라는 해상 휴게소도 문을 열었다. 해상대교의 가운데 지점에 입체교차로를 설치해 조성한 바다 위 휴게소다.

과거 상하이에서 닝보로 가기 위해서는 육지로 오목하게 들어간 항저우만을 빙 둘러가야 했다. 지금도 철도는 상하이에서 항저우를 둘러서 닝보로 들어온다. 항저우만을 가로지르는 다리 가설은 닝보 사람들의 최대 숙원이었다. 지난 2008년 5월 항저우만 해상대교가 놓이면서 상하이와 닝보는 다리 하나로 직결됐다.

상하이와 ‘중국의 허브항만’ 경쟁

인구 719만명의 닝보는 저장성 제일의 항구도시다. 과거 ‘해상 실크로드’의 시작점으로, 상하이가 부상하기 전까지는 중국 화둥(華東)지방 최대의 항구도시였다. 한때 중국 제일의 비단과 도자기 수출항이고, 세계 7대 선박왕 중 2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닝보의 경제력은 저장성의 성도(省都)인 항저우(杭州)를 오히려 앞선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같은 배경이 있어 한때 ‘닝보·저우산(舟山)항’은 세계 최대의 컨테이너항인 상하이와 중국의 허브 항만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수심(水深) 등 ‘양항(良港)’으로서의 조건은 닝보가 상하이를 앞선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상하이는 항저우만 가운데 있는 대·소 양산도에 심수항인 양산항(洋山港)을 조성해 닝보를 꺾고 중국의 국가 허브 항만의 지위를 가져갔다.

닝보 도심의 삼강구(三江口). 융강(甬江), 펑화강(奉化江), 위야오강(余姚江) 등 세 개의 강줄기가 한데 모여든다 해서 삼강구란 이름이 붙었다. 닝보 삼강구에는 상하이 황푸강(黃浦江)변의 와이탄(外灘)보다 더 오래된 라오와이탄(老外灘)이 있다. 닝보의 라오와이탄은 서양식 근대건축물이 즐비한 상하이 와이탄보다 20년 앞서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닝보와 상하이의 경쟁은 역사가 오래됐다. 닝보와 상하이는 중국과 영국 간의 1840년 아편전쟁 발발 직후 중국에서 가장 먼저 개항된 5개 항구도시 가운데 하나다. 난징(南京)조약의 부속조약인 오구통상장정(五口通商章程)을 체결하면서다. 광저우(廣州), 샤먼(厦門), 푸저우(福州) 등도 이때 상하이, 닝보와 함께 문호를 개방했다.

1844년 오구통상장정에 따라 닝보가 개항되면서 외국인들은 닝보 라오와이탄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옛 영국영사관과 천주교당이 한데 모여있는 라오와이탄변은 현재 멋진 카페와 술집들이 늘어선 곳으로 변했다. 저녁이 되자 라오와이탄은 삼강구를 바라보며 맥주와 음악을 즐기는 닝보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고려사신들이 머물던 ‘고려사관’

닝보는 우리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닝보 시내 한복판에 있는 월호(月湖). 수려한 풍광의 월호변에는 고려사관(高麗使館)이란 기와집이 있다. 닝보에서 ‘고려’란 이름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고려의 사신들이 닝보에서 머물던 곳이라 전한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는 고려사관 안에는 고려와 남송(南宋)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각종 문물과 자료가 전시돼 있었다.

요(여진족), 금(거란족), 원(몽골족)에 밀려 장강(長江) 이남으로 내려온 남송은 항저우(옛 임안)에 수도를 뒀다. 닝보는 항저우의 입구 역할을 하는 곳이다. 항저우에서 닝보는 열차로 1시간30분 거리. 과거 심청이가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중국 상인에게 팔려간 곳도 닝보 인근의 저우산군도(舟山群島) 일대라는 속설이 있다.

닝보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장제스(蔣介石)다. 한때 중국대륙을 통일한 장제스 전 총통은 국공(國共)내전서 패해 대만으로 쫓겨났다. 닝보시 남쪽 펑화(奉化) 지커우(溪口)에는 ‘장씨고거(蔣氏故居)’라는 장제스의 옛 집이 그대로 남아있다. 다만 마오쩌둥(毛澤東)과 국공내전을 벌인 장제스의 이력을 감안 ‘장제스’ 대신 ‘장씨(蔣氏)’로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蔣經國) 전 대만총통이 태어난 곳도 ‘장씨고거’다. 장제스·장징궈 장씨 부자의 집권기 때 닝보 출신의 저장재벌들은 대거 상하이로 진출했다. 현재 ‘장씨고거’는 닝보를 찾는 대만 사업가와 여행객들이 찾는 필수 코스로 변했다. 한편 중국 국무원은 1996년 ‘장씨고거’를 문물보호단위(문화재보호구역)로 지정해 입장료 수입을 챙기고 있다.

바오위강 등 선박왕 2명 배출

닝보 고려사관 ⓒphoto 이동훈 기자
닝보 고려사관 ⓒphoto 이동훈 기자

항구를 끼고 있는 닝보 사람들은 일찍부터 상업과 무역에 종사했다. 특히 닝보 출신 상인들은 장제스의 국민당(國民黨) 집권기 때 전성기를 누렸다. ‘닝보방(寧波幇)’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1917년 상하이 최초의 대형 실내오락장인 ‘대세계(大世界)’를 만든 황추주(黃楚九)가 대표적이다. 상하이를 ‘동방의 파리’로 만든 사람도 닝보상인들이다.

현재 중국 최고의 재벌집단으로 불리는 저장(浙江)재벌의 주류도 ‘닝보방’들이다. 같은 저장상인 계열이지만 원저우(溫州) 상인들은 약간 비주류 별종으로 취급된다. 닝보방들은 1949년 장제스가 마오쩌둥과의 내전에서 패해 대만으로 도망가자 홍콩, 마카오, 대만으로 대거 탈출했다. 이는 닝보방들이 해외 화상들의 주축을 이루는 계기가 됐다.

닝보는 무려 2명의 선박왕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닝보시 한가운데 있는 닝보대학교. 닝보대학교는 닝보 출신의 선박왕 바오위강(包玉剛) 회장이 1986년 세운 대학교다. ‘개작두’로 유명한 송나라 때의 명판관 ‘포청천(包靑天·바오칭톈)’의 후손인 바오위강은 국공내전 직후 홍콩으로 건너가 대형 선박만 200척 이상을 거느린 선박왕이 됐다.

중국인 최초로 홍콩상하이은행(HSBC)의 이사회에 진입한 바오위강은 영국 왕실로부터 작위도 하사받았다. 개혁개방에도 공헌해 닝보에 들어선 닝보상방 문화공원에는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과 바오위강이 손을 잡고 있는 조각상도 있다. 닝보상방문화공원은 지난 2009년 10월 닝보 출신 재벌들이 갹출해 조성했다.

범(汎)닝보방에 속하는 둥하오윈(董浩云) 회장 역시 해운업으로 부를 축적해 ‘현대판 해상왕 정화(鄭和)’라는 별명을 얻었다. 둥하오윈은 닝보 인근 저우산군도 출신이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과도 막역한 사이로 알려졌던 둥하오윈 회장은 1997년 홍콩의 중국반환 직후 아들인 둥젠화(董建華)를 홍콩의 초대 행정장관(옛 총독 격)에 올려놓는 위력을 과시했다.

최근 닝보상인들은 IT분야에서도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중국 최로로 ‘삐삐’를 개발해 유명세를 탄 중국의 토종 휴대폰 업체 닝보버드(波導)가 대표적이다. 중국 최초의 포털사이트 왕이(網易)의 창업주로 한때 중국 최고 갑부에 오른 딩레이(丁磊), 세계 최대의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의 장쭝머우(張忠謀) 회장 역시 닝보 출신의 기업가로 유명하다.

이동훈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