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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名家 <현대편>]  (19) 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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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157호] 2011.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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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名家 <현대편>](19) 조지훈

“살찐 돼지보다 깡마른 학이 되라!” 지조론 설파한 영남 선비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시인이자 뛰어난 이론가 27세 때 고려대 교수 발탁
“인간의 의지 보여주겠다” 손등에 불 붙인 성냥 올리기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 1960년 3·15 부정선거 땐
“지조 없는 지도자 믿을 수 없다” 민족정기론 발표하고 나서
photo 조태렬
지훈(芝薰) 조동탁(趙東卓)은 지조를 지켜온 영남 명문 집안의 마지막 선비로 손꼽힌다. 그는 지조론을 설파하고 스스로 기개 어린 지사(志士) 문인의 삶을 살아왔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였으며 조선어학회사건 연루자로 검거되어 문초를 받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박두진·박목월과 함께 활동하며 ‘청록파(靑鹿派) 시인’으로 불렸다. 그는 자유당 군부 독재의 회유와 협박에도 끝내 굴하지 않은 저항·지조의 지성으로 칭송되고 있다. 그는 ‘풀내음 속에 순수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지훈’을 스스로 아호이자 필명으로 썼다고 한다.
   
   “희고 준수한 얼굴에 훤칠한 키, 입은 꼭 다물고, 길어서 약간 흐트러진 리젠트 머리엔 검정 베레모를 썼다. 옷은 대개 원색 줄무늬 와이셔츠에 소매는 두어 번 걷어 올리고, 검은 굵은테 안경을 쓴 시선은 항상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걷는다. 한 손엔 으레 스틱을 쥐고 또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찌른 채, 저녁 노을 질 무렵이면 서울 성북동 골짜기를 한가롭게 산책하는 멋진 중년 신사. 이것은 1965년경 만년의 지훈의 모습이었다.” 지훈의 수제자로 알려진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이 떠올린 지훈의 참 인상이다.(‘엄숙한 지성 조지훈론’)
   

   
   경북 오지에 정착한 한양 조씨 명문가
   
   지훈은 1921년 1월 11일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주실)에서 조헌영(趙憲泳)과 유노미(柳魯尾) 사이의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은 영양읍에서 청량산을 지나 꼬불꼬불 자동차로 15분 정도 가야 닿는 경북 북동부 지역의 깊은 산골짝, 오지 중의 오지인 작은 마을이다.
   
   그의 집안은 조광조가 기묘사화 때 역적으로 몰려 사사된 후 전국 곳곳으로 흩어진 한양 조씨의 일부로, 이곳에 정착해 명문가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지훈의 조부 조인석의 선대 조승기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창의(倡義)한 유학자 의병장으로 광복 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반면 아들인 조인석은 1900년경 상경하여 시대의 변화를 읽고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후 하향하여 동네 주민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는 등 개화주의자가 된다. 종가에 영진의숙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스스로 초경독본(初經讀本)이란 청소년 교육용 책자를 저술하여 동네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친다.
   
   조인석이 이 책에 쓴 ‘농촌방문기’는 그의 족질(族姪)인 조동걸 교수(전 국민대 대학원장)에 의해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논총으로 발간된 바 있다. 여기에는 몇 수의 시도 들어 있어, 지훈을 비롯한 그 자손들의 문학적 재질은 그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신간회의 영양지회장을 역임했다. 종손인 그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문중 사람들이 성씨를 보존하도록 이끌었다. 슬하에 근영(根泳·국립도서관장 역임), 헌영(제헌국회의원), 준영(俊泳·초대 민선 대구시장, 경북도지사 역임), 애영(愛泳·시조시인) 4남매를 두었다.
   
   지훈의 부친 조헌영은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허헌이 회장이었던 신간회의 도쿄지회장을 지냈으며 귀국 후에는 신간회 총무간사를 지냈다. 그는 유학 시절 박열 의사가 재판을 받던 중 “일본 판사가 법복을 입는 것같이 자신도 조선의 관복을 입고 법정에 서겠다”고 주장하자 고향집에서 사모관대를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그는 신간회가 해산된 뒤 일제의 감시를 피할 겸 생계 수단으로 서울 성북동에 동양의약사라는 한의원을 냈다.
   
   
   부친 조헌영은 한의학 체계화에 공헌
   
   조헌영은 ‘동양의학사’ ‘통속 한의학 원론’ 등 본격적인 한의학서를 저술했고, 동·서의학을 비교연구하는 등 한의학 체계화에 공헌한다. 이 저서들은 훗날 경희대 한의과대학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경희대 한의과대학장 김병운 교수는 이 저서들을 “한의학의 과학성과 민족의학으로서 가치성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입문서였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는 일제하에서는 조선어학회 표준말 사정위원 및 큰사전 편찬전문위원을 지냈으며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 차장을 역임했다. 또 한민당 창당에도 참여하여 선전·지방·조직부장을 맡았다. 제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반민특위위원에 선임된 후 한민당과 결별했다. 그후 6·25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도 동양의학 연구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최초의 동양의학박사가 되어 동양의학의 체계를 수립하고 후진을 양성하다 1988년 5월 23일 별세했다고 북한적십자사에서 알려왔다.
   
   지훈은 6세 때부터 9세까지 조부로부터 한문과 신학문을 함께 배우며 15세 때부터는 일본 와세다대학 통신강의록으로 독학한다.
   
   “열일곱 살이 되기까지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익힌 조지훈이 그때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정규교육을 받은 것은 겨우 두 해 남짓이었다. 아마도 이 같은 사실이 뒷날 조지훈이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선비로서의 몸가짐과 지사로서의 인격을 갖추는 데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한문을 배우던 소년 시절부터 그는 시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절의를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명분을 몸에 익혔다. 그의 할아버지인 조인석이 손자에게 한문과 시를 가르치다 보니 어찌나 재주가 뛰어나던지 (이놈도 또한 내 슬하에 머물러 있을 놈이 아니로구나) 하고 탄식했다는 일화가 있다.”(‘구자균과 조지훈’ 홍일식)
   
   지훈은 17세 때 상경하여 고향 선배인 시인 오일도가 주관하던 문예잡지 시원(詩苑)사에 머물면서 현대시를 익혔다. 또한 조선어학회에 드나들면서 한글에 대한 현대적인 문법 체계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마음의 고향은 한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1937년 3월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한 독립투사 김동삼의 시신을 한용운이 거두어 그의 집이었던 서울 성북동 꼭대기의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를 때, 지훈은 부친과 함께 그곳에 찾아가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그는 1939년 4월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에 입학하며 이즈음 그의 첫 번째 추천시 ‘고풍 의상(古風衣裳)’이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예잡지 ‘문장’에 발표된다. 이어 11월에 승무(僧舞)가, 이듬해 2월에는 봉황수(鳳凰愁)가 추천되어 시인으로 문단에 나선다. 다음은 그의 시작에 얽힌 스토리다.
   
   “승무를 쓰시기 전에 아버지는 한성준의 춤, 그리고 최승희의 춤과 어떤 이름 모를 승려의 춤을 보셨대요. 1938년 가을, 수원 용주사의 큰 재에서 승무를 보고 아버지는 재가 파한 후 늦게까지 넋을 잃고 앉아 계셨다고 해요. 이듬해 첫여름 이당 김은호의 ‘승무도’ 앞에서는 두 시간 가까이 서서 7~8장의 스케치까지 하셨고. 그러나 춤을 세밀하게 묘사하면 혼의 흐름이 살지 않고, 혼의 흐름을 중시하면 춤의 묘사가 죽는 고통을 겪으며 몇 달을 보내야 했다지요.”(장남 광렬씨)
   
   지훈은 1940년 8월 18일 김성규(金性奎)의 딸 위남(渭男)과 결혼한다. 결혼 후 그는 부인에게 난희(蘭姬)라는 새 이름을 선사하기도 한다. 장인 김성규도 신간회 영주지회 회원이자 청년동맹집행위원장으로 있으면서 국제청년기념일을 기해 민족궐기대회를 열려다 체포돼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이다.
   
   “저는 결혼해서부터 줄곧 남편이면서도 스승처럼 존경하고 살아왔지요. 그러나 아이들 가정교육에는 아주 대범하셨어요. 그저 솔선수범하셔 행동으로 보여주셨고, 자유분방하게 키우셨지요. ‘인성 자체가 중요하다’면서 무언의 교육을 하신 것이지요.”(난희씨)
   
   혜화전문 문과 시절 지훈의 생활은 자못 자유분방하였다. 동서양의 문학작품과 이론서를 두루 섭렵하였으니, 21세 때(1940년) 그는 자기의 한 부분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가 조선에서 자랐을 뿐, 나의 마음의 고향은 한곳에 고요히 있는 것이 아니다. 괴테와 하이네의 고향도 나의 마음의 고향이었다. 보들레르의 퇴폐, 베를렌의 비애, 랭보의 유현(幽玄), 콕토의 기지가 사는 불란서의 하늘이 그리워 때로 내 마음은 새하얀 캡을 쓰고 스틱을 휘두르며 파리장이 되어 푸른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것이다.”(‘구자균과 조지훈’)
   
   
   고려대 교가도 작사
   
   지훈은 1941년 혜화전문을 졸업한 후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의 외전(外典) 강사로 취임하여 불교계의 거봉인 방한암 스님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금강경, 화엄경, 전등록 등 불교 서적을 탐독하여 그의 시작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는 뒷날 월정사 생활 10개월을 돌이켜보면서 “나의 시가 지닌 바 기교주의는 선(禪)으로부터 오는 무기교주의로써 지양되었고, 주지의 미학은 자연과의 교감으로 바뀌어지기 시작하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훈은 1942년 조선어학회가 기획한 큰사전 편찬원으로 일하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잡혀가 심문을 받고 풀려나자 곧 월정사와 고향 동네 등으로 도피해 지냈다. 광복을 맞자 지훈은 조선어학회의 재건 사업으로 ‘한글’의 속간호를 편집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는 미군정청 문교부로부터 국사 교본의 편찬 작업을 맡기도 했다.
   
   이듬해 경기여고 교사로 취임하여 교가(김순애 작곡)를 작사하기도 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나섰다. 박목월·박두진과 함께 낸 ‘청록집’을 비롯하여 ‘풀잎단장(斷章)’ 등 시집, ‘시의 원리’ 등 시론집, ‘창에 기대어’ ‘시와 인생’ 등 산문집을 낸다.
   
   지훈은 1947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고려대 교수로 발탁된다. 그 사연은 이랬다.
   
   “윤사순 고려대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이상은 교수와 이종우 교수가 함께 어느날 지식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술집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어느 젊은이를 처음 만났는데 깊이 있는 학문적 지식과 논리, 정연한 화술, 비범하고 당당한 풍모의 그 젊은이에게 두 분이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두 분 중 한 분께서 ‘기가 막히다’며 주위 사람에게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래서 문장지 출신 시인이면서 뛰어난 이론가 조지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시인이면서 사회·과학·철학 모든 분야를 꿰뚫고 있다’며 깜짝 놀라셨다고 한다.”(‘아버지 조지훈-삶과 문학과 정신’ 조광렬)
   
   어느날 좌익학생이 교수인 지훈을 벽돌로 찍으려고 날뛰었다. 그러나 상대는 지훈의 의연한 자세에 압도당해 제풀에 꺾여서 벽돌을 내려 놓았다. 지훈은 비겁한 것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죽음을 공부하라” “살찐 돼지보다 깡마른 학이 되라”고 가르쳤다. 또 “우리는 언젠가는 죽어야 하고 죽음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죽는 까닭과 죽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했다. 지훈은 고려대 교가(윤이상 작곡)도 작사했다.
   
   
   애국을 총으로만 하는 줄 아느냐!
   
▲ 지난 5월 12일 조지훈의 부인 김난희 여사의 구순잔치에 차남 학렬씨, 삼남 태렬씨,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왼쪽부터)이 함께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지훈은 대구로 피란해 문인들을 규합하여 ‘창공구락부’라는 공군 종군작가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퀀셋(반원형 간이 건물) 안에서 술자리가 벌어졌다. 모두 가족들의 생사도 모르는 채 초조와 불안과 무료를 달래던 문인들은 술에 취해 고성방가하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현역 군인 한 명이 쫓아 들어와 천장에 마구 공포를 쏘아댔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지금이 어느 땐 줄 알고 술 마시고 이짓들이냐고. 모두들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그러자 지훈이 소리쳤다.
   
   “이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들어와 총질이냐? 너는 애국을 총으로만 하는 줄 아느냐? 총보다 더 뜨거운 애국이 있는 줄은 모르는 놈 같으니…. 쏠 테면 쏴라! 이놈!”
   
   그러자 총을 든 군인이 약간 기가 꺾이는 듯한 순간, 지훈은 그 군인의 따귀를 후려쳤다. 드디어 그 군인이 총을 내려 놓고 사과를 했다.
   
   지훈의 왼손 손등 오른쪽에는 푸르스름한 흉터가 있었다. 서울 수복 얼마 후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 초청으로 당시 문인들과 주교, 신부들이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칵테일 파티였다. 이 자리에서 어쩌다가 ‘인간의 의지’ 이야기가 나왔다.
   
   주교가 ‘담뱃불만 잠깐 스쳐도 그 뜨거움을 참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의지’라고 하면서 지성인의 의지를 폄하했다. 물론 신의 의지를 더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지훈은 사육신의 실례를 들어 반박하였다. 그래도 주교가 별로 공감을 하지 않자 그러면 내가 이 자리에서 보여 주겠노라면서 성냥개비 대여섯 개를 한꺼번에 움켜쥐고 불을 붙여 자기 손등에 올려 놓았다. 성냥개비와 함께 지훈의 손등이 지글지글 타들어 갔다. 주위가 숙연해지자 지훈은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다른 손으로 술잔을 들어 마셨다. 손등의 불이 제풀에 꺼지자 입으로 훅 불어서 타다 남은 성냥개비를 털어버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밖으로 나갔다.
   
   자유당 말기, 온 나라에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 전야에 지훈은 ‘새벽’지(1960년 3월호)에 ‘지조론’을 써서 민족정기론을 펼친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지조론’ 조지훈)
   
   
   국학자로서도 큰 족적
   
   지훈은 시인일 뿐만 아니라 국학자로서도 큰 기여를 했다. 그가 고려대 초대 민족문화연구소장으로 있으면서 저술한 ‘한국문화사 서설’ ‘한국민족운동사’ 등은 역저로 꼽힌다.
   
   그는 또 사상계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1959년에는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중앙위원, 공명선거전국위원회 중앙위원 등으로 선임돼 자유당 독재를 규탄하는 데 앞장섰다. 4·19 혁명 때는 한국교수협의회 시국선언문을 집필하는 등 교수 시위를 주도했다.
   
   지훈은 1968년 5월 17일 서울 메디칼센터에서 별세하여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 송라산에 안장된다. 지훈은 김난희와 사이에 3남1녀를 남겼다. 장남 광렬(66·미 조지아대학원 도시계획학과 졸업)씨는 재미건축가로 계간지 문예운동을 통해 한국 문단에 등단했다. 고부숙(66·홍익대 공예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딸 윤정(35·미 뉴욕대 발레과 졸업)씨와, 투자은행 펀드매니저인 장남 용범(32·호프스트라대 졸업)씨와 패션디자이너인 차남 용준(31·미 파슨스스쿨 패션디자인과 졸업)씨를 두었다.
   
   지훈의 차남 학렬(63·동국대 경영학과 졸업)씨는 성신양행 전무를 역임한 사업가로 이명선(59·성균관대 생활미술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민정(31·한동대 산업디자인과 졸업, LG텔레콤 과장)·민균(30·패션디자이너) 남매를 두었다. 지훈의 삼남 태렬(56·서울대 법대 졸업)씨는 외교부 차관보(통상교섭조정관), 스페인대사와 한국인 최초로 세계무역기구 분쟁패션의장(재판장) 등을 역임했다. 김혜경(54·서울대 응용미술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은정(27·미 버지니아대 졸업)·상균(22·미 존스홉킨스대 분자생물화공학과 재학, 군입대) 남매를 두었다. 지훈의 딸 혜경(59·성균관대 심리학과 졸업)씨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김승교(63·서울대 기계공학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나영(31·이화여대 심리학·홍보영상학과 졸업, 홍보대행사 컴뮤니케이션즈플러스 과장)·종욱(28·호서대 영문학과 졸업) 남매를 두었다.
   
내가 본 지훈 조동탁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
   
   나는 1955년 고려대에 입학하면서부터 지훈 선생을 줄곧 스승으로 모셔 왔다. 그분의 성품은 실로 다모다양했다. 호방한가 하면 치밀 섬세하고, 강직 절박한가 하면, 온아 순후하고, 엄격 분명한가 하면 너그럽고, 휘고 감기는 멋이 있는가 하면 부지런하고, 소탈한가 하면 근엄하여 함부로 소인배들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그가 언제나 정사(正邪)와 시비와 선악과 미추를 판별하는 데 준엄하였고, 이 판별에 의한 행동이 또한 과감하였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민족문화연구소장으로 200여개의 분류사가 넘는 한국민족문화사대계의 방대한 기획을 추진했을 때 당시 유진오 총장께서도 과연 시인다운 몽상에서만 나올 수 있는 작업이라고 일면 의아하시면서도 찬탄하셨다. 그후 급서하신 지훈 선생께서는 당시 총간사를 맡았던 소제에게 이 작업을 꼭 완결하도록 유언을 남기셨다. 이처럼 지훈 선생의 혼신의 결정(結晶)으로 완성된 한국문화사대계는 오늘날 불후의 한국학 역저로 평가되고 있어 남다른 감회에 젖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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