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사진>이 1987년 사망 전, 정의채 신부(서강대 석좌교수)에게 존재 진리에 대한 24가지 궁금증을 물었다. 그는 병세가 급속히 악화돼 정의채 신부로부터 답을 들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2011년 차동엽 신부가 책을 내고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뒤늦은 답을 시도했다. 철학자 김용규씨가 이 회장이 가졌던 의문을 다시 자신의 인문학으로 풀어낸다.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의 성베드로광장에서 막시밀리안 콜베(1894~1941) 신부를 ‘사랑의 순교자(Martyr of Charity)’로 기록하고 그의 성인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프란치스코회 사제이자 ‘성모기사회’의 창설자인 콜베 신부는 1941년 2월 17일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5월 28일에 아우슈비츠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두 달 후인 7월 말에 죄수 중 한 사람이 수용소에서 탈옥했다. 담당지휘관 카를 프리치 중위는 죄수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죄수들 가운데 무작위로 열 명을 골라 굶겨 죽이는 아사형(餓死刑)에 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끌려나온 사람들 중에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체라는 폴란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자기에게는 아내와 어린 아이들이 있다면서 살려달라고 외쳤다. 그것을 본 콜베 신부가 자기는 이미 늙었고 가족도 없다며 그 사람 대신 자기가 죽겠다고 자원했다. 프리치 중위가 허락해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의 죄수들과 함께 물도 음식도 없는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다. 17일이 지났지만 콜베 신부와 다른 세 명이 기적처럼 살아있었다. 나치는 독극물을 주사하여 그들을 모두 살해했다.

1998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교구의 루돌프 코스(Rudolph Kos) 신부가 성폭행 관련 유죄 평결을 받고 종신형에 처해졌다. 코스 신부가 11명의 어린이를 성적으로 학대했기 때문이다.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성당에는 코스 신부 외에도 아동 성학대범이 둘 더 있었다. 항문과 구강을 이용해 소년들을 성폭행한 로버트 피블스 신부, 소녀들을 성폭행한 윌리엄 휴즈 신부가 그들이다. 댈러스 법원은 민사소송에서 교회가 아동 성학대를 방관한 책임을 물어 1억2000만달러라는 기록적인 배상금을 피고인들에게 지불하도록 판결했다. 뒤이은 형사소송에서는 코스 신부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 수감했다. 수도사이자 정신병리학자인 리처드 사이프가 쓴 ‘비밀의 세계: 성욕과 독신 추구’에 따르면 1983년에서 1987년 사이에 미국에서 평균 일주일에 한 번꼴로 사제의 성추행 사건이 터졌으며, 이 나라 188개의 교구들 가운데 소아성애도착증 문제로 소송이 발생하지 않은 교구가 단 한 곳도 없다. 1994년 9월에는 한 달 동안 무려 60명의 사제 또는 수사가 아동 성학대죄로 수감되기도 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8년 교황으로선 29년 만에 미국 순방길에 올라 가톨릭 성직자들의 성추문 사건을 사죄했다.

신부란 가톨릭이나 동방정교, 그리고 성공회 등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성직자’들에 대한 일반적 호칭이다. 사전적 정의다. 그런데 위에 소개한 두 사례는 신부가 실제로 누구인지를 그보다 훨씬 잘 드러내 보여준다. 그들은 콜베 신부처럼 성스러운 존재일 수도 있고, 코스 신부처럼 타락한 존재일 수도 있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탁월한 가톨릭신학자 가운데 하나인 한스 큉은 ‘교회란 무엇인가’에서 교회를 “순결한 창녀(casta meretrix)”라는 상징어로 표현했다. “거룩함과 죄많음은 교회의 양면”이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다. 신부도 “순결한 창녀”다. 거룩함과 죄많음이 성직자들의 양면이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신부와 수녀는 어떤 사람이며 왜 독신으로 사냐고 물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신부’를 보다 보편적 용어인 ‘사제’로 바꿔 질문에 대한 답을 차례로 찾아보려 한다.

사제는 누구인가

구약성서에 ‘제사장’으로 표현된 사제는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인’이다. 그런데 창세기에는 제사장이 나오지 않는다. 이 시기에는 카인과 아벨, 노아, 아브라함처럼 누구나 신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모세를 따라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후 모세의 형인 아론이 최초의 제사장이 되었다. 죄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 신에게 제사를 지내줄 ‘중개인’이 필요하다는 의식이 싹텄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제사를 지내면서 사람들의 죄를 신에게 대신 고해하고, 또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신과 인간의 관계를 올바로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때문에 오직 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가 언약궤에 피를 뿌릴 수 있었다. 모세의 시대부터 솔로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사장들은 ‘성막’이라는 천막을 치고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은 뒤부터는 그곳에서 제례를 행했다. 그러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고 40년 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로마인들이 성전을 파괴하자 사제직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기독교에서 사제는 이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제사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더 이상의 제사와 제사장이 필요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유대교로부터 내려오는 낡은 사제제도와 제사방식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새로운 사제제도와 제사방식이 요구되었다. 모든 신앙인이 사제인 ‘만인사제직’과 성찬식이 그것이다. ‘일반사제직’이라고 번역되는 만인사제직은 신약성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베드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베드로전서 2:9)라고 가르쳤고, 요한계시록 1장 6절, 5장 10절에는 일반 신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들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우리 모두가 이미 사제입니다”라고 선포할 때 인용한 구절이기도 하다.

요컨대 신약성서에서는 오직 예수만이 영원한 제사장이다. 때문에 백성과 구분되고 그들을 지배하는 사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예수의 십자가 사건만이 ‘영원한 단 한 번’의 제사이다. 때문에 성찬식을 제사라고 부른 일도 없다. 성찬식(예배)을 ‘제사’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2세기경 널리 퍼진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didache)’을 비롯한 유스티누스, 이레네우스와 같은 교부들의 가르침에서부터였다. 또 백성과 구분되는 의미로서 사제(sacerdos) 또는 대사제(summus sacerdos)라는 이름을 기독교 안에 끌어들인 것도 3세기 이후 테르툴리아누스와 히폴리투스와 같은 교부들에 의해서였다. 이것이 고대교회에 제도적 확립을 가져온 주춧돌이 되었지만 중세교회에 숱한 부작용을 낳은 성직주의(clericalism)의 씨앗이 되었다.

기독교사를 살펴보면 예수와 사도들, 그리고 사도교부들은 ‘제사’ ‘사제’ ‘제사장’ ‘성직자’ ‘교회의 권위’와 같은 용어들의 사용을 꺼렸다. 그 이유는 이 같은 용어들이 유대교 이래 지배관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제’나 ‘제사장’을 대신할 새로운 용어가 고안되었는데 그것이 ‘섬김’ ‘봉사’ 또는 ‘종’ ‘집사(執事)’를 뜻하는 디아코니아(diakonia)다. 본디 ‘식탁에서 시중들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던 그리스어인데, 신약성서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예수는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누가복음 22:27)라고 선언하며 제자들에게도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쳤다.(누가복음 12:37, 17:8, 요한복음 12:2 등)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본을 보이며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한복음 13:14)라고도 교훈했다. 이것은 유대교(또는 구약성서)에서 사제가 히에레우스(hiereus), 곧 ‘신을 섬기는 자’인 것과는 달리, 기독교(또는 신약성서)에서 사제는 디아코니아, 즉 신을 섬기는 자일뿐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자’ ‘이웃에게 봉사하는 자’임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신부란 어떤 사람인가라는 이 회장의 물음에 대한 예수의 답변이기도 하다.

수녀는 누구인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

수녀는 가톨릭교회에 속한 여성 수도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1947년 사해의 북서쪽 연안에 있는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문서(死海文書)를 통해 유대교의 일파인 쿰란교단에도 수도제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수도사란 가톨릭이나 동방정교의 수도원에서 기도와 묵상, 그리고 고행을 통해 수행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들은 성직의 지위인 사제품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에 따라 ‘성직수사’(또는 수사신부)와 ‘평수사’로 구분된다. 수도사의 생활방식은 각 수도회에 따라 다양하지만 수사와 수녀를 불문하고 이들은 공통으로 청빈(淸貧·사유재산의 포기), 정결(貞潔·독신생활), 복종(服從·수도회의 상급자에 대한 절대적 복종)의 3가지 원칙적인 덕목을 준수해야 한다.

필립 샤프의 ‘교회사’에 의하면 최초의 수도사는 성 안토니우스(251~356)이다. 그는 기품 있는 콥트족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죽자 물려받은 거대한 토지와 막대한 부를 모두 주민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285년에 이집트의 외딴 사막으로 나가 금욕과 수도 생활을 했다. 짐승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고 곡식과 소금만을 먹으며, 대부분의 시간 동안 기도와 고행 그리고 환상 속에서 사탄과 싸우며 홀로 살았다. 가끔 알렉산드리아로 나와 설교를 했는데 당대 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이교도들까지도 탄복시켜 ‘황야의 별’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말년에는 홍해 부근의 콜짐 산 동굴에서 살았는데 이곳에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간직한 ‘성 안토니우스 수도원’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기독교 최초의 수도원이다.

최초의 수녀원은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이 세웠다. 힐데가르트는 독일 라인헤센 지역의 베르메스하임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의 계시를 받았고 8세에 수도원에 들어갔다. 교육을 받은 후 10대 중반에 베네딕트회 수녀가 되어 38세에 수도원장이 되었다. 이후 그녀는 미술가, 작가, 시인, 작곡가, 철학자, 언어학자, 자연학자, 의사, 약초학자, 카운슬러, 예언자 등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중세시대 여성의 지위는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수녀는 어디까지나 남성 성직자의 보조 역할이었고, 모든 수녀원은 수도원의 부속기관이었다. 힐데가르트는 어느날 또 한 번 신의 계시를 받고 수녀들만의 수도원을 만들려고 작정했다. 수녀원의 설립은 무엇보다도 수녀들이 남성인 신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신을 영접할 자격이 있음을 주장하는 의미를 지녔다. 당연히 많은 반대와 압력이 있었다. 하지만 예언자로서 얻은 명성과 경제력을 확보한 힐데가르트는 후원자의 도움을 얻어 1147년부터 1151년 사이에 루페르츠베르크에 역사상 최초의 수녀원을 설립했다.

신부와 수녀는 왜 독신인가

당신도 알다시피 신부와 수녀가 독신으로 사는 목적은 하느님과 이웃을 더 진실하게 섬기기 위해서다. 여기에는 성서적 근거가 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고자 된 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 된 자도 있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태복음 19:12)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는 예수의 표현법이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권유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고린도전서 7:8~9), “그러나 장가가는 것도 죄짓는 일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는 것도 죄짓는 일이 아니되 육신의 고난이 있으리니”(고린도전서 7: 28), “그러므로 결혼한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한 자는 더 잘하는 것이라”(고린도전서 7:38)라고 교훈했다. 역시 강요가 아니라 권고다. 때문에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는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하지 않았고, 중세교회도 독신으로 지낼 능력이 없는 성직자에게는 법적으로 결혼을 허용했다.

그러자 문제가 생겼다. 가장 큰 고민거리는 성직자들의 성적문란, 축첩, 그리고 교회세습 문제였다. 그래서 독신제도가 가톨릭교회에 도입되었다. 독신제도는 107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회개혁을 위한 조치로 27개조의 교황칙서(Dictatus Papal)를 내림으로써 처음 출현했고, 1123년 교황 칼리스투스 2세가 개최한 제1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회법으로 선포되었다. 이 제도의 근본 취지는 교회재산을 사적으로 유용하고 교회재정을 약화시키는 원인을 제거함에 있었다. 그 결과 성직 매매의 원인을 제공해 온 주교좌성당의 교회세습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성직자들 사이에 이미 만연했던 성적 문란과 축첩 문제는 독신제도가 공포된 후에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교회의 고민거리가 되었다. 최악의 사례가 1492년부터 1503년까지 재위한 교황 알렉산더 6세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스페인 발렌시아 대주교인 알폰소 보르하와 그의 친여동생 호아나 사이에 근친상간을 통해 태어났다. 10대에 이미 문란한 성관계로 여러 명의 사생아를 낳은 그는 1445년 아버지가 교황(칼리스투스 3세)이 되자 발렌시아 대주교직을 세습했다. 이후 돈으로 추기경들을 매수하여 1492년에 교황에 올라 17세가 된 아들 세사레를 다시 발렌시아 대주교로 임명하고, 15세인 둘째 아들 후안은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바티칸에는 교황의 첩들이 많았지만, 그는 미모의 소녀들, 수녀들,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딸 루크레시아와도 내연의 관계를 맺었다.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른 성직자와 수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군주론’의 저자이자 당시 피렌체의 정치가였던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는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과 그 성직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우리는 참다운 종교를 잃었으며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독신주의의 중요성?

여기에서 잠시 생각해보자. 오늘날 미국이나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가톨릭교회가 고수하고 있는 독신주의에 대한 논란이 매우 뜨겁다. 쉴 사이 없이 폭로되는 성직자들의 아동 성학대가 직접적 원인을 제공하고 있지만 그밖에도 문제는 많다. 20년 동안 수도사로 살며 성직자들의 성습관을 연구해온 리처드 사이프는 ‘비밀의 세계: 성욕과 독신 추구’에서 사제들 가운데 대략 20%가 여성과 성관계를 가진 경험이 있고, 8~10%는 여전히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20% 정도가 동성애 지향적이며, 그 가운데 4%가 어린아이와 관계하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밝혔다. 예수회 사회학자 조셉 피처 신부는 독일 사제들의 30% 이상이 여성과 성적관계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연히 가톨릭교회 전반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일의 시사지 ‘슈테른’에 실린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 가톨릭 신자들의 거의 5분의 1이 성추행 스캔들 때문에 교회를 떠날 것을 고려하고 있으며 독일인 중 단지 17%만이 교회를 권위 있는 기관으로 신뢰한다고 한다. 가톨릭 사제의 수도 급감하고 있다. 독일의 ‘데페아(DPA)’ 통신은 “세계적으로 10만~15만명이 결혼을 하려고 성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이 같은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 대응을 하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인물이 2006년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밀링고 전(前) 잠비아 대주교다. 그 자신 결혼을 한 밀링고는 “현재 15만명에 달하는 결혼한 가톨릭 사제와 교황청이 화해를 모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라며 교황청을 압박했다. 이어서 “사제의 결혼과 가정 형성을 통해 가톨릭교회가 현재 직면한 위기를 타개해 나가야 한다”라고 사제들의 결혼을 가톨릭 성직자들의 성추행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2009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가톨릭 전통에 따른 독신주의 선택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한다”고 선포했다. 이것이 가톨릭 신부와 수녀들이 여전히 독신으로 사는 이유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독신생활이 예수와 사도들의 권고이지 명령이 아니라면 가톨릭교회도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독신제도의 근본취지가 중세교회의 재산보호에 있었다면 지금도 과연 그 제도가 필요할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제의 본분이 신과 이웃을 섬기는 일이라면 오늘날 독신주의가 과연 이 본분에 합당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김용규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과 튀빙겐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영화관 옆 철학카페’ ‘데칼로그’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철학카페에서 시읽기’를 썼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은 신과 관련된 서양철학과 신학의 진수를 담고 있다.

김용규 철학자·‘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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