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1973년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오른쪽), 저우언라이 총리와 함께 미·중 수교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양국은 1979년 수교했다. ⓒphoto 조선일보 DB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1973년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오른쪽), 저우언라이 총리와 함께 미·중 수교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양국은 1979년 수교했다. ⓒphoto 조선일보 DB

“북이든 남이든 코리안들은 감정적으로 충동적인(impulsive)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충동적이고 호전적인 사람들이 사건을 일으켜서 우리 두 나라(미국과 중국)를 놀라게 하지 않도록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한반도를 우리 두 나라가 갈등하는 장소로 만드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비이성적인 것이다. 한 번은 일어났지만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1972년 2월 21일 오후 2시40분 중국 수도 베이징 중남해(中南海)의 마오쩌둥(毛澤東) 거주지 풍택원(豊澤園). 마주 앉은 네 사람은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대통령안보보좌관, 병색이 짙은 79세의 마오쩌둥 주석,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였다. 닉슨은 마오와의 첫 회담이 이뤄진 사흘 뒤인 24일 조어대(釣魚臺) 국빈관에서 있었던 저우언라이와의 회담 석상에서 “코리안들은 충동적인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닉슨은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1953년 나는 부통령으로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승만(한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다. 당시 이승만은 북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더 이상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유쾌한 말을 했다. 내가 그 말을 전달했을 때 이승만은 나에게 소리를 질렀던(cry out)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미 정부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는 지난 2001년 4월, 1971년에 시작해서 1972년까지 세 차례 이어진 닉슨과 키신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사이의 대화록을 비밀 해제했다. 1971년 7월 파키스탄을 방문 중이던 키신저가 복통을 이유로 호텔에서 쉬겠다고 해놓고 전세기편으로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함으로써 이뤄진 미국과 중국 사이의 세기의 대화 내용이 30년간 비밀로 묶여 있다가 공개된 것이다. 이 대화록은 미 정부가 비밀 보관과 해제를 제대로 하는지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민간단체인 존스홉킨스대학의 내셔널 시큐리티 아카이브의 웹페이지(www.gwu.edu/~nsarchiv/NSAEBB/NSAEBB66/)에 PDF 파일로 보존돼 있다.

이 비밀문서에 따르면 1971년 7월 인민대회당에서 이뤄진 키신저와 저우언라이 사이의 대화, 그해 10월의 2차 대화, 이 대화의 결과로 성사된 1972년 2월의 닉슨과 마오쩌둥의 미·중 정상회담 등 회담 때마다 한반도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이들 회담 석상에서 한반도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일 것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쪽은 중국 측이었다. 미국 측은 수동적으로 응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이 회담을 통해 주한 미군의 철수 문제와 철수 이후 일본 자위대 군사력으로 한반도 안보를 담당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 유엔에서 남북한을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약속했다.

1971년 10월의 키신저·저우언라이 2차 회담에서는 저우언라이가 김일성으로부터 전달받은 8개항의 요구조건, 즉 주한 미군 완전 철수와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무기 제공 중단,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정찰 활동 중단, 한·미·일 합동 군사훈련 중단, 일본 군사력의 한반도 진출 반대, 미국의 남북한 협상 개입 중지, 유엔에서 남북한 동등 대우 등이 키신저에게 전달됐다. 키신저와 저우언라이 사이에 주로 이뤄진 1971~1972년 미·중 비밀회담 이후 한·미 관계와 미·중 관계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회담 기간 중 중국은 북한의 김일성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회담 내용을 전달해 주었으나, 미국 측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 정부에 사전 협의는커녕 사후 통보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당시 미·중 간 관계 변화를 감지한 박정희 대통령이 여러 차례 한·미 정상회담을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은 이때부터다. 키신저와 저우언라이 사이에 이뤄진 비밀 대화록의 녹음 테이프를 다시 돌려보자.

저우언라이 남조선에는 당신들의 군대가 있다. 조선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하면 남조선 군대도 베트남에서 철수해야 할 것이다.

키신저 그런가.

저우언라이 우리는 1958년에 조선반도에서 군대를 자발적으로 철수했다. 당신들은 ‘중국군이 압록강 바로 너머에 있으며, 언제든 쉽게 되돌아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압록강을 넘는 것은 내정간섭이 된다. 우리와 북조선 사이에는 이 문제에 관한 조약이 체결돼 있다.

… (중략) …

키신저 우리는 이미 2만명의 주한 미군을 감축했다.

저우언라이 그래도 아직 4만명 이상이 주둔해 있다.

키신저 약 4만명이 있다. 감축 과정은 극동의 정치적 관계가 개선되는 한 계속될 것이며, 몇 년간의 감축 과정 뒤에는 극히 소수가 남거나 전혀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저우언라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주시할 것이다. 당신네들이 그렇게 큰 부담을 지고, 또 군사비를 지출해가면서 얻는 결과는 무엇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네들이 일본을 보호해 왔기 때문에 일본은 군사비에 대해 아주 적은 지출만 하면서 경제력을 급속도로 강화해올 수 있었다.

… (중략) …

키신저 총리, 만약 한반도에 일본군들이 주둔한다면 당신네들은 더 불안해지지 않을까.

저우언라이 우리는 외국 군대가 조선반도에 주둔하는 데 반대한다.

키신저 나는 한반도 문제 해결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남한에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이 우리 외교정책의 영구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철수에 관한 시간표는 닉슨 대통령이 논의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이상은 1971년 7월 9일에 이뤄진 대화다. 한반도를 비롯해 미국과 중국의 이익이 충돌하는 문제에 대한 광범위하고 솔직하면서도 본격적인 대화는 1971년 10월 키신저가 베이징을 두 번째 방문함으로써 진행됐다. 10월 22일 오후 4시15분에 시작해서 8시28분까지 진행된 대화 내용 가운데 한반도와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저우언라이 현재에도 판문점에서 남북 조선 간에 정전회담이 이뤄지고 있고, 비무장 지대가 존속하고 있다. … 그 회담에서 남측 주대표로는 미국이, 부대표로는 한국이 참석하고 있다. 북측에서는 북한이 주대표로, 중국이 부대표로 참석하고 있다. 평화협정은 아직 체결되지 않았고, 상황은 불안하며, 서로 상대방 영토에 대한 침공과 갈등이 때때로 빚어지고 있다.

… (중략) …

키신저 우리는 우리의 맹방(한국)을 ‘괴뢰(puppet) 정부’로 묘사한 문서를 그냥 두고는 우리의 논의를 진전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 나는 지난 7월 총리와 회담하기 전에는 솔직히 한반도 문제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우리의 대화는 이미 시작된 남북한 접촉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에게 자신들을 괴뢰라고 부르는 정부를 향해 더 다가가라고 충고하기가 극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두 개의 코리아가 대화한다면 서로 동등한 베이스에서 대화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 (중략) …

저우언라이 최근에 있었던 남북 조선 두 개의 적십자사 회담은 동등한 베이스에서 이뤄졌다. 어느 쪽도 상대방을 ‘괴뢰 적십자사’라고 부르지 않았다. 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중략) …

키신저 총리가 잘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우리는 올해 초 북한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날짜는 기억하고 있지 않다. 1월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연락은 루마니아 부통령을 통해서 왔다. 우리는 매우 은밀하게 대답을 보냈는데 회답은 없었다. 우리는 이에 대해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우리의 태도가 원래부터 그들에게 적대적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 만약 우리(미국과 중국)의 목표가 현재의 한반도 상황 해결을 위한 영구적인 법적 제도의 마련이라면, 우리는 당신들과 그 작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 우리는 적대감을 되살아나게 할 가능성이 있는 그런 법적인 제도에는 관심이 없다. 당신의 목표가 한반도 주둔 미군 감축이라면 내가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우리의 기본 정책은 어떤 경우든 국제적인 작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저우언라이 만약 당신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남조선 주둔 미군의 철수라면, 당신들의 또 다른 목표는 남조선 주둔 미군을 일본 군대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은가.

키신저 총리는 늘 나보다 한 걸음 앞서 간다. 일본 자위대를 주한 미군과 대체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 미국은 일본의 군사력 팽창에 반대하고 있다.

… (중략) …

키신저 … 만약 우리의 목표가 한반도에 안정을 가져다 주고,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며, 다른 세력이 이 지역으로 팽창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중국과 미국은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표가 현재 남한에 존속하고 있는 정부를 위험하게 하고,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기 쉽게 만들어서, 남한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다른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우리가 한반도를 위해 영구적인 법적 장치를 만들어주기 위해 당신들과 협력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저우언라이 유엔이 조선에 대해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은 자체 방어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다. 조선은 남조선이 항상 경계선을 확대하려 하기 때문에 남조선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

키신저 나는 총리에게 미군이 남한에 주둔해 있는 한 남한이 군사분계선을 넘으려는 어떤 기도에 대해서도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할 수 있다.

… (중략) …

저우언라이 나는 조선 반도의 ‘두 개의 국가’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한반도가 영구히 둘로 분단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조선 인민들은 통일을 바라고 있으며, 평화적으로 통일을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 … 조선 반도의 궁극적인 평화통일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달성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연구해보지 않았지만 조선 반도는 인구가 겨우 4000만에 불과하기 때문에 통일돼야 한다.

… (중략) …

키신저 내 생각은 한반도의 양측은 동등하다는 것이며, 어느 쪽도 통일에 대해 배타적인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 만약 군사적인 압력이 북측으로부터 온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저우언라이 북이 남을 공격한다면 어떻게 되느냐는 말인가.

키신저 그렇다.

저우언라이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커다란 부담을 떠안게 될 것이다.

키신저 북한이?

저우언라이 그렇다, 북한이.

… (중략) …

키신저 우리는 우리의 영향력을 우리의 친구들이 군사적 모험주의의 길을 걷지 않도록 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71년 7월과 10월, 1972년 1월에 이뤄진 세 차례의 회담은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의 세기적인 중국 방문으로 연결됐다. 중남해에서 이뤄진 닉슨과 마오쩌둥 간의 회담은 마오의 건강이 나빠 몇 마디 주고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짧은 회담에서도 한반도 문제는 거론됐다.

닉슨 주석과 대만, 베트남, 한반도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

마오쩌둥 골치 아픈 일에 나는 끼어들고 싶지 않다. 화제가 철학적인 것이었으면 좋겠다. … 우리가 일본이든 남조선이든 위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닉슨 우리도 어떤 나라도 위협하지 않을 것이다.

마오의 건강 문제로 닉슨은 저우언라이와 마무리 회담을 해야 했다. 나중에 미·중 수교로 이어진 닉슨과 저우언라이 사이의 최종 담판은 1973년 2월 23일과 24일 조어대 국빈관과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됐다.

저우언라이 어떻게 북과 남의 접촉을 촉진할 것인가. 어떻게 평화통일을 촉진할 것인가. 그 문제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닉슨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양국이 우리의 동맹국들을 억지하기 위해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닉슨은 자신이 부통령 시절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하러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가 화난 이 대통령이 크게 소리를 질렀던 기억을 저우언라이에게 이야기 했다.)

저우언라이 당신이 묘사한 이승만의 성격은 우리가 듣던 것과 비슷하다.

닉슨 무엇과 비슷하다고?

저우언라이 몇 년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 (중략) …

닉슨 총리는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른바 닉슨독트린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겠다. 우리는 그 독트린에 따라 한반도 주둔 미군을 감축 중이다. 한반도 문제는 일본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대만 문제와는 다르다.

… (중략) …

저우언라이 우리는 당신네 군대가 조선반도에서 점차적으로 감축하는 데 감사하고 있다.

닉슨 대통령이 당시에 추진한 닉슨독트린과 미·중 화해라는 국제정치적 환경의 커다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자체 핵무기 개발이라는 독자적 방위 프로그램에 착수하는 해법을 모색했다. 박 대통령은 닉슨 대통령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유재흥 당시 국방장관에게 표출한 일이 있다. 국제정치학자 조철호 교수가 쓴 ‘한국 핵정책의 이상과 현실’이라는 저서에는 박 대통령이 유재흥 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돼 있다.

“닉슨이 미군 뺀다, 그놈 자식, 하고 말이야. 아주 욕도 하시고 괘씸하게 생각….”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리에 추진한 핵무기 개발 계획은 나중에 좌절됐다.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북한이 세 차례의 핵 실험을 해서 한국과 주변국은 물론 미국도 위협받고 있는 형세로 바뀌었다. 이제 공은 한국 정부에 넘어왔다고 생각해야 한다. 닉슨독트린과 미·중 화해로 한국의 안보에 불안정성이 높아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극단적인 처방을 마련했다. 닉슨·마오 회담으로부터 40년이 지나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 정부는 북한 핵실험에 어떤 대응책(Balancing)을 마련할 것인가?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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