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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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학 연세대 교수(의료법윤리학)는 오랫동안 죽음을 연구해 왔다. 연세대 의과대학 종합관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 들어서자, ‘죽음’ ‘웰다잉’ ‘노인’ 관련 영화와 책들로 꽉 찬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관련 영화 DVD만 어림잡아 50편은 돼 보였다. 그가 꼽은 최고의 ‘존엄한 죽음’ 관련 영화는 ‘밀리언달러 베이비’. 엠마 톰슨 주연의 영화 ‘위트’도 수작으로 꼽는다.

“‘위트’는 우리나라에서 윤석화 주연의 연극으로도 만들어졌어요. 말기암에 걸린 영문학 교수 비비안(엠마 톰슨)은 존 던 전공자입니다. 존 던(John Donne)은 17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성직자로, 콜레라에 걸려 늘 죽음에 직면했던 사람입니다. ‘죽음아, 너는 죽으리라’는 존 던의 시구처럼 비비안도 늘 죽음을 바라봤던 사람이에요. 존엄사에 대한 시선이 그만큼 깊죠.”

이일학 교수는 2013년부터 사전의료의향서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다. 의대교수로서 특이한 행보다. 2010년 정부과제인 ‘생명윤리정책연구센터’를 담당하면서 사전의료의향서 사업으로 확대해 진행하게 됐다. 이일학 교수에게 의사들이 바라보는 연명치료, 연명치료 관련 법률을 둘러싼 쟁점 등을 물었다.

- 의대 교수로서 사전의료의향서 사무총장을 맡게 된 계기는. “개인적으로는 죽음이 무서웠다. 죽음을 정면으로 직면해보고 싶었다. 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당시 형식적인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회의감이 든 적이 있다. 이미 심장이 멎은 환자인데, 가족들이 임종을 보게 하기 위해 환자의 심장을 인위적으로 뛰게 하는 거다. 교과서적으로 하려면 심장을 5㎝ 깊이로 압박해야 한다. 말이 5㎝이지 굉장히 깊다.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환자의 갈비뼈를 부러뜨린 적도 있다.”

- 의사들은 대부분 연명치료 중단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으로 안다. “의사들을 대상으로 연명치료 관련 인터뷰 및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연명치료에 대한 견해는 의사마다 다르지만 모든 의사들은 기본적으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 ‘내가 치료를 중단해서 환자가 죽는다’는 부담감이다. 환자와 의사는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환자에게는 ‘삶의 질이 보장된 시간’이 의미 있지만 의사에게는 ‘환자의 생존시간’ 자체가 중요하다. 의사의 결과이자 성공 여부이기 때문이다.”

- 존엄사와 안락사에 대한 경계가 애매모호하다. 현재 국내에서 입법화 추진 중인 존엄사는 어디까지로 봐야 하나. “존엄사는 안락사와 철저히 구별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존엄사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이다. 미국의 경우 존엄사 개념이 없다. 암 진단 후 ‘치료 거부’라고 하면 치료를 거부해서 죽음을 택한 것이지, 존엄사를 택한 것은 아니다.”

- 그렇다면 연명치료의 경계는. “그게 문제다. 김재원 의원이 발의한 법안에서 연명치료란 환자 삶의 질을 떨어뜨리면서까지 심장과 폐의 기능을 유지하는 치료를 말한다. 인공호흡기나 혈액투석기 같은 기술의존적 치료 말이다. 환자가 힘들어 할 때 진통제를 놔 준다든지 자세를 바꿔주는 등의 치료는 연명치료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 연명치료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죽음을 터부시하는 분위기다. 죽음은 사회적으로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니다. 통과된다고 세상이 크게 바뀌는 것도 아니고, 당장 추진해야 할 시급성도 없다. 그러다 보니 국회가 압박을 덜 받는 것 같다. 누군가 추진해 주면 좋지만 안 해도 그만인 이슈라고 할까. 연명치료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과 결부된 중요한 사안이라는 의식을 국회에서 가졌으면 좋겠다. 의료계 역시 마찬가지다. ‘이 법이 통과된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의구심과 회의가 만연하다.”

- 법이 통과되면 수혜자는 누군가. “장기적으로는 환자 자신이다. 그 다음은 가족이고.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장기화되면 환자 자신도 고통스럽지만 가족도 신체적·정신적·경제적으로 힘들다. 의료진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다. 지금까지는 어떤 제도에 의존하거나 의사결정 단계를 거치지 않고 의사가 임상적으로 연명치료를 결정하고 실시해 왔다. 의사들에게는 보라매병원의 망령이 계속 떠돈다. ‘나도 저 의사처럼 소송당할 수 있고, 처벌받을 수 있다’는 망령 말이다. 연명치료를 중단해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공식적인 제도와 절차가 필요하다.”

-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 한국인은 죽음에 대해 자기 결정권이 없다.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한국인의 삶의 방식과도 연관 있는듯한데. “의료 인문학을 하면서 ‘무엇이 좋은 죽음인가’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잘 살아온 사람이 잘 죽을 수 있다. 살면서 한 번도 자기 주장을 해본 적 없고, ‘내 삶이 소중하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이다’라고 주장해본 적 없는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도 수동적이다. 한국의 어머니들을 봐라. 평생 가족 뒷바라지만 하면서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참으면서 살아온 분들이 ‘죽을 때만큼은 내 맘대로 죽을란다’ 할 수 있겠나. 어느 날 몸이 불편해서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에 가 보라고 하고, 원인도 모른 채 자식들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환자 분은 나가 있으세요’라며 진단 과정에서 소외시키는 경우가 많다.”

- 다른 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영국은 환자 본인에게 직설적으로 병에 대한 정보를 주고 결정하게 한다. 서양은 대체로 가족이 아니라 본인의 의사를 중시한다. 중국이나 일본은 가족과 환자가 함께 상담하는 분위기다. 대만은 이 문제에 있어 대단히 앞서 있다. 의사가 환자에게 환자의 상황을 알려주면 환자가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도록 결정권을 준다.”

- 우리나라에서 사전의료의향서 작성 주체는 누구인가. “환자가 아니라 가족인 경우가 많다. 서울대학교병원에서는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경우에도 작성 주체의 99%는 가족이었다. 종합병원이 아닌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에서 작성하는 경우에는 환자 본인이 직접 작성하는 비율이 높다. 정확한 통계수치는 아직 없다.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한 환자에게 정보의 출처를 물어보면 80%는 미디어라고 답한다. 의사는 의향서에 대해 대체적으로 소극적이다. 법이 통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사전의료의향서를 취급하는 주체가 여럿이다. 캠페인 차원의 비영리기관, 보관료를 받고 사본을 보관해주는 영리기관, 종합병원 등. 각각 어떻게 다른가. “법적효력이 없다는 측면에서는 다 비슷하다. 하지만 취급 기관에 관계없이 모든 사전의료의향서는 의사의 연명치료 여부 결정에 많이 활용된다. 서식을 스캔해서 전자차트에 첨부하기도 하고. 2009년 김할머니 사건 이후로 연명치료 중단이 허용됐다고 봐도 된다. 법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한 문제가 남아있지만 말이다.”

- 사전의료의향서가 법적효력은 없으나 실질적으로는 효력을 발휘한다고 했다. 법적으로 제도화되면 뭐가 달라지나. “보상의 근거가 마련된다. 불필요하게 소비된 자원에 대한 보상 말이다. 이미 2013년에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서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권고’안이 만들어졌다.(권고안의 기본 원칙에는 ‘수없이 많은 생명과 건강에 도움을 준 의학과 의료가 오히려 임종 기간을 연장할 뿐인 사례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대목이 있다.) 대원칙은 있으나 다음 단계의 시행 지침이 마련되지 않은 거다. 의사들이 불안해 하는 부분이다.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제정되면 사전의료의향서 제공 및 등록기관이 공식적으로 생기고, 정부의 재정지원이 가능해지면서 대중화될 거다.”

- 좋은 죽음, 나쁜 죽음이란 뭘까. “좋은 죽음은 마지막 순간에 고통을 최소한으로 느끼면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하며 죽을 수 있는 죽음이다. 반대로 나쁜 죽음은 외로운 죽음, 아픈 죽음, 자기 뜻과 상관없는 죽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효에 대한 뒤틀린 인식이 좋은 죽음을 방해한다. 바람직한 효는 부모의 뜻을 미리 헤아려 순종하고,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중환자실에서의 죽음을 보자. 발가벗겨져서 24시간 시끄러운 곳에서 짐짝 취급 당하며 돌아가시게 하는 것이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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