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photo 조선일보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photo 조선일보

“양털 깎고 돼지 밥이나 주는 건 내가 원했던 삶이 아니다. 이 일로는 가족 먹여살리기도 벅차다. 다른 길을 찾아보자.”

경남도립 종축장(種畜場) 말단 열여덟 살 청년 신격호는 고민했다. 그는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함경북도에 위치한 명천국립종양장의 연수생으로 1년 동안 있었다. 사촌형 신병호의 도움으로 연수생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연수를 마치고 난 뒤 열여덟 살의 신격호는 한 살 어린 노순화와 결혼한다. 노순화는 그 무렵 집안이 상당한 부농이었고 부잣집 딸답게 배포도 컸다. 하지만 결혼 뒤에는 집안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결혼하고 나서 신격호는 경남도립 종축장에 기수보(技手補)로 취직한다.

끝까지 지켜낸 조센진의 긍지

기수보는 말단 중의 말단 맨 꼴찌 사원으로 양털을 깎거나 돼지 키우는 일을 맡는다. 가축의 털을 깎고, 오물을 치우고, 사료 주는 일로 사회생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신혼의 단꿈에 빠지지도 못했다. 당시 직장이었던 경남 종축장 근처에서 하숙을 했기 때문에 일하는 날에는 결혼하기 전과 다를 바 없이 혼자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격호는 하늘을 욕하고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바꿀 수 없었기에 그 환경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식민지 조선이 아니라 아예 일본 본토로 가서 당당하게 성공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진 돈이라곤 83엔. 그러나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1941년 봄, 드디어 신격호는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관부(關釜)연락선에 올랐다. 반드시 보란 듯이 성공해 가족들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다짐을 굳게 새겼다.

그러나 조선 젊은이 신격호에게 일본은 첫 만남부터 혹독했다.

“어이 조센진, 이리 잠깐 와 봐.”

“왜 그러십니까?”

“오라면 올 것이지 잔말이 많아!”

신격호는 시모노세키항에서 특고(特高) 형사, 말하자면 사찰계 형사에게 끌려갔다. 특고라면 일제강점기 사상범을 잡아내던 악명 높은 정보경찰이다. 항만 한쪽 구석의 조사실에서 신격호는 소지품과 가방을 샅샅이 수색당한 뒤 집요하게 신문을 받았다.

“조선 놈이 왜 일본에 건너왔나?”

“일본에서 공부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공부하러 왔다면 누가 잘 봐줄 것 같은가? 너, 공산당에 가입하려는 거 아닌가?”

“공산당이라고요? 의심 가는 데가 있으면 고향인 울산 경찰서에 연락해 보세요. 절대로 제가 거짓말하는 것 아닙니다.”

“역시 순순히 털어놓지 않는군. 네놈 잘 걸렸다. 따라와!”

신격호는 별실로 끌려가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그러나 없는 일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두어 시간 조사를 받고 풀려나왔다. 그 시절 일본 특고 형사라면 힘없는 조선인 한두 명쯤 고문하다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 없는 ‘절대 권력자’들이었다.

그 무렵 일본은 사상 통제의 고삐를 갈수록 조여 갔으며 특히 공산주의자나 그 동조자에 대한 탄압은 엄혹했다. 신격호는 식민지 지식청년의 분위기를 풍기는 외모와 살아 있는 눈빛 때문에 공산주의자로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사업가로서 성공했지만 주위의 끈질긴 요청에도 끝내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았다.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게 기업 경영에 훨씬 유리했겠지만 그는 끝까지 한국 국적을 고집했다. 그 까닭은 혹독했던 일본과의 첫 대면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격호는 1922년 10월 4일 경남 울산군 상남면 둔기리 377번지에서 태어났다. 1921년에 태어났는데 1년 늦게 출생신고를 했다는 설도 있다. 아버지 신진수와 어머니 김순필은 장남인 신격호를 포함해서 5남5녀, 모두 10남매를 두었다. 본디 11남매지만 한 명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 신진곤은 명문 양반 가문 영산(靈山) 신씨(辛氏) 집안 출신이다. 신격호가 태어날 무렵 그는 얼마 안 되는 논과 밭을 가진 농사꾼이었다. 슬하에는 장남 신진걸과 차남 신진수, 두 명을 두었다. 신격호의 큰아버지 신진걸은 어릴 때부터 이재에 밝았다. 나중에 부동산으로 돈을 벌어 지방 유지가 되었다.

신진걸은 신격호의 재능을 발견하고 어릴 적부터 많은 지원과 애정을 쏟았다. 그는 조카 신격호를 어릴 때부터 친아들처럼 대했다. 동생 신진수에게 “격호는 나중에 뭐가 돼도 크게 될 아이니까 공부 잘 시켜야 한다”고 자주 당부하곤 했다. 신격호의 집안은 논과 밭을 조금 가지고 있던 농사꾼 집안이었다. 아버지 신진수는 재산을 불리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고, 향교나 서당에 가거나 종가의 대소사를 챙기는 데 더 신경을 썼다. 식구가 열 명이 넘었던 신격호 집안은 열심히 일해야 겨우 먹고사는 정도였다.

신격호는 남들보다 이른 시기인 7살 되던 해 1929년 4월, 4년제 삼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3년 4월에는 삼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6년제인 언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학교 성적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언양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어 학업을 중단할 뻔했으나 큰아버지 신진걸의 도움으로 울산농업보습학교에 진학한다.

1945년 8월 15일 항복선언 직후 일왕 히로히토가 맥아더 사령관과 서있는 모습. ⓒphoto 조선일보
1945년 8월 15일 항복선언 직후 일왕 히로히토가 맥아더 사령관과 서있는 모습. ⓒphoto 조선일보

첫 사업 시련 속 광복을 맞다

신격호는 일본에서 대학교를 다니기 위해 먼저 와세다중학 야간학부에 편입했다. 식민지 출신 유학생에게 일본은 얼마든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개방적인 정책을 폈다. 와세다중학을 졸업한 뒤에는 와세다고등공업학교(현재 와세다대학교 이학부) 야간부 화학과에 들어갔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으나 이공계열 학생은 징집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야간학부에 다니며 낮에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신격호는 책읽기를 좋아했다. 일과 학업으로 바쁜 나날 속에서도 시간을 쪼개 헌책방으로 향했다. 돈이 없어 책방에서 선 채로 책을 읽었다. 때로는 푼푼이 모아 책을 샀다. 돈이 생기면 그렇게 책을 사는 게 소박한 즐거움이었다. 그의 본디 꿈은 작가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장남으로서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신격호는 작가의 꿈을 접는다. 그러나 이때의 작가수업을 통해 그는 뛰어난 카피라이터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뒷날 일본 롯데껌의 대표 홍보문구 ‘입 속의 연인’이라는 카피도 신격호가 직접 만든 것이다. 덧붙여 롯데리아 히트상품 ‘리브샌드’도 그가 지은 것이다.

주경야독하며 미래의 꿈을 쌓아가던 어느 날, 일하던 가게에서 유리창을 닦다가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유리창이 방바닥으로 떨어져 와장창 박살난 적이 있었다. 신격호는 다다미방 바닥에 박힌 유리조각들을 밤늦게까지 하나하나 줍다가 그만 가게 주인으로부터 도둑으로 오해를 받았다. 주인은 되먹지 못한 조센진이라며 심한 욕설을 퍼붓고는 “지저분한 조센진! 당장 나가”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얼굴이 붉어진 신격호는 곧바로 짐을 챙겨 뛰쳐나오고 싶었으나 입술을 피멍이 들도록 꽉 깨물며 참아냈다.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 올라가 창문을 닦다가 넘어져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밤늦게까지 다다미에 박힌 유리조각을 하나하나 빼낸 것은, 이대로 두고 가면 혹시 이 집 아이들이 발을 다칠까 싶어서 그랬습니다. 유리창 값은 그간 받았던 임금으로 갚겠습니다. 날이 밝으면 떠나도록 해주십시오.”

그는 결코 비굴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주인이 더 욕설을 퍼부으면 한밤중이지만 떠나 버릴 생각이었다. 그 양심적 행동과 진정한 사과에 주인은 감동하여 얼굴 표정을 누그러뜨렸고, 자신의 지나친 질책을 용서하라며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이렇게 신격호의 고달픈 일본생활은 이어져 나갔다.

신격호는 하나미쓰(花光)라는 사람이 운영하던 고물상과 전당포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하나미쓰가 신격호를 찾아왔다. 그는 부지런하고 모든 일에 열심인 신격호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자네, 군수용 커팅오일 사업 한번 해 보지 않겠나? 전쟁통이라 커팅오일이 모자라서 못 팔 지경이야. 내가 직접 하긴 그렇고, 적당한 사람을 찾다 보니 자네 생각이 계속 나더구만. 공장을 차린다면 내가 5만엔 정도는 도와주겠네. 판매할 곳도 내가 알아봐주지.”

커팅오일이란 기계를 갈고 자르는 데 사용하는 선반용 기름이다. 회사원 월급이 80엔 하던 시절에 5만엔은 엄청난 돈이었다. 더 대단했던 건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그토록 큰 금액을 아무 담보 없이 그냥 빌려주었다는 것이다. 신격호는 하나미쓰의 제안에 크게 감격했다.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네, 해보겠습니다. 꼭 성공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신격호는 하나미쓰에게 5만엔을 지원받아 오모리(大森) 지구에 작은 공장 건물을 얻었다. 그러나 공장을 제대로 가동해 보기도 전에 미군기의 폭격으로 공장이 모조리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어 하나미쓰에게 한 번 더 돈을 빌려 주오선(中央線)의 하치오지(八王子) 구역에 건물을 임대해 커팅오일을 제조했다. 하루에 4시간밖에 못 자는 강행군이었고 물건은 만들자마자 바로바로 팔려나갔다. 신격호는 이제 진짜 사업가가 된 것만 같아 가슴이 뿌듯했다. 그러나 그에게 운명은 가혹하기만 한 것이었던가. 공장을 가동한 지 1년 반쯤 지난 어느 날, 또다시 미군기의 폭격으로 공장이 불타버린 것이다. 신격호는 좌절했다.

‘하늘이시여,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왜 저에게 두 번씩이나…. 이게 정녕 하늘의 가혹한 뜻이란 말인가.’

주위에서는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부추겼다. 때마침 1945년 광복이 되어 더는 일본에 눌러앉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신격호에게 큰돈을 빌려주었다가 모두 잃게 된 하나미쓰도 “이것도 운명이니 자네도 살길을 찾아라. 나는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고 살겠다”며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신격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하나미쓰에게서 받은 은혜에 꼭 보답하고 싶었다.

우린 광복된 민족이야!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했다. 신격호는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을 하치오지의 폐허 속에서 들었다. 조국 광복의 기쁨은 물론 크나큰 감격이었지만, 이제 그에게 돌아올 것이라고는 하나미쓰 노인에게 빌려 쓴 6만엔 차용증서뿐이었다.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어이, 친구! 오늘부터 우린 광복된 민족이야.” 재일동포 친구들은 환호했다. 이제 귀국하자고 신격호에게 권유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신격호의 가슴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광복은 되었지만 고국에 돌아가도 가난뿐이다. 아버지 몰래 집을 뛰쳐나온 내가 성공하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가면 체면이 서지 않아. 어떻게든 일본에서 살아남아 승부를 걸어보자.”

더구나 6만엔이라는 거액의 빚을 갚지 않고 몰래 귀국한다는 것은 그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사업에의 의욕을 채찍질하는 독촉장이었다. 신격호는 반드시 사업으로 성공하리라 입술을 꽉 물고 결심을 단단히 굳혔다.

1946년에 와세다고등공업학교 화공학부를 졸업한 신격호는 도쿄의 스기나미구 오기구보에 있는 군수공장의 기숙사에다 사업장을 차렸다. 간판 살 돈도 없어, 버려진 천막 쪼가리를 찢어서 엉기성기 대충 간판을 만들고 붓으로 ‘히카리(光) 특수화학연구소’라고 썼다. 이곳에서 신격호는 재료를 모아다가 커다란 취사용 솥에 넣고 밤새도록 끓여서 세탁비누와 세숫비누, 포마드 등의 제품을 만들었다. 화학을 전공한 그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워낙에 생필품이 부족했던 시기여서, 신격호가 만든 비누나 화장품은 품질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겨우 솥단지 하나로 만든 가내수공업 규모의 공장에서 시작한 사업으로 1년6개월 만에 하나미쓰의 빚을 다 갚고, 그에게 집 한 채를 선물할 수 있었다.

1947년, 신격호는 인편에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편지와 어른 손바닥만 한 금덩이 2개를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 보냈다. 신격호의 부탁을 받고 금덩이를 전달해 준 사람은 마침 일본에 들렀던 독립운동가 정한경(鄭翰景) 박사였다. 정한경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승만·안창호·박용만 등과 함께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1919년 독립운동 임시위원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미국 월슨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제출했으며, 재미동포 성금 30만달러를 모아 상하이임시정부에 전달한 인물이다. 뒷날 그에게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내려졌다.

<다음 호에 중편 계속>

고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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