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와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 형제는 일제 식민통치 강점기에 민족언론, 민족교육, 민족기업을 일궈온 구국선각자이다. 선친으로부터 유복한 재산을 물려받아 오늘의 동아일보와 중앙중·고교, 고려대학교, 경성방직과 삼양사 등에 그들의 입지를 아로새겼다. 스스로 자본의 선용(善用)을 실증한 주역들이다.
인촌이 3·1독립만세운동 이듬해에 ‘민족의 대변지’로 창간한 동아일보는 일제하와 광복 후의 난세를 헤쳐가면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지켜온 교두보로서의 구실을 해왔다. 중앙중·고교와 고려대 역시 개교 100주년을 훌쩍 넘긴 대표적 민족사학으로 뿌리를 내려 숱한 인재를 배출해오고 있다.
수당이 창사한 삼양그룹은 정도, 신뢰경영을 실천하며 꾸준히 발전해 ‘생활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하는 기업’이라는 비전을 펼치고 있다. 화학 및 식품 소재, 패키징, 의약·바이오 사업을 중심으로 글로벌 진출, 고부가가치의 스페셜티 제품 개발 등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고도화하는 전략을 짜고 있다.
“이제는 변화 속도가 빨라져 미래 예측보다는 변화를 파악하고 대응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합니다. 사업 구조 고도화를 통해 성장하고, 기업 생존의 필수조건인 디지털 혁신을 추진해 글로벌 스페셜티 전략에 맞는 역량과 전문성을 키워나갈 것입니다.”(수당의 손자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
인촌은 1891년 10월 11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현 봉암리)에서 울산 김씨 지산(芝山) 김경중(金暻中)과 부인 장흥 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수당은 1896년 10월 1일 차남으로 태어났다. 인촌은 3살 때 용담, 평택, 동복 등지의 군수를 지낸 백부 원파(圓坡) 김기중(金祺中)의 양자로 출계했다.
200석을 1만5000석으로 ‘호남의 갑부’
이들 형제의 13대 선조가 뛰어난 유학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이다. 지산은 진산 군수를 역임했는데 이재에 뛰어난 자질이 있었다. 물려받은 땅 200석지기를 1만5000석으로 불렸다. 이런 지산은 ‘호남의 갑부’라는 소리를 듣는 재산가로서보다는 오히려 학문을 즐기는 선비로서의 면모가 뚜렷했다.
“증조부님께서는 서문에도 능했지만 우리 역사에도 조예가 깊으셨다고 합니다. 을사늑약 이후 망국의 기운을 실감하셔서 1907년 ‘조선사’ 편수작업에 착수하셨지요. 나라가 망할 지경이 되자 이 땅의 청소년이 우리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영영 민족혼을 잃게 될 것을 걱정하셨다고 합니다. 근 20년간 정성을 쏟아 17권 1질로 된 전집을 완간하고 각급 학교와 서원, 전국의 유지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셨지요.”(김윤 회장)
지산은 1908년 원파와 함께 영신학교(현 줄포초등학교)를 세우며, 기호중학교를 인수하여 인촌이 관장토록 하였는데, 이 학교는 후일 중앙중학교로 맥을 잇는다.
“아버지의 생가가 그대로 남아 있어 현재 연고자가 관리하고 있는데 앞으로 대대적으로 보수할 예정입니다. 물 없는 골짜기를 지나 낮은 언덕바지에 위치해 있고 뒤로는 나지막한 동산이 둘러 있어 시원히 내려다보이면서 안온한 느낌을 줍니다.”
인촌의 장남 상만씨가 1972년 동아일보 사장직을 맡고 있던 당시 필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크지 않은 키에 겸허한 미소가 흐르는 그의 얼굴에서 인촌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인촌의 모습은 ‘수당 김연수’ 전기에 간간이 비친다.
‘인촌은 친구도 많았고 장난도 잘 하여 어머니의 걱정이 그칠 날이 없었다. 사실 인촌은 양반의 풍습에 얽매이기보다는 동리 개구쟁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더 좋았던 것이다. 한번은 밤이 깊도록 인촌이 집에 돌아오지 않아 집안이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때 인촌은 동리 아이들과 낮에 보아두었던 참새 둥우리를 털고 있었던 것이다. 참새 둥우리는 초가 처마 밑에 치기가 일쑤이다. 그날 낮에 동리 아이들과 놀다가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밤에 손을 넣어 참새를 잡는 재미에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