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인민복을 입은 홍위병들이 ‘미제’란 팻말을 걸고 성조기 모자를 쓴 한 남성을 총검으로 찌르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인민복을 입은 홍위병들이 ‘미제’란 팻말을 걸고 성조기 모자를 쓴 한 남성을 총검으로 찌르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필자는 74학번이다. 고 리영희 선생이 쓴 ‘8억인과의 대화’는 1977년 9월 1일, 그러니까 필자가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4학년 졸업반이던 가을에 출판됐다. 리영희 선생은 이미 필자가 대학 1학년이던 1974년에 펴낸 ‘전환시대의 논리’로, 이른바 ‘긴조(긴급조치)시대’ 대학생들의 우상이 돼 있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필자가 대학 2학년이던 1975년에 고려대의 휴교를 명한 긴급조치 7호, 4학년이던 1977년에는 ‘유언비어의 날조·유포를 금지하고, 이를 어긴 학교의 대표자나 장, 소속 임직원, 교직원 또는 학생의 해임이나 제적을 주무 장관이 명령할 수 있도록’ 한 긴급조치 9호를 내려놓고 있었다. 학교는 거의 휴교 상태였고, 휴교가 풀려 개강하면 그날로 시위가 벌어지고, 그러면 다시 휴교하는 상황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강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니, 학생들은 집이나 학교 근처의 하숙집에서 ‘책이나 읽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인과의 대화’는 필독서였다. 학교 근처의 막걸리 집에서는 “이영희 선생의 책을 읽으면 가슴이 울렁거린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리던 시절이었다.

필자는 1978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한 뒤 1982년 조선일보에 입사해서, 1988년부터 4년간 홍콩 주재 특파원,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1992년 12월부터 5년간은 베이징 주재 특파원으로 일했고, 2006년 11월부터 2009년 2월 말까지 다시 베이징 특파원으로 일했다. 모두 11년 가까이 중국 주재 특파원으로 일한 셈이다. 조선일보 홍콩 주재 특파원이던 1988년 10월 처음으로 홍콩에서 상하이~베이징~옌지 취재에 나서 처음으로 본 중국은, 한마디로 리영희 선생이 ‘8억인과의 대화’로 만들어놓은 기억 속의 중국과는 너무나 다른, 마치 칠판에 쓴 분필 글씨를 지우고 다시 쓰는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바라보고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중국이었다.

더구나 필자가 본 기간의 중국은 이른바 ‘개혁개방의 시대’라는 구호 아래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서 “메이요 원거, 메이요 가이거(沒有文革 沒有改革·문혁 없이는 개혁도 없다)”라는 말이 유행하던 중국이었다. “문혁 없이는 개혁도 없다”라는 말은 “문화혁명 기간의 그 쓰라리고 아픈 기억 때문에, 인민들 사이에 모두가 그 시절로 결코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에, 경제발전을 향해 달려가는 개혁이 잘 추진되고 있다”는 뜻을 담은 말이었다. 개혁개방 시대의 중국은 알고 보니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불리는 덩샤오핑(鄧小平)부터가 문화혁명의 피해자였고, 그의 후임자인 장쩌민(江澤民) 역시 문화혁명 때 수난을 겪은 사람이며, 지도자 그룹에 속하는 대부분이 문화혁명의 피해자들로 구성된 셈이었다.

덩샤오핑이 보면 헛웃음 흘릴 내용

고 리영희 선생이 ‘8억인과의 대화’를 펴낸 1977년 9월은 문화혁명으로 중국 대륙 전역에서 수많은, 정확한 통계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일부에서는 2000만명이 넘는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홍위병의 구타와 폭력에 목숨을 잃던, 중국인들이 “다시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그런 악몽의 시간이 이미 끝난 시점이었다. 1960년대 무리한 경제발전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대약진 운동 직후 마오쩌둥(毛澤東)이 정권을 잃지 않기 위해 주로 중고생과 대학생들로 구성된 홍위병들의 폭력성에 불을 붙여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광기의 시대는 이미 지나간 시점이었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병사(病死)하고, 마오의 네 번째 부인 장칭(江靑)을 비롯한 문화혁명의 주동자 4인방도 이미 체포된 뒤였다.

그런 시점에 한국에서 출판된 리영희 선생의 ‘8억인과의 대화’는, 한마디로 문혁의 피해자인 수많은 사망자들과 문화혁명 기간에 부총리에서 지방의 트랙터 공장으로 쫓겨가 3년간 나사를 깎은 덩샤오핑이 보면 놀라다 못해 눈물을 흘리며 헛웃음을 흘릴지도 모르는 그런 표현들을 담은 채 한국에서 출판됐다. 특히 ‘8억인과의 대화’에 “일본의 저명한 소련 경제사 전문가로 도쿄대 교수인 기쿠치 마사노리(菊池昌典)가 1967년에 중국을 돌아보고 1971년에 썼다”고 리영희 선생이 소개한 ‘현지에서 보는 문화혁명’(327~342쪽)은 ‘어처구니없다’는 표현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기쿠치 마사노리가 그 글을 쓴 지도 6년이나 지났고, 문화혁명이 끝난 지도 1년이나 지난 시점에 리영희 선생은 문화혁명에 대한 한 일본 지식인의 글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스탈린과 모택동의 개인숭배의 차이에 관해서 스탈린 시대의 쓰라린 경험을 가진 북경 주재의 미국인 스트롱 여사와 오랫동안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북경시 혁명위원회의 성립을 축하하는 대군중 데모의 환성이 들려오는 스트롱 여사의 자택에 서로 마주앉았을 때, 여사는 개구일성(開口一聲), 모택동은 스탈린과 달리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모택동은 스탈린의 수법인 <실권파(實權派)>를 유형(流刑)에 처하는 행동은 물론, 그 직장에서 추방하는 따위의 보복조차 안 하고 있다. 격동하는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상사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런 불상사를 외국의 신문들은 어쩌면 지나치게 과장 보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3월 미국의 뉴욕타임스라든가 미국의 소리 방송 같은 것이 광동(廣東)의 <대폭동>이니 <유혈사태>니 하는 것을 보도하고 있던 바로 그때에 나는 바로 그 광동에 피한중(避寒中)이었는데, 나는 그런 보도가 전적으로 데마(필자 주: 대중을 선동하기 위한 허위선전)라는 사실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여사는 광동에서의 상세한 현지르포의 원고를 나에게 보여주면서 말을 이었다….”(필자 주: 겹따옴표 속 문장부호와 한자 등은 ‘8억인과의 대화’ 원문대로 인용했다.)

왜 뒤늦게 문화혁명을 얘기했을까

‘8억인과의 대화’
‘8억인과의 대화’

“일본에서 자살의 소문이 떠들썩했던 사람들에 관해서도 대체로 생존해 있는 듯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이드카에 실려서 비판 장소에 끌려가는 유소기(劉少奇)라든지 등소평(鄧小平)이라든지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할 수도 없었고, 비판의 현장에 가서 실제 상황을 볼 수도 없었지만, 적어도 소련에서의 스탈린 시대처럼 오밤중에 <검은 까마귀>가 인적 없는 시가를 질주하는 속에서 정적(政敵)이 사라져가는 따위의 일은 없는 것이다. 정적이나 괘씸한 사람을 말살하는 데 그 <오족(五族)>의 씨까지 죽여버리는 식의 비합리적 숙청도 여기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민중의 표정에도 공포의 어두운 그림자는 없다….”

“…(모<毛>는) 『인간이 많으면 의논도 많고, 열의도 굳어지고, 결의도 그만큼 높아진다』고 주장하였다. 1958년의 대약진 운동이 한창일 때 그가 뱉은 이 말은 현재의 문화대혁명의 본질을 예리하게 찔렀다고 할 것이다. 인민공사를 돌아보면 길고 큰 수로(水路), 미끈한 농로, 견고한 축사(畜舍) 등, 온갖 근대설비는 대약진 정책의 유물임을 알 수 있다. 대약진 정책의 성패를 논하는 것은 좋다고 치더라도 7억의 개미가 만든 무수한 기념비적 설비는 다시 한번 농민의 자신을 불러일으키는 점화제(點火劑)가 될 것이다. … 문화대혁명은 분명코 중국 민중의 힘과 자신을 강화하여 국제주의의 정신을 자극하였다.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자족(自足)하고 있는 금욕의 나라, 거기서 사는 7억의 개미는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기쿠치 마사노리라는 일본 지식인이 1966년에 시작된 문화혁명 1년 뒤인 1967년에 중국 여행을 한 뒤 4년 후인 1971년에 쓴 글을, 리영희 선생은 다시 6년 뒤인 1977년에 출판된 ‘8억인과의 대화’에 왜 소개했는지, 리영희 선생이 이미 1년 전에 세상을 떠난 뒤라 이제 와서 물어볼 길도 없다.

1977년이면 이미 문화혁명은 1년 전 마오의 사망으로 종결된 뒤였고, 기쿠치가 “비판 장소에 끌려가는 유소기(劉少奇)라든지 등소평(鄧小平)이라든지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할 수도 없었고…”라고 묘사한 ‘유소기(류사오치)’는 이미 비판 정도가 아니라 지방 도시로 유배돼 폐렴으로 사망한 뒤였고, 등소평(덩샤오핑)은 주자파(走資派)로 낙인이 찍혀 장시(江西)성의 트랙터 공장 공원으로 쫓겨가 3년 동안 나사 깎는 일을 하다가 이미 부총리로 복권한 뒤였다. 필자의 조선일보 선배 국제부 부장으로 1965년에 이미 조선일보 외신부장을 지낸 선생이 왜 1977년에 문화혁명을 장밋빛으로 묘사한 일본 지식인이 6년 전에 쓴 글을 번역해서 ‘8억인과의 대화’에 문화혁명을 보는 가장 중요한 시각의 글로 소개했는지 역시 지금은 물어볼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중국 보여준다더니…

리영희 선생은 ‘8억인과의 대화’의 머리말인 ‘읽는 이를 위하여’에서 “이 책은 현대중국을 <있는 사실 그대로> 알고 싶어하는 이를 위해서, 서방세계 저명인사들의 현지 체험과 기행문을 모아 번역하고 편집한 것”이라고 썼다. 선생은 이 책의 핵심 부분인 문화혁명에 대해 당시 미국과 유럽의 많은 신문들에 유혈 참상이 소개된 마당에 왜 한 일본 지식인이 문혁 초기에 중국을 돌아보고, 문혁을 잘못 판단한 글을, 문혁이 종결된 뒤에 한국의 독자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중국을 보여주겠다”면서 굳이 번역해서 소개했다. 선생은 뉴욕타임스를 포함한 많은 미국과 유럽의 신문들이 소개한 문화혁명의 참상이 진실이 아니라고 본 듯하다. 그는 또 우리와는 오갈 수 없는 장벽 뒤에 있던 중국의 실상에 대해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8억인과의 대화’를 읽고 시각을 전환하기를 기대한 듯하다.

그러나 리영희 선생은 자신의 시각이 중국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는 것을 끝내 고백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해서 여행이 자유로워진 뒤에도 ‘8억인과의 대화’ 수정판을 내지 않았다.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전 조선일보 베이징 특파원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전 조선일보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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