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미군이 서울에서 25달러에 구입→석 달 뒤 군용백에 담아 美 부모에 보내→라이프·뉴욕타임스 잇단 보도→“국가 보물” 뉴욕총영사 반환 요청→美 당국, 1951~1952년 한국대사관에 반환→60년째 행방 묘연
1951년 6월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들 에브론으로부터 표범 카펫을 넘겨 받은 길트너 여사가 미 세관당국의 압류절차에 앞서 촬영한 사진. / photo 라이프지
1951년 6월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들 에브론으로부터 표범 카펫을 넘겨 받은 길트너 여사가 미 세관당국의 압류절차에 앞서 촬영한 사진. / photo 라이프지

한국전쟁 당시 미국으로 유출됐던 명성황후의 표범 카펫이 1951~1952년 주미 한국대사관을 통해 반환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문화재청 산하 고궁박물관 등 정부 소장처 어디에도 이 유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당국이 사실 확인 작업에 착수했다. 5월 13일 외교부는 주간조선으로부터 표범 카펫을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은 건과 관련 질문을 받고 주미 대사관에 일명 ‘명성황후 표범 카펫’이 존재했었는지 여부와 국내로 반환된 사실이 있는지를 확인 중에 있다고 밝혔다. 고궁박물관 등 문화재 관리당국에 따르면 현재 이 카펫은 국내 반입되거나 관계 기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기록이 없어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대한제국의 황실에서 쓰였던 이 보물급 카펫은 과연 누구에게 전달된 걸까.

1951년 미국 라이프誌 보도

명성황후 표범 카펫이 미국으로 유출됐다는 사실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은 올해 한 시민단체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관련된 유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불교계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사무총장 혜문 스님)는 최근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칼인 ‘히젠토(肥前刀)’를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구시다 신사로부터 환수하기 위한 운동을 벌여 왔다. 히젠토 환수위원회는 일본 신사 측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기 위해 명성황후 관련 자료를 면밀하게 검토했다. 이 과정에서 명성황후 표범 카펫에 관한 내용을 보도한 미국 라이프(LIFE)지 기사를 발견했다.

1951년 8월 20일자 미국 라이프지는 ‘병장의 기념품’이라는 큰 제목 아래 ‘48마리의 표범가죽으로 만든 카펫이 군용백에 담긴 채 미국으로 전달됐다’는 부제를 달아 명성황후 카펫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표범가죽 카펫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한국산 표범 카펫은 당시 미국인의 관심을 끌며 상당히 화제를 모았던 것으로 보인다. 라이프 잡지뿐 아니라 뉴욕타임스, 사라소타 헤럴드 트리뷴(1951년 7월 29일자·플로리다 사라소타에서 발행된 신문), 게티스버그 타임스(1951년 7월 27일자) 등에도 관련 기사가 실렸다. 뉴욕타임스 기사 원문을 찾지는 못했으나 사라소타 헤럴드 트리뷴 등이 뉴욕타임스 관련 기사를 인용한 것을 보면 미국의 권위지 뉴욕타임스도 이들 신문에 앞서 관련 보도를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남궁염 뉴욕주재 총영사는 미국 언론에 한국산 표범 카펫이 보도되자 반환을 주장하고 나섰다.

1 1951년 7월 29일자 사라소타 헤럴드 트리뷴에 실린 표범 카펫 기사. 2 초대 뉴욕총영사를 지낸 故 남궁염씨.
1 1951년 7월 29일자 사라소타 헤럴드 트리뷴에 실린 표범 카펫 기사. 2 초대 뉴욕총영사를 지낸 故 남궁염씨.

라이프지 기사 등이 전하는 명성황후 표범 카펫의 운명은 명성황후만큼이나 기구하다. 이 카펫은 1951년 6월 16일 미국땅으로 건너갔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에브론 길트너가 서울의 한 고미술상을 통해 당시 25달러를 주고 사들인 뒤 모국으로 보낸 것이다.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계속된 한국전쟁 시기에는 많은 국내 보물급 유물들이 유실되거나 도난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브론 길트너 병장은 당시 이 카펫을 구입하고 나서 약 3개월 뒤 미국 콜로라도주에 사는 부모에게 보냈다. 당시 미국 언론에 따르면 모피를 받아든 에브론 병장의 부모는 표범 48마리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이 카펫이 값진 물건이라고 판단하고 팔려고 내놨다. 미국 언론을 통해 ‘한국 명성황후의 유물인 값비싼 표범 카펫이 미국에 있다’는 내용이 알려진 뒤 현지 한국 공관은 미국 정부에 카펫 반환을 요구했다. 미국 정부의 전후(戰後) 보상업무 기록에 따르면 이 카펫은 1951년 하반기에서 1952년 상반기 사이에 주미 한국 대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반환됐다. 다음은 명성황후 표범 카펫의 미국 반입 경위를 자세히 보도한 라이프지(1951년 8월)의 기사 내용이다.

“창덕궁에서 훔쳐왔다”

“미국 콜로라도주 푸에블로에서 식품점 매니저로 일하던 길트너씨 가족은 골동품 수집가다. 그의 집에 딸린 작은 갤러리에는 비록 값비싼 보물류는 아니더라도 이집트의 피라미드 돌조각부터 콜로라도의 오래된 성냥갑까지 잡다한 물건을 모아놓았다. 지난 5월 길트너씨는 한국에 파병된 그의 아들 에브론(27) 병장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제법 괜찮은 한국 카펫을 구입했고 그걸 보내드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에브론은 과거에도 옻칠한 장신구나 맥주캔으로 만든 램프 같은 것들을 부모에게 보내주곤 했다. 1951년 6월 16일 길트너씨 집에는 39.2달러의 항공배송료 꼬리표가 붙은 묵직한 군용 더블백이 배달됐다. 가방에는 가로 2.5m, 세로 5.6m의 표범가죽 카펫이 담겨 있었다. 응접실에 깔 수 없을 정도로 큰 물건이었다. 보관이 마땅치 않던 길트너 부부는 이 카펫을 모피 판매상인 조셉 시몬스에게 보관을 의뢰했다고 한다. 시몬스는 초대형 표범카펫과 관련된 내용을 기자들에게 말해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졌고 그 즉시 뉴욕 한국 총영사관에서 ‘그 모피는 서울 명성황후 궁실에서 쓰던 국가 보물’이라며 반환을 요청했다. 에브론 병장은 지난 4월 서울 리어카상에게 15만환(25달러)을 주고 카펫을 구입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집에 카펫을 보내기 전까지 약 3개월 동안 표범 카펫을 싸갖고 한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8월 1일 미국 세관당국은 길트너씨가 소유한 진귀한 카펫을 압류했다. 세관당국은 그들(편집자주:에브론 병장 가족)이 카펫을 수천달러에 되팔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에브론 병장이 세관 기록 시 카펫을 선물로 기재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덴버에서 압수된 이 카펫은 곧 명성황후 처소로 되돌려질 것으로 보인다.”

당시 명성황후 표범 카펫 반환을 앞장서 촉구한 남궁염 초대 뉴욕 한국 총영사는 이 카펫을 국가 보물로 규정했다. 뉴욕타임스도 관련 내용을 보도하며 ‘10만달러에 달하는 한국 표범 모피’라는 제목을 달았다. 뉴욕타임스는 뉴욕 총영사였던 데이비드 남궁(남궁염)이 “값을 매길 수 없는 이 보물에 굳이 가격을 매긴다면 아마도 10만달러의 가치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며 이 명성황후 카펫을 제법 큰 화제성 기사로 다뤘다. 당시 남궁 총영사는 “카펫의 사진을 보는 순간 고인이 된 명성황후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황후는 외국사절로부터 굉장한 선물을 받았다”고 말한 것으로 사라소타 헤럴드 트리뷴이 보도했다.

당시 주미대사는 1975년 사망

사라소타 헤럴드 트리뷴은 또 에브론 병장이 자신의 부모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하며 “서울 창덕궁에 있던 이 표범 카펫은 가치가 적어도 2만5000달러는 될 것이라고 어떤 한국인이 내게 말해줬다”는 내용도 보도했다. 표범 카펫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던 에브론 병장이 현지에서 보물급 한국 황실 물건을 헐값에 사들인 뒤 미국에서 비싸게 되팔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셈이다. 이 보도 이후 미국 군 수사기관(CID)은 에브론 병장을 불러 조사했고 불법 해외 문화재 반입 경위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한국 고미술상을 찾아가 조사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한국 대사관의 요구를 수용한 미국 정부는 콜로라드주 덴버의 세관을 통해 에브론 병장의 부모가 갖고 있던 표범 카펫을 압수하고 1951년 8월부터 1952년 2월 사이에 한국 대사관에 돌려준 것으로 미국 국가기록물 보관부(US National Archives & Records Administration)의 공식 문서(전후 보상 목록) 등에 기록돼 있다.

미국 정부가 워싱턴의 주한 대사관에 돌려줬다고 한 시점의 주미대사는 양유찬이었다. 그는 초대 장면 대사에 이어 1951년 4월부터 1960년 4월까지 제2대 주미대사로 재직했다. 1975년 사망했다.

국내선 반환받았다는 ‘기록’ 없어

그러나 현재 우리 정부는 이 카펫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문화재청 측은 “표범 가죽으로 만든 황실 카펫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 미국에선 한국대사관에 반환된 기록이 있지만 국내에선 이를 접수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카펫을 본국으로 들여온 뒤 3대 변영태 장관 시절 외교부가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현지 대사관이 적법하게 처리하지 않았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당시 권력 실세는 1951년 자유당 창당을 주도한 이기붕 부통령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 측은 “문화재 당국에 관련 내용을 확인했으나 기록이 없다는 회신을 받았고 주미 대사관에 직접 정보공개청구를 요청해 놓은 상태”라며 “이 중요한 문화재가 반환된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명성황후의 카펫 찾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조선 왕실의 유물과 자료를 관리하는 고궁박물관에도 명성황후의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고궁박물관 측은 명성황후 표범 카펫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 고궁박물관 정계옥 과장은 “명성황후의 유물로 전해지는 게 거의 없어 우리 입장도 난감할 따름이다.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시해 이후 유품까지 없애려 했을 수도 있고 전쟁을 치르면서 도난됐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열의를 갖고 명성황후의 유품을 찾는다면 분명히 다양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겠지만 그게 과연 진품인지를 확인하는 건 또 다른 문제”라고 했다.

문화재청 산하 박물관에도 명성황후의 유물은 거의 없다. 심지어 명성황후 사진으로 알려진 유물도 진위논란에 휩싸여 있지만 당국은 진위 확인 작업을 하지 않고 있다. 문화재청의 한 관계자 역시 “명성황후가 썼던 표범 카펫은 처음 듣는 내용”이라고 했다. 현재 명성황후의 유물로 전해지는 문화재는 고궁박물관이 소장한 ‘병풍’이 유일하다. 이 병풍은 명성황후가 직접 수를 놓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표범 카펫 문제 제기한 혜문 스님

“반환 당시 권력자 손에 넘어갔을 가능성… 반드시 찾아야”

photo 조선일보 DB
photo 조선일보 DB

명성황후가 썼다는 표범 카펫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계기는. “그동안 문화재 환수를 위한 노력을 꾸준하게 전개해 왔다. 2006년 조선왕조실록을 일본으로부터 돌려받는 성과도 거뒀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올해는 조선왕실의궤와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 ‘히젠토’를 일본으로부터 반환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명성황후의 유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와중에 황실에서 쓰던 표범 카펫이 미국으로 유출됐던 일화를 알게 됐다. 특히 당시 미국에서 발행한 잡지를 보니까 한국 대사관으로 반환됐다고 하는데 국내에는 소장기록이 없었다. 카펫을 찾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겠다는 취지에서 사실 확인에 나선 것이다.”

명성황후 관련 유품은 전해지는 게 별로 없나. “라이프지에 표범 카펫과 함께 명성황후의 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은 명성황후의 것이 아니다. 기자가 아무거나 갖다가 쓴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웃을 수만은 없는 게 우리에게는 명성황후의 사진이 없다는 점이다. 불행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자료가 모두 폐기된 게 아닌가 싶다. 국모를 시해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관련 자료를 남기지 않으려고 방치하거나 빼돌렸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외부에서 유출된 대한제국의 유물들은 아마도 장물로 밀거래되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가난을 면하기 위해 일부 보물급 유물들을 매각하는 일도 잦았다. 명성황후의 표범 카펫도 이런 과정을 거쳐 미군 병사가 헐값에 사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에서 반환된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60년이 지났다. 폐기됐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표범 가죽은 그리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 또 누가 봐도 귀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소장자가 있다면 분명 잘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나서서 당시 주미 대사관에 재직하던 인사의 가족이나 자료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면 모피의 향방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문화재 당국에는 관련 자료가 없다고 하던데. “문화재 관리 부처에서 관련 사실을 잘 모르는 걸로 봐서는 카펫이 우리 대사관에 반환됐을 당시 권력을 쥔 개인에게 넘어갔을 개연성이 높다. 정부가 의지를 갖고 찾아야 한다.”

한국표범

조선시대 땐 북악산에도 출몰… 일제가 수천 마리 학살

조선시대 민화에 묘사된 표범. / photo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 민화에 묘사된 표범. / photo 국립민속박물관

한국표범은 ‘아무르표범’ 또는 ‘조선표범’이라고도 불리며 학명은 ‘Panthera pardus orientalis’이다. 20세기 초까지 한반도, 만주, 러시아 극동 지방에 널리 서식했다. 황색 바탕의 털가죽에 검은 점 무늬가 몸통, 꼬리와 다리까지 박혀 있다. 몸통 길이는 106~122.5㎝로 호랑이보다 작으며 몸무게는 수컷이 32~48㎏, 암컷은 25~43㎏ 정도이다.

한국표범은 조선시대만 해도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맹수였다. 세조실록의 ‘세조 11년(1465) 8월 14일에 창덕궁 후원에 호랑이가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북악에 가서 표범을 잡아 돌아오다’ 등 조선시대 표범에 관한 기록도 수없이 많다.

2008년 발굴 공개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 사진 중 표범무늬 의상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만 해도 조선의 특산물로 소개될 만큼 표범이 흔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51년 미국의 에브론 길트너 병장이 한국에서 구입한 표범가죽 카펫이 일제에 시해된 명성황후의 것임이 드러나 한국 대사관에 반환했다는 기록이 미국 ‘라이프’지에 남아있는데, 당시 카펫 사진을 보면 가로 2.5m, 세로 5.6m 크기로 방 안을 가득 채우도 남을 만큼 거대하다.

그러나 한국표범은 일제강점기에 ‘해수구제(害獸驅除)’, 즉 해로운 맹수를 제거한다는 명목 아래 최악의 수난기를 맞는다. 공식 기록에는 이 시기 624마리에서 많게는 1000마리까지 포획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사냥의 실질적 목적이 고가의 표범가죽이었던 만큼 실제 사살된 표범은 수천 마리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호랑이도 다수 포획됐다. 한국표범은 광복 후 한국전쟁으로 서식지가 파괴되며 개체수가 더욱 급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 경남 합천군 오도산에서 마지막으로 포획되었다. 이 최후의 한국표범은 창경원 동물원에서 살다가 1973년 죽었다. 현재 남한에서 한국표범이 야생에 서식하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한국표범은 멸종위기 1급 야생동식물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대 수의과 이항 교수는 “야생에서 한국표범은 이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서쪽 북한·중국 접경지대인 케드로바야파드 자연보호구에 서식하는 25~35마리가 전부”라며 “표범 종류 중 유일하게 눈이 오는 추운 지방에서 살아가는 한국표범이 전세계 고양이과 동물 중 가장 심각한 멸종 위기에 놓여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밀렵, 지속적인 산불, 인간 주거지 확대로 인한 서식지의 고립, 잦은 근친 번식 등을 한국표범 개체 급감의 주 원인으로 꼽았다.

김대현 기자 / 심혜기 인턴기자·미 브라운대 졸업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