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5일 경상남도 밀양을 방문한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가 밀양관아 앞에서 방망이로 박을 깨고 인사를 하고 있다.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지난 4월 5일 경상남도 밀양을 방문한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가 밀양관아 앞에서 방망이로 박을 깨고 인사를 하고 있다.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는 스스로를 ‘김밥 인생’ ‘비타민 인생’이라고 부른다. 올 1월 15일 있었던 당대표 선출 전당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난해 말부터 식사는 이동 중에 차 안에서 김밥으로, 체력은 각종 비타민과 영양제로 챙겨온 지 벌써 4개월이 넘었다.

지난 4월 4일 대전지역 유세 도중 지하철을 탄 한 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하루에 열두세 번 연설을 하니 (목이) 안 된다. 내가 내 몸이 아니야. 목 때문에 걱정”이라고 했다. 한국 나이로 69세인 한 대표는 3월 21일 목감기 증상인 ‘급성인두염’을 진단받고 급히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들러 치료를 받기도 했다. 2월 16일에도 수면부족과 피로누적으로 같은 병원에 입원했었다. 한 달 넘게 공천 과정을 진두지휘하면서는 새벽 4시까지 심야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고 오전 7시에 다시 출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한 대표는 이날 “선거라는 게 참 묘하다. 시간이 갈수록 피곤할 것 같은데 하면 할수록 기운이 나고 마지막날에는 열흘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며 “지지자의 성원과 기운이 모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2007년 참여정부 국무총리, 2010년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끝으로 휴식을 취할 것 같았던 한 대표가 2012년 총·대선이 함께 있는 ‘정치의 해’에 다시 전면에 등장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바람도 관리해야”

한 대표는 스스로 대권에 도전할 뜻이 없음을 수차례 천명한 바 있다. 때문에 한 대표는 당내외에서 ‘관리형 대표’로 인정받는다. 야권(野圈)에서 한 대표에게 요구하는 역할도 바로 그 지점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한 대표는 ‘킹 메이커’라기보다는 ‘판 메이커’라고 할 수 있다”며 “외부에서 볼 때 가장 중립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캐릭터가 바로 한 대표”라고 했다.

한 대표는 올 초 당대표 경선 때부터 줄곧 “나는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발탁되고 정치를 배운 뒤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일했다”며 “‘친노(親盧)’와 ‘친DJ’를 가르는 것은 분열적인 레토릭”이라고 주장해 왔다. 일각에서 자신을 친노로 분류하는 것에 대해 의도적으로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이는 ‘야권의 디자이너’로 불리는 이해찬 민주당 상임고문이 애초 그렸던 큰 밑그림이기도 하다. 정치권 관계자는 “이해찬 전 총리는 문재인 상임고문을 대선주자로, 한명숙 전 총리를 당대표로 하는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야권 대통합을 부르짖어 왔다”며 “그 스스로가 킹 메이커와 판 메이커의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대표의 역할은 특정 후보를 밀고 가는 킹 메이커 역할보다는 여러 대선주자들이 당내 경선을 잘 치러 단일 후보를 내게끔 하는 판 메이커 역할에 더 어울린다고 보는 인사들이 많다. 한 대표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온화한 리더십은 국민이 보기에도 당내 각 정파들과 대선주자들을 잘 융합해 낼 수 있는 적격자라는 신뢰를 준다는 것이다. 한 대표는 그러한 점 때문에 친노 세력을 비롯해 한국노총 등 노동세력과 시민단체 등 야권 세 정파가 합쳐 만든 민주통합당의 초대 당대표로 선출될 수 있었다. 선거 사상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전국적인 야권연대를 통합진보당과 이루어냄으로써 어느 정도 융화의 리더십도 인정받았다. 한 대표가 2012년 대선을 향한 판 메이커 역할을 하기 위해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이 바로 이번 총선이라는 분석이다.

야권의 대모(代母) 되나

한 대표에게 최상의 시나리오는 민주당 단독으로 과반 제1당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공천 잡음 과정에서 잃은 국민 신뢰와 ‘나는 꼼수다’ 김용민 막말 파문 등으로 깎아먹은 의석을 종합해 볼 때 전문가들은 민주당이 단독 과반 의석을 점하긴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135석 안팎에서 원내 제1당이 갈릴 것”이라며 “영호남을 비롯한 무소속 후보 10석 정도와 자유선진당 5~6석, 통합진보당 13~15석 정도를 제외하고 남는 270석 가운데 135석을 기점으로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1당 싸움을 할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이 새누리당보다 1석이라도 더 얻을 경우 대선까지 한 대표 체제는 유효하게 된다. ‘한 지붕 세 가족’으로 불리며 친노·시민사회·노동세력 등 당내 공천 과정에서 벌어졌던 갈등을 봉합하고 이르면 6~7월부터 대선 체제로 전열을 재정비해야 하는 과제가 남게 된다.

민주당 핵심 의원은 “한 대표가 대선 경선 구도에서는 오히려 공정성을 확보할 것”이라고 했다. 총선 공천 과정에서 친노 지분을 과다하게 챙겼다는 비판에 직면하며 당 지지율 하락을 불러왔던 한 대표가 그때의 학습 효과를 통해 대선 경선 구도에서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문재인 후보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재편될 ‘부산발(發) 대권구도’를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할 것”이라며 “혹여나 부산발 대권구도가 실패했을 경우 김두관 지사가 됐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의 위상 관계를 재정립하든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 역시 한 대표 몫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한 대표는 통합진보당과의 관계에서도 캐스팅보트를 쥘 수 있는 야권의 ‘대모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더욱 보수화될 새누리당과 원내교섭단체를 목표로 사상 최대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이 큰 통합진보당 사이에서 19대 국회의 균형추 역할을 한 대표가 맡게 되는 것이다.

“총선에서 확 지는 게 낫지 않나?”

민주당 내 구(舊) 민주계 세력이나 비노(非盧) 쪽에서는 “차라리 대선을 위해 이번 총선에서 확 깨지는 게 낫지 않나”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어중간하게 성적을 내고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대선에 맞닥뜨리는 것보다는 지도부를 싹 개편하고 대선 승리를 위해 나가는 게 맞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1당을 새누리당이 하고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이 합쳐서 과반석을 점하게 되는 경우 가장 애매모호한 상태가 된다. 당장 압승을 해야 할 총선에서 참패했다는 비판을 등에 업고 지도부 책임론이 거세게 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한 대표의 측근은 “전국 단위의 야권연대를 이루어낸 한 대표이기 때문에 야권이 과반석을 점하게 되면 스스로 용퇴하지 않는 이상 대표의 리더십을 흔들 수 없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야권 전체를 합해도 새누리당에 패하게 되는 경우 민주당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지도부 전체의 용퇴론이 불 보듯 뻔하지만 한 대표 이후에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게 민주당으로서는 상상하기 싫은 시나리오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결국 손학규 상임고문이 됐든 정세균 상임고문이 됐든 대선주자들 가운데 누군가 대권 의지를 꺾고 구당(救黨) 정신으로 당을 살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신율 교수는 “급조된 통합 속에서 책임론이 중구난방 터져나올 것”이라며 “지도부 교체론 속에서 대권주자인 문재인 후보가 직접 당 전면에 나설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구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바뀌면서 가졌던 최소한의 혼란기 2~3개월을 거쳐야 하고 이는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야권에 큰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이미 공천과정에서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심모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과 불구속 기소된 김모 비서실 차장 등 측근 비리 사건의 불똥이 새롭게 튈 수 있다는 점도 한 대표로서는 부담이다.

총선을 닷새 앞두고 전국 유세를 돌다 중앙선대위원회 회의에 잠시 참석한 한 대표는 4월 6일 쉰 목소리로 호소했다. “국민 여러분, 투표해 주십시오. 내 한 표를 더하면 국민이 이기고 내 한 표를 버리면 이명박 대통령이 이깁니다.” 이번 총선에 자신은 물론 민주당과 야권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아는 한 대표의 절박함이었다.

박국희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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