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1군 → 2007년 4군 국제수학연맹 사상 유례없는 발전
2010년 8월 19일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열린 세계수학자대회 개막식. ⓒphoto ICM 2010
2010년 8월 19일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열린 세계수학자대회 개막식. ⓒphoto ICM 2010

4년 전인 2009년 4월 19일 저녁 7시 반, 서울 강남구의 한 음식점. 박형주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당시 세계수학자대회 한국유치위원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주중 한국대사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주중한국대사관 관계자는 2014년 세계수학자대회(ICM)를 서울에서 개최하게 됐다고 전해줬다. 2년 넘는 유치 기간 내내 “한국 유치는 힘들 것”이라는 얘기만 들어왔던 박 교수 일행에게 전해진 낭보였다. 비관적인 결과를 전망하고 위로주나 한잔 하자며 가진 모임은 금세 축하 파티로 바뀌었다.

세계수학자대회는 흔히 ‘수학올림픽’이라 불리는 최대 규모의 학술대회다. 1897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처음 개최된 후로 4년마다 열린다. 단일 학문 국제 학술대회로는 가장 큰 규모이자, 가장 오래된 학술대회다. 보통 1주일에서 10일간 열리는 이 대회에 참석하는 수학자만도 3000명이 훌쩍 넘는다. 동반하는 가족이나 취재기자 등을 합하면 5000명이나 모인다.

우리가 유치한 2014년 세계수학자대회는 27번째 대회. 2010년 26회 세계수학자대회는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있었다. 2002년 24회 세계수학자대회가 열린 곳은 중국 베이징. 최근 세 차례 대회 중 두 차례나 같은 아시아 대륙에서 열렸기 때문에 2014년 대회 유치는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게다가 한국은 세계 수학계의 중심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처지. 어떻게 이 불리한 조건들을 극복해내고 유치를 성사시켰을까. 지난 5월 14일, 서울 강남구 과학기술회관 2014 세계수학자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난 세계수학자대회 조직위원장 박형주 교수는 “늦게 출발한 자들의 꿈과 희망”이라는 이번 대회의 캐치프레이즈를 그 답으로 내놓았다.

박 위원장은 “우리 수학계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격한 발전을 보여왔다”고 말했다. 국제수학연맹(IMU)에는 모두 70개국이 가입돼 있는데, 국제수학연맹에 가입하는 것만으로도 그 나라 수학계는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갖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 이른바 저개발 지역의 국가들은 국제수학연맹의 공식회원(IMU member)이 아닌 자매회원(Affliate member)으로 가입돼 있다. 국제수학연맹 회원국은 최하위 1군에서 최상위 5군까지 다섯 그룹으로 회원국을 구분한다. 1군에 속한 국가는 투표권을 하나, 5군에 속한 국가는 5개의 투표권을 갖는다.

현재 국제수학연맹 회원국 중 5군에 속한 나라는 10개국.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 중국, 이스라엘 등 전통적 수학 강국이 포진해 있다. 우리나라는 1981년 1군 회원국으로 가입해 1993년 2군으로 한 단계 승급됐다. 그러다 2007년 두 단계를 뛰어 4군 회원국에 이름을 올렸는데, 국제수학연맹 90년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했다. 최근 수십 년간 우리나라 수학계와 비슷한 발전 속도를 보인 국가는 단 두 군데. 브라질과 중국이다. 박형주 교수는 “국제 저널에 실린 논문 수만 따져놓고 볼 때 근 20여년간 3배 이상의 증가율을 보인 국가는 우리나라와 브라질, 중국 세 군데뿐이다”고 설명했다.

브라질과 중국 수학계의 발전은 국가적 지원과 세계 정세에 힘입은 바가 크다. 브라질 수학계는 1990년대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발전했다. 박 교수는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갈 곳을 잃은 구소련·동유럽 국가 수학자들이 대거 미주 대륙으로 이주했다”고 설명했다. 애초에 이들 수학자들은 미국이나 캐나다로 많이 이주했는데 인재가 몰리면서 직업을 얻기가 힘들어지자 라틴아메리카, 그중에서도 고급 인력의 이민에 관대했던 브라질로 몰렸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요즘도 국제 저널에 실린 논문을 보면 브라질 수학자인데 이름은 동유럽식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중국 수학계의 발전 역시 국가적 지원에 힘입은 바가 크다. 특히 20세기 말, 미국이나 유럽으로 배출됐던 고급 인력을 중국으로 다시 끌어오기 위한 국가적 노력이 수학계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우리 수학계의 발전은 이같은 요인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나라 수학자들의 과학논문인용색인(SCI) 논문 수는 세계 11~13위를 다투고 있다. 박 교수는 “국가적 지원이 늘었다고 해도 중국처럼 집중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브라질처럼 외국 고급 인력이 수입될 여지도 없었다”며 “순전히 자생적 노력으로 이 정도의 발전을 이뤄낸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수학자대회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유치위원회의 핵심 전략은 한국 수학계의 눈부신 발전 양상을 소개하는 데 있었다. 박형주 교수는 “5군 국가들의 ‘도덕적 책무’에 대해 많이 언급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수학계의 발전은 다른 저개발 국가의 역할모델이 될 수 있다고 홍보했지요. 한국이 ICM을 개최하는 것을 보면 ‘우리도 저렇게 성장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한다고요. 우리 경험을 나눠 주면서 가능성을 키워 나간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ICM을 개최하는 것은, 선진국이 저개발 국가에 대한 도덕적 책무를 다할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이 통하기까지 난관도 많았다. 박형주 교수와 함께 유치위원회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강석진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2014 세계수학자대회 조직위원회 문화위원장)는 2009년 여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있었던 한 점심식사 자리에서의 일을 꺼냈다. “당시 유럽수학자대회 참가차 네덜란드에 가 있던 유럽수학연맹 회장을 만났어요. 이분이 ‘이번에도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를 할 수는 없다’며 우리가 대회를 유치하지 못하는 이유를 계속 설명하더군요. 가만히 듣고 있던 박형주 교수가 반박했어요. ‘유럽은 그동안 대회 개최지를 독점해왔다. 당장 1994년 스위스 취리히, 1998년 독일 베를린에 이어 2006년에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하지 않았느냐.’”

박형주 교수는 이때의 일이 유치 과정에서 전환점이 됐다고 말했다. “사실 유치위원회가 처음 발족했을 때, 우리가 유치에 성공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위원장인 저도 ‘이번에는 경험 삼아’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유치하지 못하는 이유를 듣고 나니,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 우리나라 외에 유력한 후보지는 브라질이었다. 지금까지 남미 대륙에서 한 번도 세계수학자대회가 열린 적이 없는 데다, 브라질 수학계는 우리나라만큼 빠르게 발전했기 때문에 대회 개최지로 유력한 상태였다. 강석진 교수는 “브라질과 우리의 가능성을 따지면 브라질이 60~70%, 우리나라는 겨우 30~40% 정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막판에 판세를 흔드는 일이 생겼다. 캐나다가 유치 전쟁에 뛰어든 것인데, 1986년 이후 북미 대륙에서도 세계수학자대회가 열린 적이 없다는 것이 주된 홍보 전략이었다. 강 교수는 “세 나라 중 우리가 제일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유치위원회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했어요. 우리 가능성이 30%고, 캐나다와 브라질이 각각 35%씩이라면 우리가 조금씩만 표를 끌어와도 두 나라를 다 이겨버리는 거잖아요.”

국제수학연맹 집행위원회는 매년 2~4월 열린다. 집행위원회 인원은 11명.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세계수학자대회 개최지가 결정된다. 2009년 집행위원회가 열린 것은 4월 18일, 중국 푸젠(福建)성 푸저우(福州). 비공개로 진행되는 터라 한국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박형주 교수 일행은, 그러나 희망에 차 있었다. 박 교수는 “2009년 2월 있었던 실사단의 방한 때 어느 정도 확신을 가졌다”고 말했다. 실사단은 우리나라 수학계의 발전 속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젊은 수학자들의 성취에 놀라움을 표했고, 우리나라가 저개발 국가들의 역할모델이 될 수 있다는 데 공감했다.

(왼쪽부터) 박형주 교수. 강석진 교수. 민병주 의원.
(왼쪽부터) 박형주 교수. 강석진 교수. 민병주 의원.

2014년 세계수학자대회는 서울과 경주, 두 도시에서 개최된다. 공식 일정은 8월 13일에 시작하지만, 대회 시작 전 국제수학연맹 이사회는 8월 9일부터 경주에서 열린다. 이틀에 거쳐 열릴 이사회에서 4년간의 국제 수학계 결산은 물론, 국제수학연맹 집행위원회도 새롭게 짜여진다. 그리고 8월 12일, 국제수학연맹 이사진들은 버스를 타고 경주에서 서울까지 하루 종일 이동한다. 박형주 교수는 “본 대회 시작 전 열리는 이사회는 그 나라의 가장 역사적인 도시에서 진행된다”며 “단순히 수학자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세계 석학들에게 개최국을 소개한다는 취지도 있기 때문에, 비행기나 열차가 아닌 차량으로 도시 간 이동을 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설명했다.

8월 13일 개막식에는 개최국의 대통령뿐 아니라 세계적 수학자, 외교관 등 수천 명이 참석한다. 내년 세계수학자대회에는 5000여명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된다. 개막식의 주요 행사 중 하나는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 수상이다. 현재 국제수학연맹의 회장은 잉그리드 도브시 미국 듀크대학 교수로 첫 여성 회장이다. 박 교수는 “필즈상 시상은 보통 주최국 대통령이 하는데, 내년 대회에서는 여성 회장이 발표하고 여성 대통령이 메달을 걸어주는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회를 전후해서 우리나라를 찾을 인원은 최대 1만명까지로 추정된다. 4년마다 한 번 열리는 큰 규모의 학술대회기 때문에 대회 기간 중에는 공식 행사뿐 아니라 다양한 학술 세미나나 모임이 개최된다. 게다가 내년에는 ‘늦게 출발한 자들의 꿈과 희망’이라는 대회 취지에 맞게 저개발국 수학자 1000명을 별도로 초청할 예정이다. 세계수학자대회는 단순한 학술대회가 아니라 국제적 문화교류 행사라는 얘기가 빈말이 아닌 셈이다.

이 때문에 세계수학자대회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치러진다. 우리나라에서도 국무총리실의 공식 지원을 받은 국제행사로 간주돼 정치권의 관심도 높다. 5월 22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릴 ‘서울세계수학자대회와 미래창조전략 포럼’에서는 민병주 국회의원(새누리당 비례대표)의 주최로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데 수학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토론이 이뤄질 예정이다. 현 대한수학회장인 김명환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는 “중국을 보면 2002년 세계수학자대회 유치를 계기로 수학에 대한 지원이 늘어났고, 우수한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동시에 국가 기술이 발전했다”며 “수학의 발전은 곧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번 세계수학자대회를 전후해 정치·사회적으로 수학에 대한 관심이 치솟을 전망”이라고 말했다.

박형주 교수도 수학계의 발전이 미래 국가 경쟁력을 보장한다는 것을 언급하며 스포츠 분야의 예를 들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갑자기 뛰어난 천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처럼요. 그런데 김연아 선수의 등장으로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한계가 있다고들 하지요. 피겨계에 뛰어드는 인재가 더 많아지고 지원이 늘어나야 제2, 제3의 김연아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2010년 필즈상 수상자 중 한 명은 베트남 국적의 응오 바우차우(Ngo Bao Chau), 베트남의 국가적 지원을 받아왔던 천재 수학자다. 그러나 응오 바우차우의 수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베트남 수학계의 수준은 미미한 정도. 박형주 교수는 세계수학자대회의 개최가 우리나라 수학계 전반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년간 눈부신 발전을 이뤄온 우리 수학계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젊고 유망한 우리 젊은 수학자들의 역할 모델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세계수학자대회에 참석할 세계적 석학을 보면서 수학자들이 꿈을 가질 수 있지요. 그리고 수학자가 되려는 어린이들에게도 역할모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개최국에 주어지는 일종의 혜택이 우리나라 수학계의 발전을 이끌 수도 있다. 대회 기간 중에는 4년 동안 걸출한 성과를 낸 수학자들의 강연이 마련되는데, 우리나라 수학자로 세계수학자대회에서 강연한 수학자는 5명에 불과하다. 2014년 대회에는 기조강연자 1명을 포함해 총 6명이 강단에 선다. 박 교수는 “이번에 강단에 서는 연사는 다음 해 대회 강연자를 선발하는 절차에도 관여하게 된다”며 “앞으로 세계 무대에 얼굴을 비추는 우리나라 수학자들이 늘어날 것이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필즈상 수상자들을 살펴보면 공통적 이력이 있다. 필즈상 수상자를 스승으로 둔 사람들 아니면 세계수학자대회에서 강단에 선 경험이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번 세계수학자대회 개최를 통해 우리나라 수학계에 일대 도약의 계기가 마련될 것이라는 예상도 충분히 가능하다.

장차 우리나라 수학계는 세계 수학계의 가교 역할을 하게 될 전망이다. 아시아 대륙에서 잇달아 개최한다는 부담을 무릅쓰고 한국을 개최지로 정한 데는 우리나라 수학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수학계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우리나라 수학계의 지속적 성장이 필요하다”며 “세계수학자대회 개최가 한 학술대회에 그치지 않고 국가적 행사로 치러질 수 있었으면 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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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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