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저널(WSJ) 아시아판은 지난 8월 29일자 톱기사를 통해 한국이 이머징마켓(신흥시장) 위기 상황에서 승자가 됐다는 분석을 했다. 이머징마켓 국가들의 통화 가치가 폭락하는 상황에서 위기를 잘 견디는 대표적 사례로 아시아에서 한국을 꼽았다. 한국이 과거에는 이머징마켓 붕괴가 시작되는 곳 중 하나였지만 이번 위기에서는 거의 다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금융시스템의 최대 약점으로 꼽혔던 단기 외채 관리에 성공한 것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지난 2분기 말 현재 한국의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 외채 비율은 36.6%로, 이는 80%에 가까웠던 2008년보다 대폭 하락한 수준이다. 필자는 이 같은 월스트리트의 분석에 동의하면서도 한국이 이번 위기상황에서 승자가 된 데는 보다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타 이머징마켓과 한국은 근본적으로 뭐가 크게 다른 것일까.

‘세계는 평평하다’. 2005년 세상을 바꾼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의 책 제목이다. 세계화가 떠오르는 신흥시장(Emerging Maket)의 발전을 촉진하는 긍정적 효과를 발휘한다는 내용을 담은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다. 2002년 골드만삭스의 짐 오닐(Jim O’Neill)은 인구와 자원 대국인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을 엮어 BRICs(브릭스)라 명명하면서 같은 논리로 BRICs 지역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복합위기가 발생한 후 이머징 국가들이 흔들리고 있다. 먼저 언론에서 BRICs 언급이 사라졌다. 러시아는 원유 가격 하락으로 쪼그라들고 있다. 브라질도 원자재 가격 하락과 외자 유출로 고민 중이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중국도 금융과 실물 모두 어려워지고 있다. ‘기회의 땅’이 이제는 ‘위기의 숙주’가 된 것이다.

특히 780쪽에 달하는 ‘세계는 평평하다’란 책에서 거의 대부분을 할애했던 인도는 금융위기 상황이다. 최근 한국 수출이 크게 증가했던 동남아 국가들도 인도와 대동소이한 위기에 빠져 있다. 금융위기의 구원투수였던 이머징마켓은 잠시 쉬어 가는가? 아니면 몰락하고 있는 것일까? 세계는 다시 울퉁불퉁해진 것인가?

21세기 초반 이머징마켓 투자 붐이 분 것은 선진국의 고민 해결 지역으로 BRICs 등 이머징마켓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고령화의 폐단이 서서히 가시화되는 시점이었다. 석유 등 자원 부족에 대한 우려도 커져 갔다. 따라서 선진국 입장에서는 인구가 많은 나라, 자원부국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BRICs를 비롯한 이머징마켓이 대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2008년 글로벌 복합위기가 발생하면서 이머징마켓도 어려움에 처했지만, 대규모 양적완화로 풍부해진 글로벌 투자자금은 다시 이머징마켓을 공략했다. 글로벌 복합위기 발생 이후 외자 유입으로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의 주가는 3배 이상, 인도도 1.2배가량 상승했다. 여타 국가에 비해 과속 성장했다. 금리도 인도가 9%대에서 5%대로, 인도네시아는 14%대에서 5%대까지 하락한 후 최근 빠르게 반등 중이다.

이는 전적으로 해외 투자가의 투자가 바탕이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2009년 이후 올 3월 말까지 무려 700억달러의 외자가 유입되었다. 이 중 채권투자만 210억달러에 달한다. 브라질의 경우 한국 투자가의 채권투자가 무려 3조원을 넘기는 등 동기간(2009년 이후 올 3월 말까지) 중 해외 자본이 3850억달러나 유입되었다. 해외에서 자본이 몰려오면 환율이 강세를 보이면서 물가는 하락하고 소비가 늘어난다. 경제가 호조를 보이면서 외자가 추가로 밀려오는 금융시장의 선순환 트렌드가 올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물론 호황에 취해 가계 부채와 금융권 부채가 동반해서 증가했다.

특히 위기에 민감한 금융권의 부채 증가 속도는 각국 은행 해외 차입 증가 비교<표 참조>에서 보듯이 2009~2012년 크게 증가했다. 2004~2007년 사이에 그리스 등 유럽 PIIGS(피그스·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등 5개국) 국가 금융기관의 차입 증가 속도가 커져 결국 위기를 초래했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이런 현상은 이머징마켓 공통 현상이었다. 중국 등 BRICs와 동남아시아뿐 아니라 터키, 남아공까지 상황은 유사하다. 때문에 최근 문제가 커진 인도나 인도네시아라는 국가적 관점이 아니라 전 세계적 차원에서 현재의 이머징마켓 위기를 살펴봐야 한다.

이머징마켓에 지난 5년간 자금이 유입된 것은 미국 등 선진국이 무제한의 자금을 시장에 공급한 양적완화(QE) 때문이었다. 무려 8조달러에 이르는 이 자금은 이머징마켓의 주식, 채권뿐 아니라 원자재와 부동산까지 투자 열풍을 불러왔다.

그러나 6월 초 미국이 출구전략을 시행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미국 경제의 회복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제조업 경기 부활, 셰일가스 등 에너지 산업의 발전이 가세된 구조적인 경기 회복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 결과 달러 강세와 출구전략에 따른 유동성 부족 우려로 금리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금리가 상승하고 달러가치가 올라가자 글로벌 투자자금은 안전하면서 투자 매력이 커진 미국으로 U턴하기 시작했다. 바로 여기서 현재의 이머징마켓 위기가 발생했다. 또한 국가 간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 2009년부터 올 3월까지 외국인 투자가들은 채권을 50조원 순매수했지만, 이후 외국인의 채권 매도는 2조원이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미미하다. 반면 브라질, 인도, 인도네시아는 외국인 투자가의 적은 자금 유출에도 금리가 폭등하고 환율이 폭락하는 등 금융위기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인도는 제조업 기반이 약하고 자원도 부족해서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 구조다. 또한 포퓰리즘적 정치 구조로 세수를 무시한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만성적 재정적자 국가이기도 하다. 다만 풍부하고 우수한 인적자원, 높은 잠재성장률 등을 바탕으로 해외 자금 차입으로 자본 부족을 메워 왔다. 인도의 쌍둥이 적자 규모는 현재 GDP 대비 12%로 외환위기를 겪었던 1991년 14%대에 근접하고 있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었던 1997년 단 한 해 경상수지 적자가 GDP의 6%에 불과했다는 사실에서 보면 인도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이런 구조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인도는 올 7월 두 차례 금리를 인상하면서 긴축정책을 펴기 시작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불과 일주일 만에 통화 공급을 재개한다고 발표했다. 환율방어를 위해 내국인의 외화 반출을 제한하는 무리수를 두자, 조만간 이 조치가 외국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우려로 외자 이탈이 가속화되었다.(8월 23일 외국인 적용 부인 발표) 이런 상황임에도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인도 정부가 식품 보조금 규모를 오히려 확대하자(8월 26일) 외국인 투자가들은 재정 개선 여지가 전혀 없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인도네시아도 인도와 별반 차이가 없다. 2011년 이후 중국 수요 둔화 영향으로 주 수출품인 원자재 가격이 하락했다. 수출 대비 내수가 과도하게 호조를 보이자 수출세 인상, 비가공 원자재 수출 전면 금지 조치를 추진하면서 경상수지가 적자 반전되었다. 또한 양국은 물가상승률이 높아서 실질금리가 마이너스 상태다. 해외자본이 머물 이유가 없다. 결국 국가 시스템의 구조적 후진성과 단기 정책실패가 결합된 것이 이머징마켓 위기의 본질로 봐야 한다.

글로벌 복합위기 발생 후 중국 쑹홍빙(宋鴻兵)의 ‘화폐전쟁’은 화제를 몰고 온 베스트 셀러였다.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프리드먼이 인도를 주목했다면, 쑹홍빙은 중국이 미국을 따돌리고 세계의 중심국가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 이 두 사람의 논리는 모두 틀렸다. 단지 인구의 절대 규모와 산업화된 일부 지역의 발전상, 그리고 미국의 구조적 모순에만 주목했기 때문이다.

특정 국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총체적인 측면에서 봐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편향적으로 몇몇 지표만으로 판단했다. 최근 인도의 예에서 보듯이 통화 정책을 일주일 단위로 바꾸고, 선거용으로 재정을 방만하게 사용하는 국가의 미래는 없다. 부정부패, 탈세, 포퓰리즘이 만연하면서 자원이 많은 국가일수록 불행해진다는 ‘자원의 저주’를 떠올리게 한다.

향후 한국의 해외투자는 크게 증가할 전망이다. 그렇다면 어떤 국가를 어떤 잣대로 봐야 할까? 최근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 우선은 경제지표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경상수지와 재정수지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장기적이고 총체적 차원에서 해당국가를 면밀히 봐야 한다. 인구, 자원 등은 기본이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 수준, 교육 수준, 언론의 발달과 같은 정성적 지표의 중요성이 점점 커질 전망이다. 장기가 밀매되고 독점기업이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국가에 10년 앞을 내다보고 장기 투자를 할 수 있을까?

UNDP(유엔개발계획)가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로 국가의 안정성을 판단해보자. 인간개발지수는 기대수명, 교육연수, 소득을 합산해서 국가 간 순위를 매년 갱신한다. 평범한 지표이지만 실제로 적용해 보면 많은 시사점을 발견하게 된다.

전체 순위 선두권에 있는 국가들은 순위에 큰 변동이 없다. 한국의 경우 가장 빠르게 순위가 상승 중이다. 반면 ‘미래의 땅(?)’으로 칭송받던 브라질, 인도,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순위는 최하위권에서 변동이 없거나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

인간개발지수를 달리 해석하면 공부를 많이 하면 돈을 많이 벌고 이 결과 장수한다는 의미다. 세계 선두권 국가들은 교육과 생활수준 향상을 꾸준히 추진해오고 있다. 국민의 교육 수준이 높기 때문에 공정한 사회시스템을 가지게 된다. 이런 국가에서는 인도와 같이 선거용 정책이 불가능하다. 부정부패도 금세 탄로난다. 경제정책도 장기적 안목에서 추진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언론에 보도되어 자체 정화 과정을 거친다.

존스홉킨스대학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Francis Fukuyama)가 ‘트러스트(Trust)’란 책에서 주장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도 인간개발지수와 비슷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요즘 용어로 보면 국격(國格)이라고 할까? 예를 들어 특정국가의 20년 만기 국채에 투자할 경우 당장의 금리나 환율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자본의 성숙으로 해당국가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 여부가 보다 중요하다.

인간개발지수 순위를 보면 PIIGS 국가에 속해 있던 아일랜드는 여타 국가와 달리 빠르게 글로벌 복합위기에서 빠져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위가 급상승 중인 한국에서 최근 외국인 투자가들의 동요가 없는 것도 바로 한국의 사회적 자본에 대한 높은 평가로 볼 수 있다. 우리가 보기에 문제가 많은 한국이지만 인간개발지수로 한정해서 세계 전체로 보면 그래도 투자하기에 매력적인(?) 국가다.

금융시장적 관점에서 한국을 평가해보면 경상수지 흑자와 외환보유고가 올해 사상 최대를 기록할 전망이다. 성장모멘텀은 다소 낮아졌지만 여전히 세계적 수준의 기업들이 즐비하다.

또한 1960년 4·19혁명,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민주화운동 등을 거치면서 한국은 사회적 자본을 축적해 왔다. 반면 이집트나 시리아의 사회적 자본 수준은 1960년대 한국보다 못하다. 중국도 큰 틀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동안 한국이 겪었던 많은 시련은 사회적 자본 측면에서 볼 때도 지금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이머징국가들은 이제 경제의 양적 성장 후유증을 사회적 자본 축적으로 치유해야 하는 단계에 진입했다. 그러나 아세안 국가들의 일반적인 교육기간은 5~6년에 불과하다.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짧은 교육기간 중 상당 부분이 코란을 배우는 종교적 측면이 강하다.

올해 미국 국채 금리와 이머징마켓의 채권금리는 90%나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다. 주가도 비슷하게 움직이는 정도가 80%나 된다. 미국에 의해 세계 금융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미국 경제는 세계 경제 중 가장 안정적이다. 이런 호조세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라서 달러가치도 강세를 유지할 전망이다. 따라서 미국으로 자금이 역류하는 현상은 상당 기간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달러 역류현상을 방어하는 체력이 관건이 된다. 다행히 이머징마켓의 가계부채 규모는 낮은 수준이다. GDP 대비 외채 비중도 과거 위기 때보다 낮고 외환보유고도 다소 여유가 있다. 단기외채 비중은 GDP의 3~4%에 불과하다. 다만 인도의 경우 단기 외채 비중이 10%대에서 25%로 빠르게 증가한 점이 우려된다. 인도네시아 증시에서 외국인 투자가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는 부담도 있다. 또한 이머징마켓 금융불안의 단기 원인이 미국의 출구전략에 있기 때문에 아직 안정적인 국가들도 언제든지 전염의 가능성을 열어 둬야 한다. 따라서 전반적인 금융시장의 안정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짧게는 9월 미국의 출구전략의 가시화 여부가 모멘텀이 될 전망이다.

한국은 이머징마켓의 위기가 금융시장보다는 실물 경제 측면에서 더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올 들어 한국의 인도네시아 수출은 전년 대비 -16%, 인도는 -6%에 이르고 있다. 21세기 한국 경제 성장의 모멘텀은 수출이다. 특히 선진국에서 이머징마켓으로 수출지역이 다변화된 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다. 올 7월까지 한국 수출의 60%를 이머징마켓이 차지했다.

따라서 이들 지역이 국내적 모순을 빨리 극복하지 못할 경우 한국 경제의 핵심인 수출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일단 해당국의 경상수지 안정 노력에 관심을 갖고 예의 주시해야 한다. 반대로 미국의 출구전략 속도도 중요한데, 미국의 경기 회복세가 미세하게 둔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출구전략의 속도와 시기는 예상보다 완만할 전망이다. 따라서 완벽한 금융위기로의 확산보다는 그동안 과속성장에 따른 깊은 조정으로 이해하고 대응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홍성국

KDB대우증권 부사장ㆍ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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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국 KDB대우증권 부사장ㆍ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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