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TV 연예 프로그램에서 얼굴에 검은 분장을 한 출연자들.
각종 TV 연예 프로그램에서 얼굴에 검은 분장을 한 출연자들.

“한국의 방송들은 ‘검은 얼굴(Black Face)’ 사용을 중단하라!” 이런 청원운동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처음 들어본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청원운동이 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약 5000명이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점이다. 숫자도 늘고 있다.

한국의 주요 도시에서 활동하는 비한국인(저자의 요청에 따라 non-Korean을 ‘외국인’이 아닌 ‘비한국인’으로 번역) 단체들이 지난 몇 개월 동안 한국 TV방송사의 ‘검은 얼굴’ 사용을 막기 위한 온라인 및 오프라인 회의를 열어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검은 얼굴이 뭐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바로 이 질문에 이 문제의 모든 게 담겨 있다.

‘검은 얼굴’이란 흑인이 아닌 배우(대개는 코미디언인 경우가 많다)가 분장으로 흑인인 척 연기하는 것이다. 이런 쇼는 미국과 유럽에서 1800년대와 1900년대 초까지 존재했던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를 연상시킨다. 오늘날 ‘민스트럴 쇼’는 서구에선 심각한 인종차별적 모욕 행위로 치부된다. 민스트럴 쇼는 백인이 흑인 분장을 하고 흑인 노예, 이민자들을 흉내 내는 쇼다. 서양에서 흑인 분장은 금기시된다. 이들이 과거에 같은 인류에게 가했던 끔찍한 억압의 역사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한국 방송에는 개그 소재로 ‘검은 얼굴’, 즉 우스꽝스러운 흑인 분장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검은 얼굴’ 사용 중지 청원은 지난 여름 KBS의 간판 예능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한 장면으로 촉발됐다. ‘대학로 로맨스’라는 이름의 코너에서 개그우먼 허안나가 아프리카 부족의 여성처럼 분장을 하고 등장했다. 이 분장은 인터넷을 타고 널리 퍼지며 네티즌의 분노를 샀다.

오늘날 한국에도 흑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의 과거 고통에 대해 무지하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배려 없는 태도다. 주요 방송사가, 물론 처음 있는 일도 아니지만 이런 방송 내용을 허가한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불쾌하며 놀랍다. 그러나 이번엔 분노에 받쳐 절규하는 비한국인들이 조금은 시야를 넓혀 사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유럽과 미국에서 흑인으로의 분장은 금기다. 이 두 대륙은 17~19세기 노예 무역으로 오늘날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두 대륙의 사람들이 흑인 분장을 금기시하는 것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이유가 있다. 흑인 분장은 백인들이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에 대한 윤리적 면죄부로 삼기 위해 그들을 종속적 존재로 여겼던 추악한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에는 이런 역사가 없었다. 그러므로 흑인 분장이 한국에서 금기시될 이유는 없었다.

한국에 서양의 잣대를 들이밀며 특정 문화현상을 멋대로 폄하하고 평가하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 그럼에도 다문화사회 시대에 한국의 방송사 PD들이 ‘검은 얼굴’이 특정 사회에 어떤 의미이며 이로 인해 이들의 분노를 살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알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서양인들 역시 분노를 잠시 접어둬야 한다. 자칫 “한국인들은 모두 인종차별주의자야”란 식의 일반화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또 내 사진을 보고 ‘흑인도 아닌 사람이, 뭘 안다고 지껄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맞다. 난 흑인이 아니다. 하지만 난 과거에 부당한 인종차별주의적 억압을 받았던 유대인이다. 한국 사회에 반유대주의가 표면적으로 만연해 있진 않지만 한국 사회에서 보여지는 어떤 일들이 내 피를 끓게 하기도 한다. 오늘만 해도 그런 일이 있었다. 서울 충무로의 한 오토바이 가게 앞을 지나갔는데 그곳 직원 한 명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헬멧을 쓴 해골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헬멧엔 ‘SS 표식’이 박혀 있었다. ‘SS 표식’은 2차대전 당시 주로 포로수용소에서 유대인 학살을 업무로 삼았던 군부대 슈츠슈타펠(Schutzstafel)을 상징한다. 슈츠슈타펠은 잔인할 정도로 효율적인 조직이었다. 유대인 600만명이 이들 손에 죽었다. SS 표식은 번개 모양과 비슷하다.

서울에서 SS 휘장이 박힌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찾기란 (슬프게도) 제법 쉬운 일이다. 최근에 한 모자 제조업체가 이 표식을 야구 모자 정면에 박아 넣은 제품을 대량 제조했다. 5년 전쯤엔 오토바이 동호인 사이에 나치 장교 헬멧처럼 생긴 오토바이 헬멧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런 헬멧 중엔 나치의 상징인 갈고리 십자가 스와스티카(swastika)를 새긴 것도 있었다.

1년 정도 전엔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 카카오톡에서 새로운 이모티콘을 사용자에게 제공했는데, 나치 정복을 완전히 갖춰 입은 채 붉은 눈에 미친 듯한 표정을 한 나치 군인 캐릭터가 사방으로 기관총을 발사하는 이모티콘이었다. 오토바이를 탄 역사에 무지한 퀵서비스업 종사자를 봤을 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나였다. 하지만 카카오톡 같은 큰 회사가 이토록 문화적으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카카오톡은 구글처럼 세계적 기업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카카오톡 웹사이트를 통해 항의했지만 회사 측으로부터 아무런 회신도 받지 못했다. 다행히도 그 이후로 이 끔찍한 이모티콘이 사라졌다. 카카오톡은 이와 비슷한 이모티콘은 더 이상 개발하지 않았다.

더욱 잘못된 것은 심지어 나치에 헌정된 바(bar)도 있다는 것이다. 10년 전에는 이런 것들이 3개쯤 있었는데 그중에는 서울 신촌에 ‘제5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나치 깃발과 기념품으로 장식되어 있고 심지어 자칭 ‘히틀러’라고 하는 웨이터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바도 있었다. 나치는 스스로를 제3제국이라 칭하고 곧 이어 독일이 세계를 지배하는 제4제국이 올 것이라 주장했는데, ‘제5제국’은 그 후예를 칭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유대인으로서 나는 이런 것을 보면 피가 얼어붙는다. 때로 이런 생각이 든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아시아 각국을 침공했을 때 해군에서 사용했던 깃발 ‘욱일승천기’를 옷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나 일본 식민지 시대를 찬양하는 바를 본다면 한국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만일 또 하나의 나치 바가 개업한다면 ‘가서 벽돌로 유리를 깨부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나는 다른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여긴 유럽이 아니고 미국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유대인이 뭔지도 모르고 나치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한국에서 나치를 찬양하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만일 나치와 그 동맹국인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겼다면, 한국은 아직까지도 일본의 식민지일 테니까. 한국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 나치를 더 경멸해야 할 이유가 있다.

‘검은 얼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치 ‘패션’도 말이 안 되는 거지만, 한국에서 이런 게 나오는 이유는 인종적 증오 때문이 아니라 무식해서다. 어떤 경우라도 한국인들은 21세기에는 더욱 더 민감하게 이러한 과오를 퇴치해야 한다. 이제는 세계 각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한국을 고향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비한국인은 이런 상황에서 차분한 이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조화로우며 세계화된 국가가 되기를 배우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실수를 하기는 쉽다. 단어와 상징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그중 어떤 것이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지 알기는 쉽지 않다. 분노와 무지가 아니라 교육과 문화 간 토론이 답이다.

말이 나온 김에 말이지만 한국에 인종차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라디오 방송국 PD로 일하던 어느 날 저녁, 나는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 중에 제일 재미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한국에 2년째 살고 있는 흑인 미국인이었다. 영어로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었던 나는 그때 하고 있었던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와주지 않겠는가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하고 싶은데, 못해요. 난 대전에 살거든요.” 나는 물었다. “왜 거기 살죠?”

그는 대답했다. “나도 서울에 살고 싶지만 거기선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요. 이력서에 붙인 사진을 보면 아예 면접도 안 하려고 해요. 유일하게 대전에서 와달라고 하는 데가 있어서 거기서 일하고 있죠.”

TV에 유명 인사들이 나와서 자기들이 ‘흑인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 용어가 사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politically incorrect)는 점을 생각 못하고 말이다. 흑인들 소유의 음악이란 세상에 없다. 비록 흑인음악이라는 말이 아주 거슬리는 단어는 아니지만, 어쨌든 인종적 고정관념을 강화하기 때문에 건전할 수는 없다. 사람의 피부색과 관련해서 일반화하기보다는 ‘힙합’ 혹은 ‘알앤비’ 혹은 ‘소울’ 음악이라고 하는 게 훨씬 좋다.

이와 비슷한 예로 한국 사람들 중에는 배달음식이 먹고 싶어졌을 때 “우리 ‘짱께’ 시켜 먹을까?”라고 말할 때가 많다. 아마 이런 말을 할 때 인종차별을 할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이런 사소한 것도 중요하다. 이런 식의 경멸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정적 고정관념을 강화시킨다. 한국에는 다른 어떤 소수민족보다 중국인이 많이 살고 있다. 인종이나 국적을 가지고 차별한다면 한국에 좋을 게 없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때때로 지하철이 끊긴 늦은 밤, 택시를 타야 할 경우도 있다. 택시가 다가와서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걸 알면 절반 정도는 그냥 가버린다. 어떤 때는 후드티의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한국인인 것처럼 해본다. 그래도 소용없을 때도 있다.

택시 운전사들이 내 피부색을 보고 지나쳐 가버리면 나는 이 나라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잘 모르는 곳에 택시를 타고 갈 때 택시운전사가 일부러 돌아가면서 요금이 더 나오게 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한두 번 있다.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환영받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어떤 비한국인은 택시운전사가 미터기에 나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요구했던 경험도 있다. 아마도 비한국인이면 길을 잘 모를 테니까 쉽게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비양심적인 택시운전사들일 것이다.

택시 요금을 내지 않고 내뺐다든지, 택시운전사의 부당한 처사에 심하게 말싸움했다든지 하는 걸 자랑 삼아 얘기하는 비한국인도 있다. 아마도 과거에 그런 식으로 비한국인에게 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택시 운전사들도 밤중에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 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옳지 않다. 술에 취해 나쁜 행실로 다른 이들의 평판까지 망친 술 취한 비한국인들은 ‘외국인들은 골치 아프다’는 부정적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피부색이 다르다 해서 그냥 지나쳐버리는 택시운전사도 한국에 대한 인상을 망가뜨린다. 외국인 투자자나 외교관이 밤늦게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데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빗속이나 추위 속에서 장시간 서 있다고 상상해 보라.

“한국에는 위험한 인종주의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한국인들은 위험스럽게도 인종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크게 다르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다문화주의의 초기 단계에 있다. 비록 100만명 이상의 비한국인이 이 나라에 살고 있지만 90% 이상의 한국인이 인종적으로 한국인이다. 이민자와 혼혈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수가 늘고 있는 지금, 한국은 1950년대 초기의 영국 혹은 그보다 더 이전의 미국과 같은 시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영국이나 미국과는 달리 한국은 이런 새로운 사회적 시기를 아무것도 모른 체 맞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지금까지 다문화주의가 다른 나라에서 어떻게 잘못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혜택이 있다.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했던 실수를 반복할 필요가 없으며 현재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인종주의를 불식시키거나 적어도 감소시켜려고 노력할 방법을 찾을 시간이 있다.

얼마 전 미국의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일어났던 인종문제 관련 폭동이나 2011년 런던 폭동이 보여주듯이 미국이나 유럽연합(EU)에서 인종차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른 인종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국가란 이 지구상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현재 한국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역사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엄청난 이점을 가지고 있다. 인종주의를 없애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한국에 살고 있는 비한국인들도 한국의 역사를 형성해 갈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우리들은 한국어를 익히고, 한국 문화에 대해 배우고, 한국인이 뭔가 우리를 화나게 하는 일을 하면 조용하게 우호적 방식으로 소통함으로써 한국인을 도울 수 있다. 우리는 선구자들이다. 다문화적 한국 사회라는 새로운 세대의 첫 주자들이다. 우리의 행동은 앞으로 올 수백 년 동안 빛나는 모범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과오를 범하면 바로잡는 데 수백 년 걸릴 수 있는 사회적 상흔을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모두가 한국의 인종주의에 대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퍼거슨에서 일어난 일 같은 것이 그저 남의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일이 대구, 부산, 서울의 거리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유명한 공상과학소설가 H.G. 웰스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국적이란 없다. 인류만 있을 뿐이다.” 이 나라의 한국인도 비한국인도 그런 식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한국에 인종이란 없으며 인류만 있을 뿐이라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도 이런 식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아이들 피부색이 어떻든지 간에.

팀 알퍼

1977년 영국 출생. ‘런던 스쿨 오브 저널리즘’, 켄터베리 소재 켄트대학 졸업(철학·영화 전공). 런던에서 프리랜서 번역가, 스포츠 기자로 일함. 서울에서 ‘korea IT’ 편집자, 교통방송 영어 FM 프로듀서, 대한항공 기내지 ‘모닝캄’ 영문판 편집자 등으로 일했음. 조선일보에 칼럼 연재중.

팀 알퍼 디자인하우스 기자 / 번역 김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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