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인기 절정인 아이돌그룹 빅뱅. ⓒphoto 조선일보 DB
일본에서 인기 절정인 아이돌그룹 빅뱅. ⓒphoto 조선일보 DB

“일본에서의 한류는 죽었다.” “일본에서 한류가 식어가고 있다.”

한국 언론이 ‘한류’를 이야기할 때마다 거론하는 화두다. 그래서인지 대중에게도 이같은 인식이 정설로 굳어진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아니다”이다. 한류는 식지도 죽지도 않았다. 왜 일본에서 한류가 식지도 죽지도 않았는지를 얘기해 보자.

며칠 전 딸의 고등학교 친구인 J(대학 1년생)로부터 자신의 엄마에 대한 불만이랄까 하소연을 들었다. “엄마가 한국 드라마 보느라고 밥도 잘 안 해 줘요. 아빠와 동생은 회사나 학교에서 돌아와 직접 끼니를 챙겨 먹어야 할 때가 많아요.”

J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는 엄마의 상태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족들의 애환을 줄줄이 털어놓았다. 그가 고등학교 시절 엄마가 일주일에 두세 번씩 가와사키에서 전철로 2시간 가까이 걸리는 신주쿠 코리아타운으로 가 드라마에 나왔던 배우들의 사진을 사왔고, 돌아오는 길에 한국 식품을 사오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여긴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가는 자신의 집 식탁이 매운 한국 음식으로 점점 변해가고 있다고 깔깔대기도 했다. 그랬던 엄마가 이제는 한국 드라마에 빠져 가족들의 식사조차도 제때 챙겨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털어놓는 것이다.

엄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J 또한 한국 드라마에 빠진 매니아다. 아이돌 스타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는 거의 다 봤다고 한다. 그의 아빠도 마찬가지로 사극 매니아다. ‘대장금’ ‘이산’ ‘허준’ ‘주몽’ 등 일본에서 DVD로 구할 수 있는 한국 사극은 빠짐없이 봤다고 한다. 주말이면 일본 최대의 렌털숍인 ‘쓰타야(TSUTAYA)’에 가서 일주일 동안 못 본 한국 드라마를 한 아름 빌려와 본다고 한다. 때문에 가끔씩 퇴근 후 아내가 저녁 준비를 해 놓지 않았어도 한번 힐끔 쳐다볼 뿐 부부싸움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재미있는 현상은 이같은 가족 단위의 한국 드라마 매니아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9월과 10월에 주말이 낀 3~4일 연휴가 두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쓰타야’의 한국 드라마 코너가 텅텅 비었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한 중견 배우는 연휴가 끝난 뒤 TV에 출연해 연휴 동안 자기가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를 보려고 ‘쓰타야’를 갔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빌려가 보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한 적도 있었다.

2003년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가 방영한 ‘겨울연가’의 히트로 촉발된 한국 드라마 열풍은 ‘아줌마 군단’이 불을 지피고 이어서 남편들이 사극에 동참했고 그 후에는 아이들까지 K팝에 열광하기 시작, 자연스럽게 가족 단위의 한류 매니아들이 형성돼 왔다.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식지 않았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우선 최근 일본 민방에서의 한국 드라마 방영이 급증했다는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의 제2기 내각 출범 후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반한적 기조로 야기된 극우인사들의 혐한 운동은 공영방송인 NHK와 민방들을 움츠러들게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 아베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방송사들에 한국 드라마 방영 자제를 요구하는 바람에 일본 방송사들은 ‘자숙’이라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한동안 정부 눈치를 봤다. 덕분에 약 2~3년 동안 지상파 방송에서 한국 드라마 방영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한국 드라마가 전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지상파 방영 횟수가 줄어든 대신 지방 방송사나 케이블TV의 방영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쓰타야’의 한국 드라마 DVD 렌털은 주말이면 없어서 못 빌릴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또한 유료 한국 전문방송 KN-TV 가입자 수가 급증했다. 눈에 쉽게 띄는 지상파 방송에서만 잠시 주춤했을 뿐이었다.

올해 들어서는 지상파 방송사도 결국에는 경제적 이유로 두손을 들고 말았다. 한국 드라마는 늘 높은 시청률을 유지해 왔다. 가난한 여주인공과 재벌집 아들, 그리고 출생비밀과 불치병이 반드시 등장한다고 연일 비판을 해대면서도 그들은 TV 앞에 앉아 한국 드라마를 봤다.

이같은 한국 드라마 팬들의 절대적 충성심은 곧 시청률로 연결되고 이는 바로 광고 수주로 이어진다. 엔화를 들여 자체 제작하는 것보다 10 대 1의 환율인 한국 드라마를 싸게 사와서 방영하는 것이 경제적인 면에서 훨씬 이득이다.

공영방송인 NHK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도 대인기를 끌었던 김수현·한가인 주연의 ‘해를 품은 달’을 지난해 1월에 NHK 위성방송(BS) 채널로 방영했다가 시청자들의 읍소에 가까운 지상파 방영 요구로 마침내 올해 7월에 방영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과정은 2003년 ‘겨울연가’의 흥행 공식과 똑같다. 당시에도 처음에는 위성방송에서 방영했다가 시청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지상파 방송에서 재방영, 4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때 NHK는 ‘겨울연가’ 한 편으로 일본 내에서의 DVD 제작, 각종 저작권 판매 등 100억엔이 넘는 이윤을 남겨 한국 드라마 붐의 시위를 당기는 초석이 됐다.

한국 드라마 붐이 죽지 않았다는 또 하나의 증처가 있다. 취재 현장에서 마주치는 일본인들을 만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식 이야기가 나온다. 그럴 때마다 빠지지 않고 묻는 것이 한국 욕이다. 자신의 아이들이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욕을 외워서는 대화할 때마다 적절하게 섞어 사용하는데 도대체 그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어오는 것이다. 개X끼, X발, X발놈, 미친놈, 이눔아 등등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이 험악한 욕들을 일본 아이들이 일상생활의 대화에서 섞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K팝은 어떠한가. 한국 음악 역시 ‘이래도 되는 건가?’ 일본인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올해 초 배우 이준기의 앨범 ‘마이 디어’를 필두로 동방신기, JYJ, 장근석, 빅뱅, 씨앤블루, 소녀시대, 샤이니, 2PM의 음반이 음악 전문기관인 오리콘 차트에서 장기간 1위를 했거나 상위권을 유지했다. 이번주 오리콘 차트 1위도 지난 10월 29일에 발매한 빅뱅 멤버 대성의 앨범인 ‘디 라이트’였다.

이처럼 일본에서의 한국 가수들의 활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활발해지면서 그 성과도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2014년 상반기 오리콘 수입음반 톱 50위’에 무려 21개의 한국 가수 음반이 올랐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다. 그래서인지 한국 가수들이 일본 공연을 하게 되면 극소수의 가수를 제외하고는 매진 사례를 기록한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한국 가수는 역시 이번주 오리콘 차트 1위를 한 빅뱅이다. 동방신기나 JYJ, 장근석, 빅뱅은 톱스타로서 오리콘 차트에 수차례 1위를 차지했을 만큼 고정팬이 많은 안정된 기반을 닦아 놓은 상태이고 그 뒤를 이어 씨앤블루, 샤이니, 인피니트, 제국의아이들, 2PM, B1A4, B.A.P, 위너 등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본 내에서 인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반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걸그룹 신드롬이 생길 정도로 인기 절정이었던 ‘소녀시대’와 ‘카라’의 활동은 요즘 뜸한 편이다.

바로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걸그룹이 에이핑크. 이들은 일본에서 ‘노노노(NoNoNo)’로 데뷔하자마자 오리콘 차트 4위까지 랭크되는 기염을 토했다. 크레용팝도 일본에서 주목하는 걸그룹 중 하나다.

한국 가수들의 일본 내 활동을 보면 ‘일본에서 한류가 죽었다’라는 말이 얼마나 무색한지를 잘 알 수 있다. 2013년 연간 싱글·앨범 톱 100명 안에 한국 가수 11명이 들어가 있고 얼마 전 ‘콘서트 프로모터스협회’가 발표한 ‘2013년 기초보고서’에 의하면 한국 가수들의 일본 공연 횟수는 전년대비 무려 163.9%나 증가했다.

유재순 JP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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