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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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년차 대학생이다. 1년 전 졸업학점을 다 따고도 학생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취업을 하든 인턴직을 얻든 학생 신분이 유리할 것 같다는 판단에서다. 대학에는 ‘NG(No Graduate)족’으로 불리는 졸업유예자가 득실거린다. 최근 구조조정 압박을 받고 있는 대학은 학칙을 개정해서라도 NG족을 빨리 학교 밖으로 내보내려 하고 있다. 대학은 NG족 관리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도 대학 문을 나서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게 아니다.

일자리를 구한다며 집 밖에서 생활하다 보니 가장 궁한 것은 돈이다. 몇 주 전 27살 나이가 다 저물어갈 무렵에는 차비마저 바닥났다. 아끼는 옷가지부터 급하지 않은 물건은 다 처분했지만 참으로 곤궁했다. 지난 1년간은 좋아하는 새 옷도, 모임도 끊었다. 시험과 면접 일정에 온 정신을 쏟아야 하는 취업시즌에는 아르바이트도 하기 쉽지 않았다.

그렇게 곤궁함이 한계에 다다른 2014년 12월 말, 나는 새벽 어스름 속 행렬에 동참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연회장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하객으로 방문하기엔 이른 새벽, 나는 송년회 만찬장 주방보조 아르바이트 소집장에 도착했다. 용돈은 다 떨어지고 더 이상 부모님께 손 벌릴 면목이 없어지자 급히 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모인 알바생들은 눈대중으로 봐도 갓 스물을 넘긴 젊은이가 대부분이었다.

소집시간은 새벽 6시 반, 해산시간은 밤 9시 반. 시급은 7시부터 쳐 준단다. 산업혁명 초기 비인간적인 노동 착취가 떠올랐다. 들려오는 비정규직 확대 소식들에 아직 취업문을 뚫지 못한 나도 이미 ‘미생’의 마음이었다. 급전이 아쉬웠기 때문에 최대한 오래 일하고 바로 급여를 받을 수만 있다면 고용주가 갑의 횡포를 부리는지 묻고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장장 14시간의 노동에 뛰어들었다.

소집된 인력 40여명이 메인주방과 홀주방 두 곳이 각각 자리한 3개 층에 배치됐다. 나는 가장 힘들다는 메인주방에 배치됐다. 주방 바닥 청소와 식재료 다듬기를 했다. 이후 오전 11시부터는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혼자 맡아 주방에서 준비된 음식을 아래층의 홀로 내려보냈다. 문제는 밀려드는 빈 그릇이었다. 2000명의 하객은 끊임없이 트레이에 빈 접시를 토해냈다. 2층, 5층을 각각 오가는 두 개의 화물 엘리베이터는 분초를 다투며 열려댔다. 두 엘리베이터가 동시에 당도하기라도 하면 카트에 접시를 겹겹이 쌓았다. 그리고는 세척실로 배달했다. 가는 길만 해도 족히 70m가 넘었고 복잡하기는 미로와 같았다. 코너와 커브에서 힘을 줄 때 갈비뼈가 거의 부서질 것 같았다. 나를 부리는 젊은 주방장은 잠시도 가만두지 않고 카트를 옮기게 했다.

30분을 정확히 재는 식사시간이 끝나자 목 축일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평상시 화장실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는 나였지만 어쩐지 10시간 동안 변의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두말할 것 없는 ‘노예’였다. 나를 잠시도 가만두지 않는 주방장을 등지는 순간마다 욕이 나왔다. 초연한 표정으로 나의 노동력을 감시하는 그는 문명이 비켜간 사람 같았다. 한 달 전에 일하러 왔었다는 22세의 한 여대생은 “오늘은 많이 널널한 편”이라고 했다.

다음 날 6만5000원의 일급이 통장에 들어왔다. 입출금 통지 문자를 보며 나도 모르게 구시렁댔다. “조금 더 일찍 그 일을 해봤어야 했다.” 돈을 버는 일이라고는 잠깐의 인턴생활이나 과외가 전부였던 나에게 연회장 알바는 큰 충격이었다. 몸 쓰는 일, 소위 노가다는 특히 대학 나온 여학생이라면 일단 번외 체험으로 미뤄 두는 일이다. 공부 잘해 이른바 명문대 가서 나름 곱게(?) 자랐는데, 27살 나이에 최저시급도 못 받고 착취를 경험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이름 모를 누구에게 떠넘겼던 3D 허드렛일도 아쉬운 사람이 됐다.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주간조선의 인턴기자가 된 지 며칠 안 됐다. 이 신입 인턴기자는 3년 가까운 휴학과 1년의 졸업유예로 8년간 학적을 유지했다. 이쯤 되면 언론사에 입사하고자 10년 가까이 취재력을 다져온 ‘고수’로 비쳐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기자가 될 마음을 먹은 것은 불과 반년 전의 일이다.

맨 처음에는 5급 공무원이 되려고 했다. 그럭저럭 공부로 인정받아온 내가 계속 인정받기에는 행정고시 패스가 가장 그럴 듯했다. 2010년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책상을 박차고 나가기 일쑤였고 목표한 공부량을 채우는 것은 고행에 가까웠다. 고시 공부에서는 요행이 통하지 않는 반면 나는 일생토록 너무 요령대로만 살았다는 걸 절감했다.

결국 고시 공부를 시작한 다음해 1차 시험에서 낙방했다. 그후 1년간 고독을 참아내며 공부습관을 바꿨다. 2012년 2월 다시 1차 시험을 치르기 직전 학교 앞 고시원에서 한 달간 기거했다. 10시간씩 문제를 풀었고 점수는 대폭 상승세를 탔다. 하지만 시험 당일, 나는 무너졌다. OMR카드를 세 번 교체하고도 몇 개를 잘못 체크한 답안지를 내는데 이마에는 식은땀이 그득 차오른 상태였다. 이날 시험장 트라우마가 생겼다. 아쉬운 점수 차로 낙방했지만 다시 도전하는 것은 자학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해 겨울, 고시계에 담갔던 발을 완전히 뺐다. 앞으로는 형태를 막론하고 어떤 시험도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복학하고 보니 남들보다 졸업이 많이 늦어졌다. 그래도 주변 선후배들 입에서 오르내림직한 ‘인생이 꼬인’ 케이스에 근접해 가는 줄은 몰랐다. 공부한 것이 남 좋으라고 한 일도 아니었고 다만 조금 늦어진 것이라 낙관했다. 뉴스에 연일 취업난이 보도됐지만 내 얘기인 줄 몰랐다. 그때가 2012년 하반기, 2013년 상반기 즈음이다. 태평한 마음으로 취업난 뉴스를 보았다. 그것도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부모님의 속사정을 헤아리지 못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모님은 알고, 나는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나는 격동과 불안의 생애주기로 들어섰다.

경기도 부천 한 백화점의 주차 안내 아르바이트생. ⓒphoto 연합
경기도 부천 한 백화점의 주차 안내 아르바이트생. ⓒphoto 연합

2013년 하반기에 맨몸으로 구직을 시작했다. 약 50개 기업에 닥치는 대로 원서를 냈다. 서류 승률은 20% 남짓. 나름 선방했다. 고시를 준비할 때 시험장 트라우마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지만 할 수 없이 또 수험생이 되었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치른 인적성시험을 통과하더라도 면접에서 매번 탈락했다. 면접장에서 “정말 일하고 싶다”는 읍소가 나오지가 않았다. 면접관에게 어필할 직무능력도 없었지만 수십 년 경력의 베테랑 면접관은 내가 남들보다 덜 절박하다는 것을 나보다 더 잘 알아차렸던 것 같다. 잘나가다가도 황당한 답변을 내지르고 나오기도 했다. 거의 매번 떨어질 것을 직감했고, 마지막 면접시험을 볼 때까지 합격자 명단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나는 그때마다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탈락하고는 안도하는 스스로를 이해하게 된 것도 불과 반년 전의 일이었다.

자기소개서를 쓰고, 무작위로 원서를 내고, KTX를 타고 지방에 면접을 가서까지 결국 모든 것을 망쳐버린 이유는 두 가지다. 고용 시장이 악화된 것과 내가 절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점점 닫혀 가는 고용 시장에 너무 늦게 들어섰다. 들어찬 나이와 변변찮은 스펙을 감안하더라도 같은 노력으로 동기들이 겪은 것에 비해 좁아진 문을 통과해야 했다. 실제로 2012년에 취업 시장에 뛰어든 또래 중 몇 명은 나와 비슷한 스펙과 수험 이력으로 30대 대기업에 들어갔다. 또 2011년, 2012년 취업 시장에 진입한 경우 3수를 넘기는 경우가 잘 없었다. 내가 두 번째 맞은 취업시즌인 2014년 상반기 서류전형 승률이 5% 미만으로 처참하게 추락한 것도 구직자 적체가 매 시즌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실제 2012년 56.1%를 기록했던 대졸자 취업률은 2년 연속 떨어져 2014년 54.8%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나와 같은 NG(No Graduate)족을 제외하고 순수 졸업생만을 대상으로 산출한 것이다. 특히 인문계 구직자 사이에는 ‘인구론(인문계는 90%가 논다)’이라는 신조어까지 나돈다. 기업이 정부 눈치를 보며 채용인원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듯한 상황에서 주변에 경쟁자가 계속 쌓이는 기존 구직자들은 매 시즌 ‘취업 상황이 더 나빠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적체된 NG족들을 대학에서 대거 내보내면 취업률 통계는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아니, 취업률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반년이 지날 때마다 급격히 늘어나는 구직자, 그리고 경쟁력을 잃어버린 나이는 명백한 나의 실패 요인이다. 그러나 나 역시 면접관 앞에서 남들보다 애절하지 않았다. 분명히 나는 벼랑 끝까지 몰려 있었다. 대학 학비를 대기 위해 아버지가 받아주신 대출금을 올해부터 갚아야 한다는 통보가 왔다. 실은 작년 재작년, 학적부가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미 나는 학자금 상환을 걱정하고 있었다. 간절해야 했고 절박한 줄 알았다. 하지만 대출금 상환 통보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한테 맞지 않는 직장은 거르고, 하고 싶은 일만 하겠다는 욕심이 여전히 내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스무 번가량 면접을 거치고 수십 개의 면접스터디를 거치며 친구들의 호소를 곁눈질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구직을 되풀이할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되뇌기 시작했다. ‘인생은 너무 긴데.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정말 이기적이었다. 다른 취업준비생은 뭐 딱히 좋아서 하겠는가. 생각했던 일이 아니라는 신입사원 친구들의 우는 소리에 나는 말할 자격이 없었다. 싫지만 참아내는 것이 성인의 의무이자 숙명인데 나는 아직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2014년 늦은 봄. 나는 그렇게 취업 3수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구직 여정 1년 반 동안 두 차례 인턴으로 일했다. 두 번 다 우연히 공고를 보았는데 운이 좋아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다. 보수와 대우는 최저시급에도 못 미쳤으나 돈을 떠나 경험이 아쉬운 나는 일단 일하고 봤다. 첫 번째 일은 공기업 사무직이었다. 공기업의 관료적 분위기, 하루 종일 앉아 있기, 시류와 무관하게 반복되는 업무 규정을 살피는 일은 정말 재미가 없었다. 여기서 나는 나와 맞지 않는 기업 문화와 직무를 알았다.

두 번째 일은 국회 인턴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시사에 까막눈이었지만 국정 업무를 보좌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이 한 몸 살기도 벅차다’며 세상 돌아가는 일을 외면하고 너무 오래 바보로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눈이 트인 이상, 잘못된 일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 바꿔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세상이라는 것을 알았고 부조리와 비효율적인 정책을 더 좋게 만들 방법을 고민했다.

십대 이후 처음 자아성취감을 느꼈다. 감격적인 일이었다. 문득 스무 살 신입생 때 교수님께 들었던 칭찬이 떠올랐다. “글에 소질이 있다. 정말 분석적이다.” 그렇게 나와 맞는 업무 한 가지를 찾아냈다. 국회 인턴을 하면서도 기자라는 답을 바로 얻지는 못했다. 총무 업무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3월경 국회 일을 관두었고, 또다시 방황과 좌절을 거듭했다.

다만 세상 알기를 멈추지는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작년 6월, 언론사 준비를 시작하기까지 보지 않던 신문을 보고 부지런히 상식용어를 공부했다. 과제가 아니면 손대지 않았던 책도 즐겼다. 무식자를 자처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던 내가 세상에서 들리는 소식에 분개하고 더 좋은 세상을 고민했다. 나아가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자 했다. 비로소 나는 기자가 되겠다는 확고한 열망을 품었다.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직무와 상관없는 인턴 경험을 자기소개서에서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참으로 모를 말이다. 막연하게 했던 경험과 맞지 않았던 일을 반추하며 적성을 찾고 진로를 설계해 나가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나 갖는 권리다. 그것은 직업을 택해 인생을 꾸려야 하는 인류가 가진 만고불변의 생래다. 수차례 경험해야 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서 적성을 찾을 수 있어야 하며, 생각했던 진로가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당면한 현실은 청년들이 당연히 부여받아야 하는 막연한 경험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우리는 무급 인턴도 감사히 여기는 가여운 세대다. 신입 네 명 중 한 명이 입사 1년 내에 퇴사하고 그들 상당수는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긴다. 하지만 그들에게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는 지금 진로를 찾는 과정에 있을 뿐입니다.”

최근 모교에 “부모에게 내복 사드릴 돈도 없다”며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비판하는 벽서가 붙었다. 정규직의 문턱을 넘어야 비로소 떳떳한 자식으로 인정받는 것이 최근의 트렌드인데, 최 부총리와 정부 당국은 정규직 대신 비정규직 문턱을 낮춰주겠다고 한다. 비정규직 고용기간을 4년으로 늘려주는 고용유연화는 그야말로 ‘마땅한 자식된 도리’의 기준을 아주 낮춰주려는 사려 깊은 처사일지 모른다.

관심법이라도 쓰는 것인지 정부는 나약해진 구직자들의 마음을 훤히 꿰뚫었다. 2014년 늦은 봄, 나 ‘왕고언니’는 후배들과 함께 한 임시 면접스터디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이대로는 정규직, 비정규직 다 무의미해질 거야. 죽어라 노력해봤자 먹고살기 급급한 세상이야.” 애들은 날더러 ‘특이한 사람’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그때 자리를 함께했던 후배들의 웃음 소리가 자꾸 사그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웃지 못할 후배들, 이미 웃을 수 없는 나 같은 NG족들을 위해 세상과 맞서고 싶다.

유혜진 인턴기자·고려대 경제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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