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3일 백악관에서 의회 지도자들과 마주 앉은 오바마 대통령. 왼쪽부터 낸시 펠로시 민주당 원내대표, 존 베이너 하원의장, 오바마 대통령,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미치 매코널. ⓒphoto AP
지난 6월 13일 백악관에서 의회 지도자들과 마주 앉은 오바마 대통령. 왼쪽부터 낸시 펠로시 민주당 원내대표, 존 베이너 하원의장, 오바마 대통령,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미치 매코널. ⓒphoto AP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6월 백악관에서 10분 거리인 의회를 자주 찾았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체결에 필수요소인 무역협상촉진권한(TPA)을 부여받기 위해서였다. 집권 민주당의 하원 원내대표인 낸시 펠로시가 오바마에 반기를 들고 앞장서 반대했기 때문이다. 펠로시 원내대표는 “미국을 위해, 미국의 노동자를 위해서는 반대표를 던져야 한다”며 오바마를 괴롭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하원 표결을 하루 앞두고 의회가 매년 여는 친선 야구경기 행사장을 깜짝 방문했고, 표결하는 날 아침에는 의원들을 직접 찾아가 ‘일자리’를 위해서 처리해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부결이었다.

이쯤되면 오바마 대통령은 “여당이 도와준 게 뭐냐. 왜 발목을 잡느냐. 정책 좀 해보려는데 친정이 더하네. 해당(害黨) 행위 아니냐”고 소리치며 펠로시를 “자르라”고 핏대를 올릴 법하다. 하지만 그는 다시 야당인 공화당의 자유무역 지지의원과 민주당의 지도부를 백악관으로 초대해 꼭 처리해 달라고 읍소했다. 도시 근로자와 노조가 핵심 지지기반인 민주당으로서는 다자무역협정이 가져올 미국 내 파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미국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고, 다른 나라 일자리만 늘렸다는 불만도 있었다. 대통령의 간곡한 호소에 협정 체결로 피해를 보는 노동자를 재교육하고 지원하는 법안을 반드시 처리한다는 약속을 받고는 재표결에서 대통령에게 TPA를 부여했다.

미국에서는 이처럼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을 관철하려면 의회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지지를 호소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기본적으로 대통령과 당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삼권분립이 철저하고, 미국 정당도 분권화가 확실하기 때문에 여당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대통령의 노선을 따를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당 지도부가 소속 의원에게 당의 노선에 따른 ‘당론 투표’를 강요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대통령의 ‘말발’이 먹히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대통령이 공천권을 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선출직은 기초단위부터 경선을 거쳐 자신의 실력으로 올라온다. 낙하산 공천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설혹 그런 식의 공천이 있더라도 지역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버티지 못한다. 당 조직을 봐도 상·하원 선거운동위원회는 대통령 위주로 움직이는 전국위원회와는 별 상관 없이 개별적으로 활동한다. 전국 단위 조직이 각 주(州)에 간섭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철저하게 의원이나 후보자 위주여서 권력이 아무리 있다 해도 별로 효과가 없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6월 29일 백악관에서 TPA 부여 법안과 근로자 지원 내용이 담긴 무역조정지원제도(TAA)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고 행정부로 넘어오자 이에 서명하고는 한마디 했다. 그는 “법안 통과가 순탄치 않았다. 길고 열정적인 논쟁을 거쳤는데, 그게 바로 우리의 민주주의”라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평소 좋아하던 민주당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과 이 문제에서만큼은 팽팽한 논쟁을 벌였다. 공화당이 ‘집안 단속을 잘하라’고 조롱하고 서로 얼굴을 붉힐 정도였지만, ‘진보의 총아’라고 불리는 워런 의원은 자신의 소신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도 끈기 있게 그를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 때문에 미국 대통령의 가장 큰 덕목이 ‘인내’이고, 절실히 필요한 게 ‘설득력’이라는 말도 있다. 이번 TPP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오바마 대통령의 총력전을 보면, 미국 대통령과 의회, 정당의 관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중간선거가 끝나자마자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했다. 비록 선거에서는 졌지만, 자유무역에 찬성하는 공화당이 상원 다수당이 된 것을 계기로 TPP를 처리하자는 생각이었다. 이 회의는 14차례나 이어졌고, 장관들이 대거 합류했다.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민주당 의원들에 대한 설득작업도 그때 들어갔다. 오바마 대통령의 한 고문은 의원들과 400차례 가까운 모임을 가지면서 공감대를 만들어갔다. 부처 장관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논리를 만들기도 했다. 당연히 오바마 대통령도 의원들에게 전화를 여러 차례 걸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지난 6월 초에는 독일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하러 가면서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에 민주당 하원의원들을 대거 탑승시켰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TPP 관련 법안 통과를 위해 여당 의원들에게 ‘전용기 로비’를 한 것이다. 이밖에 오바마 대통령은 판사를 포함한 공직 임명 때 의원 의견 들어주기, 건설사업 우선실시, 선거운동 지원, 기밀정보 제공, 백악관 만찬 초대 등을 로비의 방법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TPP에 반대하는 재계(財界)를 달래는 일도 대통령의 몫이었다. 서부 오리건주에 있는 나이키 본사를 방문해 “TPP 체결이 늦어지는 동안 중국이 급부상해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원칙을 만들 수도 있다”고 설득했고, 나이키는 “TPP가 체결되면 일자리를 1만개 만들어내겠다”고 화답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가 8개월 뒤에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미국의 대통령은 일을 만들려면 야당과도 손을 잡고, 설득을 해야 한다.

설득의 리더십, 치유의 리더십, 경청의 리더십이 겹치면서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여러 건의 정치적 승리를 일궈냈다. 오바마 케어(의료보험 개혁)에 연방정부의 보조금 지급이 합헌판결을 받았고, 동성결혼이 전국적으로 합법화됐다. 쿠바와의 대사관 재개설도 공식 발표했다. 흑인교회에 대한 무차별 총격사건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인종의 문제를 정면 제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희생자의 장례식에 참석해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노래 부르는 걸로 증오가 아닌 화해, 배려, 용서의 미덕을 보여줌으로써 ‘최고의 한 주’를 만들어냈다.

이런 성과는 오바마 대통령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졌다. CNN 조사 결과 국정 지지율이 50%였다. 2013년 5월, 53%를 기록한 이후 40%대로 떨어져 헤어나지 못하다가 2년여 만에 50%대로 오른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러나 욕심이 끝이 없어 보인다. 총기 난사사건을 앞세워 총기규제에도 나설 생각이고, 인종갈등 해소, 사법제도 개혁 등 굵직한 이슈도 임기 말 업적 쌓기의 하나로 만들 생각이다. 그는 백악관 참모에게 “임기가 끝날 때까지, 나에게 부여된 권한이 있는 한 한 가지라도 더 이뤄내기 위해 애쓰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할 일의 리스트는 아주 길다”고도 했다.

윤정호 조선일보 특파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