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는 유승민 원내대표. ⓒphoto 뉴시스
지난 7월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는 유승민 원내대표. ⓒphoto 뉴시스

“와 그라노.” 국회법 개정안으로 촉발된 대통령과 여당 원내대표의 갈등을 지켜보는 대구의 민심을 한마디로 요약한 문장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대구 출신 정치인이다. 대구에서 오래 정치 분야를 취재해 잔뼈가 굵은 언론인 이동관 대구매일신문 편집부국장의 말을 들어보자. “밖에서는 대구가 박근혜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추종한다고 생각한다. 60대 이상 노인 유권자들은 대개 그렇다. 오늘 아침만 해도 ‘유승민이가 뭘 잘했다고 계속 싸안고 가노’라는 항의 전화를 직접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승민 당장 사퇴하라”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유승민 대표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박 대통령이 거 좀 참, 끌어안고 다독거려 가지’라는 반응을 보인다. 박 대통령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는데 그때도 나오는 말은 ‘아이고, 와 그라노’다.”

“와 그라노”는 일종의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이 감정의 배경을 알려면 우선 대구 지역에서 유승민 원내대표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유승민 원내대표를 대구 지역 언론들은 ‘대구 지역의 맹주’라고 부르고 있다. 대구매일신문이 지난해 초 대구·경북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유승민 대표는 ‘대구·경북을 이끌 차세대 정치 리더’ 1위에 올랐다. “포스트 박근혜가 없다는 말이 최근 몇 년간 꾸준히 흘러나왔다. 박 대통령이 TK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차세대 TK 출신 리더를 잘 키우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유승민 의원이 유력한 포스트 박근혜로 꼽히고 있었다.”(익명을 요구한 대구시의회 의원)

대구에 지난 6월 29일 가보니 이번 사태 전만 하더라도 ‘유승민=포스트 박근혜’ 등식이 힘을 얻고 있었다. 유승민 대표를 “모시는 분”이라고 표현한 한 대구시의회 의원(재선)은 “TK(대구 경북) 리더들이 유승민을 밀고 있었다”고 말했다. 유 대표가 원내대표에 취임하며 내세운 방향에 대해서도 공감하는 사람이 많았다. 유 대표와 동기로 TK 지역 중견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한 인사는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당선된 박 대통령이 정작 경제민주화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유승민 대표가 그걸 다시 실천하겠다고 나선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대구에서도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유 대표가 제시한 따뜻한 보수의 길이 유권자의 마음을 돌려놓을 방법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냉정하다거나 고집이 세다,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K2 공군 기지 이전 문제를 2013년에 해결한 것은 문제 해결 능력뿐만 아니라 유승민 대표의 지역 내 인기까지 끌어올린 결정적 사건이었다. 대구 동구에 있는 K2 공군 기지는 소음과 개발 제한 문제로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 ‘숙원사업’이었다. 유 원내대표가 총대를 메고 나서 이전 특별법을 통과시키고 이전 계획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에 높은 점수를 주는 지역민이 많다. 대구시가 시민 3000명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K2 이전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92%에 이르렀다.

유 대표와 동기인 측근은 “사실 유 대표가 K2 이전에 사활을 걸겠다고 하는 걸 두고 말리는 사람이 대다수였다”며 “그런데도 몇 년간 혼자서 갖은 고생을 다 해 특별법을 통과시키는 걸 보고 강단 있는 정치인으로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특별법이 통과된 후 지난해 3월 대구에서 열린 보고대회에 참석했던 TK 정치인들은 한목소리로 유 대표를 치켜세웠다. 서상기 의원(대구 북을)은 “K2 이전은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한데, 박 대통령의 임기는 아쉽게도 5년이다”라며 “잘 마무리되려면 다음 대통령도 이 문제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유 의원 말고 다른 사람이 있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전까지 유승민 대표는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은 2세 정치인으로 평가되곤 했다. 유 대표의 부친인 유수호 전 의원은 법조인 출신으로 대구 중구 지역에서 13·14대 국회의원으로 일했다. 유 전 의원을 겪어본 사람 중 많은 이가 그를 호인(好人)이라고 평가한다. “의리 있고 멋도 있어 인망이 높은데 지역민들에게도 인기가 참 좋았다”는 게 당시 유 의원을 겪어본 지역 언론인의 말이다.

유수호 전 의원을 겪어본 나이 지긋한 사람 중에는 유 전 의원에 대한 믿음만으로 유승민 원내대표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다. 유 원내대표는 그런 아버지를 주말마다 대구로 찾아뵙는다고 했다. 사퇴 압박이 강했던 지난 6월 마지막 주 주말, 유 대표가 대구의 부모를 찾은 게 언론에 많이 보도됐다. 측근들은 “불가피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막차를 타더라도 주말마다 대구에 내려온다. 아버지가 머무는 요양병원에, 어머니가 있는 남구 대명동의 집에 반드시 들른다”고 전했다. 이번에도 유 원내대표는 고향 부모님 집에서 심란한 마음을 정리했다. “정치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유 원내대표 어머니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끼니 잘 챙겨 먹고 다니라는 얘기만 했다”는 게 측근의 말이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합리적이고 학구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소신을 좀처럼 굽히지 않는다. 유 대표를 오래 알아온 정치인 출신 지역 공무원의 말이다. “친박(親朴)으로 분류되던 때 유 의원은 자신의 역할이 박근혜 당시 당대표의 하수(下手)나 보좌관이 아니고 스태프라고 말해왔다. 동등하다는 말이다. ‘눈치만 보는 일은 하지 않겠다, 동반자로서 함께 크겠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대표적인 일 중 하나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변인에 인선됐을 당시에 유 대표가 지역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윤 전 대변인을 두고 비판한 일이다. “우리끼리야 술자리에서 비판도 할 수 있는데, 그걸 언론과 가진 신년맞이 인터뷰에서 말할 줄은 몰랐다”는 게 이 측근의 설명이다. “‘왜 얘기했냐’고 물었더니 ‘나 같은 발언을 하는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고도 덧붙였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박 대통령과 각을 세워 왔지만 그것이 정치적 의도는 아니었다고 측근들은 말했다. “K2 기지 이전 문제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이분이 오랜만에 지역에 와서 감을 잃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찬반 여론도 팽팽하고,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은 문제였다. 그런데 기어코 국회 국방위원회에서만 8년을 있으며 관철시켰다.” 그런 유 대표가 허리를 숙여 박 대통령에게 사과한 것은 측근들에게 충격 이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유 대표는 지역 유지들을 한데 묶고 사이 좋게 이끌어가는 타입의 정치인은 아니다. 지역의 이름 있는 누가 오더라도 유 대표가 허리를 숙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대신 지역구 주민의 지지는 제17대 총선 득표율 84.4%, 제18대 총선 득표율 67.4%가 보여주듯 거의 압도적이었다는 것이 지역의 평가다. 대구 동구를 다녀보니 곳곳에서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다. 대구 동구을 지역은 대구에서도 낙후된 지역에 속한다. 지역 숙원사업이던 K2 기지가 있기 때문에 소음, 고도제한으로 인해 살기 좋은 곳은 아니라는 평가도 있지만 노인인구 비율도 14.9%로 높고, 오래된 주거 지역도 많다. 그러던 것이 한국가스공사와 뇌연구원 등이 들어선 신서 혁신도시로 재개발되면서 변화하는 중이다.

대구 동구 용계동 유승민 원내대표 사무실 부근에는 유승민 대표의 사퇴를 촉구하는 현수막이 여러 장 내걸렸다. ⓒphoto 연합
대구 동구 용계동 유승민 원내대표 사무실 부근에는 유승민 대표의 사퇴를 촉구하는 현수막이 여러 장 내걸렸다. ⓒphoto 연합

이곳의 주요 ‘여론 집결지’는 방촌시장, 불로전통시장 등 재래시장이다. 상인들은 유승민 원내대표에 대한 그동안의 기대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믿음을 엇갈려 표현했다. “대통령을 배신하다니 물러나야 한다”는 격한 목소리도 나왔고 “왜 대통령이 원내대표를 꾸짖냐”는 반박도 있었다. 실제로 대구 내에서도 이번 사태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은 여론조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지난 6월 27일과 28일 여론조사기관 조원씨앤아이에 따르면 유승민 원내대표가 사퇴해야 한다는 응답과 대표 직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47.3%로 같게 나왔다. 6월 30일 리얼미터가 조사한 결과에서는 사퇴에 찬성한다는 응답(42.2%)이 사퇴에 반대한다는 응답(35.6%)보다 높았지만, 차이는 크지 않았다. 유승민 원내대표 지역구 사무실 관계자는 “처음에는 9 대 1의 비율로 유 대표를 꾸짖는 전화가 많이 왔는데, 이번 주말을 지나면서 4 대 6의 비율로 격려하는 전화가 더 많이 걸려온다”고 말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는 분분한 의견보다 여당 원내대표와 대통령 간의 갈등으로 인한 ‘불신’ 문제가 더 크게 보였다.

불로전통시장에서 만난 김모(58)씨는 50~60대 친구들과 낮술을 즐기던 중이었다. 30년간 대구 동구을 지역에서 살았고, 같은 기간 내내 자영업을 해 왔다면서 목소리 높여 나름대로 정국을 분석했다. “대구 사람 중에는 딱 잘라서 박 대통령이 잘못했다, 유 대표 물러나라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입니까. 두루두루 화해 좀 하지 싶어서 안타까워 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안 그래도 새누리당 하고 박 대통령한테 민심이 등을 돌리고 있는데,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이 싸우는 꼬라지 보고 ‘정 떨어진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다툼’ 속에서 지금 대구에서 가장 진정성 있는 정치인은 새누리당 출신이 아니다. 지난해 한국갤럽이 대구·경북 지역 주민 1800명과 오피니언 리더 262명을 대상으로 대구·경북의 차세대 리더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1위로 꼽혔던 정치인은 다름 아닌 새정치민주연합의 김부겸 전 의원(11.3%)이었다. 내년 총선에 지역구 수성갑에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와 맞붙을 것으로 예상돼 전국적 관심을 받고 있는데, 막상 대구 내에서는 “김문수가 잘못 생각했다”는 여론이 상당하다.

“수성구에서 한 50명 정도가 모여서 종친회를 가졌는데예. 김부겸이가 거 인사하러 왔는데, 사람 참 좋아보입디다. 자리를 뜨고 나서 그 70, 80 먹은 종친회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내년에는 김부겸이가 되겠다 안캅니까.” 한 50대 남성이 전해준 일화를 통해 보듯 김부겸 전 의원은 대구 지역에 변화의 바람을 부르고 있다. “대구 지역이 원래부터 여당 성향이 강한 곳이 아니었다”는 건 대구 지역 언론인이 전해주는 얘기다. “대구 도심 한복판에도 기념공원을 만든 2·28 민주 운동도 그렇지만, 광복 직후부터 원래 대구는 야당 성향이 강한 곳이었다. 그러던 게 대구·경북 출신 정치인들로 인해 새누리당 텃밭 이미지가 됐는데, 다시 요즘에는 달라지는 분위기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맹목적 지지는 50~60대 이상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지난 1월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구·경북 지역에서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43.5%였는데, 20~30대와 60대 이상의 격차가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20~30대에서 50.5%가 부정적인 평가를 한 반면, 60대 이상에서는 62.6%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이런 와중에 차세대 리더로 손꼽히던 유승민 원내대표와 박근혜 대통령과의 충돌은 새누리당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트리는 일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대구 동구 신기동에 있는 25년 된 낡은 주상복합 아파트 1층 상가에서 손님도 없이 앉아 있던 안모(60)씨의 얘기다. “뭐 어떻게 된 건지는 뉴스 보면 알겠는데 와 저러는지 모르겠다 아입니까. 와 대구 사람끼리 저래 치고받는지도 모르겠고, 경제같이 중요한 일 냅두고 와 지들끼리 싸우는 데 골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대구 지역 오피니언 리더들의 “와 그라노”는 차기 대권주자로도 성장할 수 있던 같은 지역 정치인의 성장에 대한 안타까움이고, 시민들의 “와 그라노”는 민심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태가 유승민 원내대표의 정치적 위기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지역 정치인들의 전망이다. “유승민 대표가 다음 총선에서 공천을 못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한 유 대표의 동기는 “지역구 지지 기반이 탄탄하고 전국적으로는 사퇴 여론이 나쁘지 않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다만 유 대표의 측근들이 걱정하는 부분은 다른 부분이다. 취재 중 만난 유 대표의 측근 중 세 명이 같은 걱정을 했다. “평소에도 박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려는 걸 말릴 참이면 ‘나는 지금 정치를 그만둬도 상관없다,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꼭 하겠다’고 단언하는 사람이다. 부친인 유 전 의원이 정치를 그만둘 때 미련 없이 그만둔 것처럼 유 대표가 손을 털어버릴까봐 걱정이다.”

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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