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5일 일본 중의원 안보법제 특별위원회에 참석한 아베 총리. 일본 여당은 이날 안보법안을 특별위원회에서 통과시켰고 다음날 중의원 본회의에서도 통과시켰다. ⓒphoto AP
지난 7월 15일 일본 중의원 안보법제 특별위원회에 참석한 아베 총리. 일본 여당은 이날 안보법안을 특별위원회에서 통과시켰고 다음날 중의원 본회의에서도 통과시켰다. ⓒphoto AP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결국 지난 7월 16일 집단자위권 법제화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안보법안’을 중의원(衆議院) 본회의에서 가결, 통과시켰다. 상원에 해당하는 참의원(參議院)에서의 표결이 9월에 예정돼 있다. 자민당, 공명당 연립 여당이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한 상황이어서 참의원 통과는 형식적 추인이 될 것이라는 전망에 의문이 없다.

제·개정되는 안보법안의 핵심은 자위(自衛)의 틀 안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전쟁할 수 있는 ‘보통 국가’로의 전진이다. 군대를 보유하고 외국과 자유로이 동맹을 맺어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2차대전 이전의 일본의 이미지와 닿아 있다. 향후에는 보통 국가를 넘어, 2차 대전 패전 이후 미국 군정에 의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현행 일본의 평화헌법을 수정함으로써 우익 주류 세력들이 느끼는 이른바 ‘부(負)의 역사(Negative Heritage)’를 수정, 청산하려는 노림수도 읽힌다.

최근 일본 매체들의 여론조사를 보면 일본 헌법학자 90%가 안보법안이 위헌이라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아베 총리가 향후 승부수를 던질 개헌론에 대한 뒷심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일본 헌법 9조는 매우 단순해서 굳이 헌법학자가 아니어도 상식적 판단이 가능해 보인다. 지난 7월 13일 열린 안보법안 소위원회 공청회에 참가한 여당 측 인사 무라타 고지 도시샤(同志社)대학 학장은 “다수의 안전보장 전문가는 (헌법 제9조 개정에) 긍정적으로 답신하고 있지 않은가. 학자는 헌법학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고 논점을 흐린 바 있는데, 이 견해가 오히려 현재 여권의 생각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일본 헌법 9조를 보자.

‘(1항)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것을 포기한다.’

‘(2항)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과 여타 전력은 그것을 보지(保持)하지 않는다. 나라의 교전권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요컨대 동맹국의 안보를 위한 무력행사 역할을 명시한 안보법안 내 집단적자위권 내용은 ‘국제분쟁 해결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포기한다’는 헌법 9조에 아무리 기묘한 해석을 동원해도 쉽게 부합되지 않는다.

최근 내가 알고 지내는 자민당 소속의 한 시의원은 “아베 총리와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등 당내 핵심라인이 전후 일본을 인식하는 사고 체계는 무척 견고하다”고 설명해줬다. 내게는 이들이 그때그때 여론에 좌고우면하지 않는 ‘확신범’이라는 의미로 들렸다. 사실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도 기업과 해외투자자들에게 약속한 제도 개선 등의 정책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일관된 사인을 주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호경기로 올라설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아베 총리는 자신의 정치 개혁 의제에서도 승부수를 회피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번 안보법안 소동을 좀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아베 총리 개인과 일본 국가를 관통하는 역사적 문맥에 대해 좀 더 이해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지금 형태의 미·일 안보조약 체결을 1960년에 성사시키며 일본 내 대학생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한 ‘안보 투쟁’ 사태를 촉발시킨 사람은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 전 총리다. 기시 전 총리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면 아베 총리의 다음 수가 얼핏 짐작이 가기도 한다. 전체적으로는 미 군정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이라는 외부요인에 의해 방향이 잡힌 ‘전후 체제’를 존중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2차 대전을 수행하며 침략전쟁과 군수산업을 발달시킨 잘나가던 시절의 일본, 즉 이른바 ‘1940년 체제’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합리적 의심이자 추정이다.

기시와 아베의 관계는 외조부와 외손자 사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식 친족 개념보다는 좀 더 가까운 사이로 봐야 할 것이다. 아베 총리 스스로가 “나는 아베 신타로의 아들이지만 기시 노부스케의 유전자를 이어받았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 배경에는 어린 시절 외조부와 긴밀한 스킨십을 주고 받았던 개인사가 자리 잡고 있다. 아베 총리의 부친이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부부가 지역구인 시모노세키(下關)에 살다시피하는 동안 도쿄에 남겨진 아베 총리는 특히 주말마다 외조부 기시와 시간을 보냈다. 기시 역시 외손자의 운동회에 아들 부부 대신 참석할 정도로 애정을 보였다.

기시는 1957년 2월 총리가 되었지만 1960년대 이후 본격적인 고도성장의 씨앗을 잉태했던 이른바 ‘1940년 체제’를 상징하는 인물로 일본에서 평가받는다. 그는 도쿄제국대학 법대 졸업 후 1930년대 일본이 지배하던 괴뢰정부 만주국으로 파견됐던 경제관료 출신이다. 당시 중화학공업 육성을 통한 일본 군수산업 보급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혁신 관료’로 불렸다. 1939년 만주에서 도쿄로 돌아온 기시는 상공성 차관을 거쳐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상공대신이 됐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 통과로 인해 국민 경제는 전면적인 국가 계획 통제 아래 놓여졌고 농지 소작료개혁 등 일부 사회주의적 정책도 가감없이 받아들여졌다.

지난 7월 15일 열린 중의원 안보법제 특별위원회 회의실에서 안보법안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이 피켓을 들고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photo AP
지난 7월 15일 열린 중의원 안보법제 특별위원회 회의실에서 안보법안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이 피켓을 들고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photo AP

재무성 관료 출신 경제평론가 노구치 유키오씨의 최근 저서 ‘전후 경제사(戰後 經濟史)’에 따르면 당시만 해도 주식과 회사채를 사용한 직접금융이 대세였으나 기시의 정책 변경을 통해 나라가 은행을 통해 자금줄을 관리하는, 은행 경유의 간접금융이 대세가 됐다. 그 잔영이 버블경제 시기를 거쳐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전시에 쓰이는 중장비 개발을 위해 자동차 및 중화학공업을 육성한 것이 공교롭게 오늘날 일본이 관련산업 최강자로 부상하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다. 원천징수제를 독일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도입하고 법인세 체제도 확립하는 등 재정관리의 틀도 이때 대부분 완성됐다. 미 군정이 1945년 이후 펼친 경제정책이 사실은 예전 혁신관료들이 깔아놓은 레일에서 미세조정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노구치씨의 분석이다.

1941년 상무대신 자격으로 태평양전쟁 개전 칙서에 부서(副署)했다는 이유로 기시는 종전 후 A급 전범으로 분류되었지만 때마침 미·소 냉전구도 조성으로 인해 과거 엘리트 관료 중용에 대한 필요성을 미국이 인식했고 이후 1948년 크리스마스에 가석방된다. 그 후 8년2개월 만에 국회의원을 거쳐 총리까지 올라간 그는 누가 봐도 전범보다는 일본 재건의 기틀을 닦은 표상이었다.

이랬던 기시가 생전의 저서 ‘기시 노부스케의 회상’에서 “연합국의 초기점령정책에서 군사력은 물론 일본인과 일본 문화의 정수를 제거하려 했고 그 집대성이 일본 헌법이었다”고 단정한 것을 보면, 외부세력에 의해 기초된 지금의 ‘평화헌법’에 얼마나 유감이 많았을지 짐작된다. ‘헌법 개정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대를 이어 아베 총리가 활약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중의원에서의 이번 안보법안 관련 법안 심의에는 116시간이 할애되어 역대 중의원 심의시간으로는 6위를 기록했다. 역대 최장시간은 136시간으로, 기시가 총리직 사퇴를 내걸고 추인받은 지금의 미·일안전보장조약(1960년) 심의였다. 미군 기지의 일본 주둔 말고도 일본에 대한 미국의 방위의무를 명시화한 쌍무 조항 삽입으로, 일본이 미국의 군사행동에 개입될 여지가 늘어난 것이 골자였다. 이로 인해 ‘전공투(全共鬪)’ 등의 학생 시위가 격화되고 전쟁의 참화를 기억하는 시민들이 합세하자 기시는 숙원이던 헌법개정까지는 이루지 못한 채 내각 총사퇴로 일단 정치 무대를 떠나게 된다.

아베 총리 역시 이번에 안보법안을 밀어붙이면서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다. 지지율 하락이 일시적 현상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아베가 경제나 외교정책을 통해 금세 지지율 반전을 위한 돌파구를 찾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8월 15일 종전 70주년 담화 발표 때까지는 자국의 비(非)여권 세력과 주변국에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겠지만, 9월 3일 중국 전승기념일 전후에 중국을 방문하며 시진핑 총리와 또 한 번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미국·호주·인도는 물론 동남아 국가들과 손을 합쳐 군사적·경제적 동맹을 강화해도 실질적인 중국 견제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겉으로는 유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특히 경제 측면에서 중국에 진출해 있는 일본 기업들을 지원하는 것이 아베의 향후 전략으로 점쳐지고 있다.

하반기에는 특히 미국·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12개국과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타결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시 올림픽과 더불어 ‘경기 활성화’ 애드벌룬을 띄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재라는 평가다. 9월 자민당 총재선거에서는 연임이 확실시된다. 일본 정계와 재계에서는 아베가 적어도 총리 임기인 2018년 9월까지는 안정적으로 집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내년 7월 참의원 선거와 2017년 4월로 예정된 소비세율 추가인상(8%에서 10%로) 일정이 일종의 고비로 작용할 공산이 있지만, 일본은행과 연기금 등을 동원한 양적완화 및 증시부양책 등이 효과를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관리가 가능할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외할아버지가 못다 이룬, 대를 이은 헌법개정의 꿈을 위해 아베 총리가 향후 1~2년 사이에 승부수를 던질 것이라는 전망도 점차 구체화되고 있다. 우리로서는 유감스럽지만 안보법안 통과는 끝이 아니라 시작일 가능성이 높다.

조인직 KDB대우증권 도쿄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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