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어령을 율곡 이이, 초정 박제가와 함께 한국의 3대 천재라고 꼽은 교수가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손사래를 쳤다. “나는 천재도 아니여.” 연재를 시작하면서 그가 한 첫마디다. 충남 아산 출신인 그는 종종 충청도 사투리를 흘린다. 표준어로 열변을 이어가다가 쉼표쯤에서 이런 식으로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그에게는 80여년 평생 ‘이 시대 최고의 지성’ ‘말의 천재’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지만, 스스로는 천재로 불리길 거부했다. 천재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은 ‘선천성’인데 자신은 타고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어령의 상상력과 창조력의 원천을 기막히게 잘 드러낸 부호가 있다. ‘물음느낌표’다. 물음표가 느낌표를 감싸안은 모양으로, 1962년 미국의 마틴 스펙터가 고안해낸 부호다. 그는 “내가 만약 유럽에 태어나서 자기 가문의 문장(紋章)을 만들라고 했다면 내 문장은 이거다”라고 말한다. 물음표가 있어야 ‘아!’ 하고 무릎을 ‘탁’ 치는 느낌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물음표가 씨앗이라면, 느낌표는 꽃’이라고 표현한다.

“내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 가는 삶이었다. ‘유식하다, 박식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거부감이 든다. 나는 궁금한 게 많았을 뿐이다.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겨도 내 스스로 납득이 안 되면 하나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오고 가는 것이 내 인생이고 이 사이에 하루하루의 삶이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삶은 용서할 수 없다. 그건 산 게 아니다. 관습적 삶을 반복하면 산 게 아니다.”

부모님(가운데)과 5남2녀의 가족 사진. 자전거 탄 꼬마가 여섯 살 이어령이다. ⓒphoto 이어령저작권보존위원회
부모님(가운데)과 5남2녀의 가족 사진. 자전거 탄 꼬마가 여섯 살 이어령이다. ⓒphoto 이어령저작권보존위원회

말썽쟁이 떼쟁이

그의 창조 이력서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1934년 1월 15일생. 그는 늦둥이다. 7남매 중 여섯째지만 여동생과 일곱 살 터울이라 막내아들처럼 자랐다. 꼬마 이어령은 ‘말썽쟁이 떼쟁이’였다. 어느 집안이든 막내에겐 관대하다. 그는 막내의 수혜를 톡톡히 누렸다. 유교적 가풍이 엄격한 충청도 집안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는 예외였다. 그의 부모는 다른 형제에게는 엄했지만 그에게만큼은 관대했다. 떼를 써도, 말썽을 부려도 하고 싶은 대로 그저 내버려뒀다. 덕분에 틀 없이 자유분방하게 자랐다.

“나는 엄마젖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형들이 떼어놓으면 기를 쓰고 다시 엄마한테 달려들었다. 금계랍(金鷄蠟)이라고, 젖 뗄 때 엄마 젖꼭지에 발라두는 게 있다. 쓴맛이 나니까 애들이 다시는 달려들지 않는 거다. 그런데 난 금계랍을 발라서 쓴맛이 나는데도 오기로 달려들어 엄마젖을 먹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주위에서 감당이 안 되는 떼쟁이였다.”

다루기 힘든 말썽꾸러기 막내아들에게 집에서 내린 처방전은 ‘서당행’이었다. 두 살 위의 형을 서당에 보내면서 그도 따라붙였다. “집에서 말썽 피우지 말고 차라리 서당에서 천자문 한 자라도 배우라”는 의미였다. 그의 나이 불과 대여섯 살 때의 일이다. 그의 질문의 역사는 서당에서 시작된다. 꼬마 이어령은 서당으로 간 첫날 쫓겨났다. 천자문 첫 네 자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물고 늘어지며 질문을 한 탓이다. 그 유명한 천자문 첫 네 글자.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 네 글자가 그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느라.”

서당 훈장의 말에 꼬마 이어령이 물었다.

“왜 하늘이 검나요? 내가 보기엔 하늘이 파란데요?”

“야, 이놈아, 밤에 보면 하늘이 검잖아.”

“그러면 땅도 검어야지 왜 누렇다고 해요? 밤에 보면 다 깜깜한데요?”

할 말 잃은 훈장은 호통을 쳤다.

“이 쥐방울만 한 녀석이 어딜 와서 따져? 옛 선현들이 다 그렇게 말한 걸 가지고.”

그 길로 꼬마 이어령은 서당을 쫓겨났다. 그는 다시 서당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서당의 반란이었지.” 이날 사건에 대한 그의 표현이다. 서당의 반란은 그의 질문 역사의 시작이자 천재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다. ‘하늘이 왜 검을까?’라는 질문은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외운 것은 금세 잊지만 의문난 것은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는 법이다. 천자문 첫 네 자에 대한 의문은 그가 대학생이 된 후에도, 일간지 논설위원이 된 후에도, 교수가 된 후에도 풀리지 않았다. 하늘은 검은데 땅은 왜 누렇다고 하는지, 한문 선생이나 한학자들에게 물어봐도 도대체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다들 당연한 얘기를 왜 묻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1969년, 35세의 이어령. ⓒphoto 이어령저작권보존위원회
1969년, 35세의 이어령. ⓒphoto 이어령저작권보존위원회

천자문이 창조성을 죽였다

이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은 40대가 되어서다. 주역과 음양오행 사상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천지현황의 뜻을 이해하게 됐다. “검은색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현(玄)과 흑(黑). 흑(黑)이 물리적인 검은색이라면, 현(玄)은 추상적인 검은색이다. 천자문에서 ‘검을 현’은 추상적인 차원이다. 오방색을 봐라. 동쪽은 파란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빨간색이고, 북쪽이 검정색이다. 북쪽은 하늘을 가르킨다. 죽으면 북망산에 묻히고 하늘로 향한다. 북두칠성도 그렇다. 그래서 하늘이 검다는 거였다. 선불교에서 수행자들이 깨달음으로 들어서는 문을 ‘현관(玄關)’이라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말하자면 천자문의 검을 현(玄)은 눈에 보이는 색이 아니다. 북쪽의 방위신을 현무(玄武)라고 하듯 방향을 가리키는 동양의 음양오행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때의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꺅” 소리가 절로 나고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40년 전 서당에서 받은 구박이 해소되는 찰나였다. 그는 천자문이야말로 창조성을 죽인 원흉으로 본다. 천자문은 사물의 이치가 아니라 주입식 암기를 강요한다. 과거엔 천자문을 얼마나 빨리 뗐냐가 신동을 가늠하는 척도였다. 불과 몇 달 만에 속성으로 달달 외우는 암기대장 꼬마가 생기면 온 동네의 경사였다. 신동이 탄생했다며 시루떡을 돌리고 동네 잔치를 벌였다. 그는 이런 풍조가 한국인의 창조성을 말살해 버렸다고 여긴다.

“천자문은 원래 700~800년 전 중국에서 왕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거다. 이게 아시아 사람들의 인생 첫 공부가 돼 버렸다. 천자문을 뜯어보면 어른이 배우기에도 어렵다. 가장 흔히 쓰는 한자인 ‘봄 춘(春)’이나 ‘남쪽 남(南)’ 같은 한자는 누락돼 있다. 뜻도 모르면서 달달 외우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천자문으로 공부해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무슨 상상력이 있겠으며, 멀리 내다보는 혜안이 있겠나. 또 이런 사람들이 무슨 지적 반란이나 패러다임 변혁을 일으킬 수 있겠나.”

훗날 그는 한자권 아이들이 배우는 한·중·일 공용한자를 제안하고, 80대에 들어서서 ‘한·중·일 공용한자 808’자를 주도적으로 편찬하게 된다. 서당에서의 천자문 트라우마가 평생 그를 괴롭힌 탓인지 모른다.

이어령은 질문대장이었다. 평생에 걸쳐 솔솔 뿌려진 이 질문의 씨앗들은 창조의 싹이 트는 텃밭이 됐다.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가면서도 근본적인 질문이 터졌다. 왜 ‘서당’이라고 하지 않고 ‘학교’라고 하는지, 누가 왜 학교라고 했는지부터 따져 물었다. 말끝마다 물고 늘어지는 그는 학교 선생의 골칫덩이였다. 질문의 수준은 난이도의 극과 극을 망라했다. 아무리 당연한 것이라도 스스로 납득할 수 없으면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혼잣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혼잣말 하는 것을 누가 들었지요?”라고 질문하다 선생님에게 ‘얄미운 놈’으로 눈 밖에 나기도 했다. 제비를 보면 으레 아이들은 ‘빠르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다른 궁금증을 품었다. ‘제비 새끼들에게 어미가 벌레를 한 마리씩 물어다 주는데, 준 놈과 주지 않은 놈을 어떻게 가리는지’ 궁금했다.

연재명을 자필로 써 달라는 요청에 그는 아이패드 앱 UPAD3를 이용해 작성해왔다. 최종 선택된 것은 종이에 붓펜으로 쓴 것이다.
연재명을 자필로 써 달라는 요청에 그는 아이패드 앱 UPAD3를 이용해 작성해왔다. 최종 선택된 것은 종이에 붓펜으로 쓴 것이다.

50년 만에 풀린 제비의 비밀

이에 대한 답은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었다. 제비 가족들을 뚫어져라 관찰하고, 조류백과사전을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50대가 되어서도 제비 가족의 비밀은 커다란 물음표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그에 대한 답이 실린 게 아닌가!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인데, 벌레를 먹은 새끼는 입을 덜 벌리고 배고픈 놈이 더 많이 벌린다. 덕분에 어미는 고민하지 않고 입 크기만 보면 누가 배고픈 새끼인지 알 수 있다. 입 큰 녀석에게 먹이를 던져주면 정확하고 공평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농약과 환경오염 때문에 벌레가 많이 줄어들어서 먹이를 물어오는 시간이 크게 늘었다. 그 시간에 먹이를 먼저 먹은 놈은 이미 소화가 다 되어 배고픈 놈처럼 입을 크게 벌리게 된다. 그러니 어미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이걸 정보이론에서 “노이즈(잡신호)”라고 하는데, 최근 제비 개체 수가 적어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렇게 먹이를 주는 코드가 혼란스러워졌다는 데 있다는 기사였다. 그는 무릎을 탁 쳤다. 속이 뻥 뚫리듯 수십 년 묵은 갈증이 해소됐다. 또 한 번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세상 모든 아이는 질문대장이다. 처음 보고 처음 겪는 것 투성이인 아이에겐 온 세상이 호기심 천국이다. “이 모야?(이건 뭐야?)” “저 모야?(저건 뭐야?)” 하며 질문공세를 퍼부어댄다. 하지만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질문을 잃어버린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귀찮아하면서 아이들이 궁금해 하는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질문대장이었고, 어른들은 대부분 그의 질문을 ‘쓸데없는 질문’으로 치부해 버렸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이어령은 이런 어른들의 반응에 굴하지 않았다. 아무리 혼나도, 구박받아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혼났지만 나는 혼나는 게 두렵지 않았다. 지적 호기심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의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도 모르게 막 탄성이 나온다. 목마름 없는 지식은 고문이다.”

연표로 보는 이어령의 창조 이력서

1950 년대

·20대에 우상의 파괴, 저항의 문학 등으로 한국 문단에 파문 던짐

1960 년대

·베스트셀러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한국 문화론을 열다

1970 년대

·‘신바람’ 키워드로 한국인의 숨겨진 열정 깨움

1980 년대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굴렁쇠 어린이 기획

·일본 문화의 키워드 ‘축소지향의 일본인’ 제시

1990 년대

·초대 문화부 장관

·IT 정보화시대의 소프트파워 강조

·‘갓길’ ‘자락’ ‘쌈지공원’ 등의 신조어를 창조

·상암동 DMC 기획

·전주·무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개폐회식-한복 입은 스키어 등장시킴

·대전엑스포-유리병 이용한 재생조형관 기획

2000 년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즈믄둥이 탄생 실황중계

2002 년

·월드컵조직위원회 식전문화 및 관광협의회 공동의장-월드컵경기장, 한강 분수 등 아이디어

2006 년

·후기 정보사회의 키워드 ‘디지로그’ 선언

2008 년

·‘동북아’를 ‘한·중·일’로 고치고, (재)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설립

2010 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개회식서 4D 홀로그램 ‘죽은 나무 꽃피우기’ 실연

2011 년

·리먼 금융쇼크 뒤 ‘생명 자본주의’ 제안

2015 년

·한·중·일 30인회 설립 제안 및 한·중·일 공용한자 808자 제정 주도


이어령의 창조 이력서 연재를 시작하며…

나는 이어령 교수의 마지막 제자다. 그는 1967년부터 2001년까지 30년 넘게 이화여대 강단에 섰다. 1989년까지 교수로 있다가 1995년부터 2001년까지는 석좌교수를 맡았는데, 운 좋게도 나는 딱 이 시기에 학부와 대학원을 다녔다. 1997~1998년 학부에서 그의 교양과목 ‘한국인과 정보사회’ ‘한국문화의 뉴패러다임’을 수강했고, 1999년 대학원에선 그의 마지막 전공수업 ‘문학과 기호학’을 배웠다.

그의 강의는 도끼질 같았다. 매 수업마다 머릿속이 쩍쩍 갈라지는 듯한 충격과 경이로움이 뒤따랐다. 별도의 교재 없이 매 시간마다 새롭게 나눠 주는 A4 한 장짜리 ‘페이퍼’는 요술 종이였다. 종이에 쓰인 낯선 키워드들은 우리를 낯선 세계로 홀렸다. 이메일 계정 하나 없는 학생이 대부분이던 1997년, ‘한국인과 정보사회’ 시간에는 유비쿼터스 혁명이 몰고 올 미래를 보여줬고, ‘한국문화의 뉴패러다임’ 시간에는 케케묵은 단어와 개념을 불러내 새 시대의 가치로 재창조해 냈다. ‘문학과 기호학’은 또 어떤가. 잘 쓴 글은 잘 지어진 건축물 같다는 사실을 수학과 논리학처럼 증명해 보였다. 어느 수업이든 인문, 예술, 철학, 역사가 한데 융합돼 있었고, 그만의 시각과 해석이 녹아 있었다. 매 수업이 혁명적이었고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저런 발상을 해낼까?’ 그를 볼 때마다 든 생각이다. 그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어떻게 늘 새로운 생각을 해내는지, 남들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작은 것에서 큰 발견을 해내는지, 또 천리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게 됐는지 궁금했다. ‘생각의 탄생’(에코의 서재)이라는 책이 있다. 아인슈타인, 마르셀 뒤샹, 레오나르도 다빈치, 리처드 파인만 등 역사상 위대한 천재 13인의 창조적 발상법을 파헤친 책이다. 책을 펼치니 아니나 다를까, 한국어판 서문을 이어령 교수가 썼다.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 내가 써야 할 책이 먼저 나왔구나!’

이어령 교수는 자신의 얘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그가 자서전과 평전에 거부감이 있다는 건 익히 알려져 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이라며 내내 거부해왔다. 이런저런 일로 그를 만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안타까움이 일었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말과 글을 남겼지만 전부 타자 혹은 세상에 관한 것들이었다. 거기에 이어령 자신은 없었다. 깜짝 놀랄 만한 업적을 차곡차곡 쌓아왔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 떠벌려 말하지 않은 탓이다. 그런 그가 2015년 여름, 기자에게 이런 제안을 해왔다. “이 아무개(그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다)의 인생을 라이터(writer)로서 조명하는 건 괜찮을 것 같아. 문학 외적인 창조를 많이 해왔는데, 재밌는 숨은 얘기가 많거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서 내 이야기 듣고, 자료 구해서 읽고 담담하게 서술하는 거야. 이 사람이 천재고 뭐고 이런 말 한마디도 하지 말고.”

이렇게 해서 ‘이어령의 창조 이력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그간 이어령 교수를 열 번 정도 만나서 큰 틀을 만들었다. 틀 안에 들어가는 에피소드를 들으며 내가 가장 많이 한 반응은 “이것도요?”였다. 내가 사는 세상 곳곳에는 이어령 교수의 창조물이 녹아 있었다. 그는 교육자이자 작가, 행정가, 문명비평가 등 전방위 영역에서 활동하며 굵직한 창조물을 배출해 왔는데, 그 창조물은 유무형을 망라한다. 무엇보다 그는 ‘창조적 인물’을 알아보는 눈밝은 사람이었다.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후원회를 만들어 초대 후원회장을 맡은 이가 그였다. 화가 이우환,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장, 소설가 김승옥과 박완서 등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음양으로 후원한 이가 바로 이어령이다.

그래서 이 연재는 이어령의 창조 이력서에 그치지 않는다. 이어령이 창조해낸 대한민국 문화적 자산의 숨은 이력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83세에도 창조적 사고를 멈추지 않는 이 시대 최고 지성의 두뇌를 파헤치는 작업이다. 말하자면 ‘이어령식 생각의 탄생’이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그가 당부한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이 글은 절대 자서전이 아니며, 둘째 업적 중심이 되어선 안 되고, 셋째 창조만이 살길인 이 시대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주간조선 연재는 이어령의 육성 회고를 바탕으로 엮었다. 최근 들어 그가 직접 글을 쓰는 일은 거의 없다. 이유는 두 가지다. 건강상의 이유와 시간의 효율성을 위해서다. 그는 최근 몇 년 새 두 차례 수술을 받았다. 거의 회복됐지만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30분 이상 집필은 어려운 상태라고 한다. 또 하나, 그는 아직도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것이 넘친다. “혼자서 다 하려면 130세까지는 살아야 할 것”이라며 농반 진반으로 말한다.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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