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8월 18일 베이징 천안문광장을 가득 메운 홍위병들.
1966년 8월 18일 베이징 천안문광장을 가득 메운 홍위병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6년 8월 18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도 베이징(北京) 한가운데에 있는 천안문광장에는 1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중고생·대학생·청소년·시민들이 모여들었다. 붉은 완장을 찬 이들의 손에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빨간 표지의 ‘마오쩌둥(毛澤東) 어록’이 한 권씩 들려 있었고, 이들이 외치는 “마오주시 완수이(毛主席 萬歲)!” “짜오판 여우리(造反有理)!” 구호는 베이징의 하늘을 뒤덮었다.

천안문 성루 위에 나타난 73세의 마오쩌둥이 홍위병(紅衛兵)들을 향해 천천히 손을 흔들자 홍위병들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어오르기 시작했고,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은 60대 후반에서 70대 후반이 된 이들 홍위병들은 대체로 “무언가 이 세상을 이상적이고 순수한 무엇으로 바꾸어놓는 일을 하고 있다는 집단 광기에 빠져 있었다”고 회고한다.

천안문광장에 100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45세의 베이징대학 철학과 여강사 녜위안쯔(聶元梓)는 천안문 성루 위로 안내되어 올라가서 마오 주석을 접견하는 영광을 누렸다. 녜위안쯔는 이보다 석 달 전인 5월 25일 베이징대학 구내에 ‘베이다(北大) 간부들은 앞으로 문화대혁명 기간에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베이징대학 간부들을 비난하는 대자보(大字報)를 붙인 사람이었다. 마오는 녜위안쯔가 붙인 대자보가 “전국에서 가장 처음으로 붙여진 마르크스 레닌주의 대자보”라고 치켜세웠다.

‘무서운 중2’ ‘겁을 모르는 고등학생’으로 알려져 있는 연령의 홍위병들은 당시 신(神)과 같은 높은 곳에 있는 최고권력자가 자신들을 인정해주고 치켜세워주면서 “짜오판 여우리(造反有理·모든 반항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말을 들려주자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이 일체의 권위를 때려 부수는 파괴행동에 나섰다. 홍위병들은 우선 4구(四舊), 다시 말해 구사상·구문화·구습속·구습관 깨부수기에 나섰다. 홍위병들은 이때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 패거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초가(抄家·남의 집 뒤지기), 타인(打人·사람 두들겨 패기), 잡물(砸物·물건 두들겨 부수기) 등을 일삼고 돌아다녔다. “혁명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대곶련(大串聯)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깃발을 들고 전국을 무리지어 다니며, 사람을 때려죽이고, 지방의 사찰과 문화재를 파괴했다. 그 결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홍위병들에 의해 살해당했는지, 경제를 내팽개치는 바람에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사(餓死)했는지 통계조차 없다.

정치투쟁만 일삼은 ‘잊혀진 10년’

마오쩌둥은 이런 분위기에서 1966년 5월에는 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하고, 8월에는 당 제8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를 열어 ‘당 중앙의 통지’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당중앙의 결정’을 통과시켜 당의 지도기구를 개조하고, 좌적인 방침이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도록 판을 짜는 바람에 중국은 10년 동안 경제발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정치투쟁만 일삼는 ‘잊혀진 10년’을 맞게 된다. 중국 최대의 검색엔진 바이두(百度)는 문화대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려놓았다.

“1966년은 국민 경제의 조정을 완수하고, 제3차 경제발전 5개년 계획에 착수해야 하는 해였다. 그러나 당시 당은 의식 형태의 비판운동을 고조시켜 당의 지도층을 정치운동으로 몰고 갔다. ‘문화대혁명’은 당과 인민에게 엄중한 재난을 10년 동안이나 안겨준 운동이었다. 마오쩌둥이 발동한 이 ‘대혁명’의 출발점은 자본주의의 부활을 방지하고, 당의 순결성과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보호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당과 국가의 상황에 대한 마오쩌둥의 판단착오는 당 중앙이 이미 수정주의에 빠져 있고, 당과 국가가 자본주의를 회복하려드는 지경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준비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1965년 11월 10일 상하이(上海)에서 발행되는 ‘원후이바오(文匯報)’에는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함’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은 마오의 내연의 처 장칭(江靑)의 측근인 야오원위안(姚文元)이 쓴 것이었다. ‘해서파관’이란 명나라 때의 관리 해서가 황제에게 직언을 잘하고 그로 인해 파면되는 관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오의 내연의 처 장칭의 측근이 해서파관의 이야기를 신문에 게재한 것은 실제로는 명나라 역사에 밝은 베이징시 부시장 우한(吳晗)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었고, 당시 지도층 곳곳에 최고지도자를 비판하는 것을 즐기는 관리들이 많은 것은 문제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해서파관 이야기는 나중에 장칭이 야오원위안을 비롯한 이른바 문혁 4인방이 권력을 남용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어 문화대혁명 기간 피의 대숙청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의 교시가 담긴 붉은 책자를 들고 환호하는 어린 홍위병들.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의 교시가 담긴 붉은 책자를 들고 환호하는 어린 홍위병들.

중국공산당의 ‘문혁’에 대한 평가는

문화대혁명은 1976년 1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사망하고 9월에는 마오쩌둥이 병으로 사망함으로써 자동 소멸하게 된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사망은 저우와 함께 프랑스 유학파로 강력한 개혁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인 덩샤오핑(鄧小平)에게 복권할 공간을 확보하게 해주었고, 마오쩌둥의 사망은 마오의 그늘 아래에 숨어서 피의 대숙청을 사실상 지휘하던 장칭 이하 4인방이 체포되는 사태로 이어진다. 장칭은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자살하는 운명을 맞고 나머지 세 사람도 각각 옥중에서 사망함으로써 중국 사회에서 문화대혁명의 그늘은 걷히게 된다.

마오쩌둥이 죽고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1980년 8월 21일 이탈리아 여기자 올리아나 팔라치와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한다. 덩샤오핑이 팔라치와 가진 회견에서 한 말들은 1년 후에 열린 제11기 당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에서 ‘건국 이래 당의 역사 문제에 대한 결의’라는 공식 문건이 되어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에 대한 공식평가로 자리 잡는다. 덩샤오핑이 팔라치와 회견에서 한 말은 이런 내용이었다.

“마오쩌둥 주석은 지나간 일정 기간 동안 착오를 범했지만, 그가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건설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천안문에 걸린 그의 초상화는 영원히 보존될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마오 주석 본인의 희망에 따라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회복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진행된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혁명의 대상을 잘못 고른 것이다. 이른바 ‘당내에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던 당권파들에게 타격을 가한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경험이 풍부한 각급 지도간부들을 정리했다. 그 속에는 류샤오치(劉少奇) 같은 사람도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저지른 두 개의 착오는 ‘일체의 것들을 타도하겠다’고 한 것과 ‘전면 내전에 돌입한다’고 한 것이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이 문화대혁명에 대한 그런 평가를 내린 지도 이미 36년. 중국공산당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국공산당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는 덩샤오핑이 36년 전에 내린 그것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달라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올 들어 현재까지 문화대혁명에 대한 토론회나 학술발표회 하나 개최한다는 말이 없다.

부정하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그런 가운데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지난 5월 17일 ‘인민일보가 문혁에 대해 말한다: 역사를 거울로 삼는 것은 더욱 나은 전진을 위한 것이다’라는 제목의 무기명 논평을 발표했다. 필자도 없고, 길이도 길지 않은 이 글은 문화대혁명에 대한 당의 현재 평가가 덩샤오핑이 내린 것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선에서 그쳤다.

“문화대혁명은 우리 당과 국가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한 가지 중대 곡절(曲折)이다. 문혁이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1980년 8월 덩샤오핑 동지는 두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 기자 팔라치와 회견을 갖고, 당시 국내 국제적으로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던 마오쩌둥 주석과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 문제에 대해 휼금을 털어놓고 객관적이면서도 선명하게 대답했다. 1년 후 당의 11기 6중전회는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 결의는 신중국 수립 이래 발생한 일련의 역사적 문제에 대해 정확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 결의를 통해 당은 ‘문화대혁명’과 ‘무산계급 독재하의 계속 혁명 이론’을 철저히 부정하고, 마오쩌둥 동지의 역사적 지위를 실사구시(實事求是)적으로 평가했다.”

“문화대혁명은 한 지도자의 착오로 발동되고, 반혁명 집단에 이용됨으로써 당과 국가, 각 민족 인민들에게 엄중한 재난을 가져다준 내란으로, 전면적이면서도 엄중한 위해를 입혔다. 문화대혁명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완전한 착오였으며, 어떤 의의로 보아도 혁명이나 사회진보가 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역사란 앞을 향해 발전해나가는 것이며, 역사에서 교훈을 흡수하는 것은 역사를 거울 삼아 앞으로 전진하기 위한 목적에서다. 우리는 문혁의 역사 교훈에서 당의 문혁에 대한 정치적 결론을 깊이 새기고, 문혁을 둘러싼 문제에서 좌적인 간섭과 우적인 간섭을 구분하는 문제에서 낡은 길을 가지도 않을 것이며, 깃발을 갈아 달고 나쁜 길을 가지도 않을 것이다. 추호의 동요도 없이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도로를 걸어갈 것이다.”

우리 사회의 경우 자유민주주의와 자유경제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보수 우파’로 분류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유경제를 다소 부정하는 견해를 가진 부류를 ‘진보 좌파’라고 부르지만, 중국 사회에서는 서로 엇바뀌어 있다. 마오쩌둥과 마오쩌둥의 사상을 신뢰하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을 ‘보수 좌파’라고 분류하고, 개혁개방과 덩샤오핑의 지도노선을 신뢰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들을 ‘진보 우파’라고 분류한다. 그런 분류를 따르자면 후진타오(胡錦濤) 전임 당 총서기와 시진핑(習近平) 현 당 총서기는 마오쩌둥과 마오쩌둥 사상에 관한 평가에 있어 다소 보수 좌파적 발언을 한 일이 있다. 이들 역시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까지 바꾸어놓자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문화대혁명을 평가하면서 마오쩌둥과 마오쩌둥 사상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선의 발언은 한 일이 있다.

2004년 후진타오 당시 당 총서기는 이런 연설을 했다. “덩샤오핑 동지가 우리 당을 지도해서 건국 이래의 역사적 경험을 정리하고, 마오쩌둥 동지의 역사적 지위와 마오쩌둥 사상의 과학적 체계를 과학적으로 평가했다. 새로운 현실과 발전의 요구는 중국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정확한 길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문화대혁명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마오쩌둥 동지와 마오쩌둥 사상을 부정하는 것은 착오이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 홍위병들에 의해 훼손당한 부처상들. ⓒphoto 위키피디아
문화대혁명 기간 중 홍위병들에 의해 훼손당한 부처상들. ⓒphoto 위키피디아

천안문광장에는 아직도 마오의 초상화

현 당 총서기 시진핑도 2014년 연설을 통해 “덩샤오핑 동지는 마오쩌둥 동지의 역사적 지위와 마오쩌둥 사상의 과학적 체계에 대한 과학적 평가를 내렸다. 새로운 현실과 발전의 요구는 문화대혁명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은 착오이며, 마오쩌둥 동지와 마오쩌둥 사상의 부정에 머물러 있는 것도 착오”라는 말을 했다.

시진핑 현 당 총서기는 당 총서기로 선출된 직후인 2013년 1월 5일 새로 선출된 중앙위원들과 좌담회를 하면서 “부정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를 강조했다. 개혁개방 이전의 역사시기에 대한 인식으로 개혁개방 이후의 역사시기에 대한 인식을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개혁개방 이후의 역사시기에 대한 인식으로 개혁개방 이전의 역사시기에 대한 인식을 비난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언뜻 이해하기 힘든 말이지만, 중국이 현재 채택하고 있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는 결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며 사회주의 체제가 시장경제 시스템이라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해서 활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중국의 개혁개방 체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이해가 가능해지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대혁명은 부정하되 철저히, 근본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되며, 문화대혁명을 부정하더라도 마오쩌둥과 마오쩌둥 사상의 긍정적인 면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개념이 생겨난 것은 지난 38년간의 개혁개방과 빠른 경제발전의 결과 심각해진 빈부격차와 도농격차, 지역격차 등의 부작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날로 깊어지는 빈부격차 때문에 모두가 가난한 공빈(共貧)의 사회에서 가능한 평등에 대한 향수가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중국의 그런 사회 분위기는 덩샤오핑조차 끌어내리지 못해 아직도 천안문 한가운데에 걸려 있는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대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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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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