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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182호] 201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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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마녀재판·공창·페스트… 중세 유럽 뒷골목 비주류의 삶을 파헤치다

‘중세의 뒷골목 풍경’ 펴낸 양태자

박영철  차장 

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1990년 한 대구 처자가 독일로 건너갔다. 대구가톨릭대 독어독문과를 졸업한 뒤였다. 그로부터 21년이 흐른 올 11월 그는 책을 한 권 들고 한국을 찾아왔다. ‘중세의 뒷골목 풍경’(도서출판 이랑)이다. ‘유랑악사에서 사형집행인까지, 중세 유럽 비주류 인생의 풍속 기행’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은 여러모로 눈길을 끈다. 우선 한국인이 이런 종류의 책을 펴낸 것이 거의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유럽은 선호도가 높은 지역이지만 관광이나 명품의 고장이라는 인식이 강할 뿐 정작 유럽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는 관심이 높다고 보기 힘들다. ‘중세의 뒷골목 풍경’은 유럽의 중세를 다뤘고 그것도 마이너리티들의 삶을 들여다봤다는 점에서 시선이 간다.
   
   저자 양태자(54)씨는 독일 마르부르크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과 비교문화학으로 석사학위를, 예나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각각 받았다. 독일인도 받기 어려운 이 분야의 박사학위를 따냈지만 그는 대학교수로 안주하지 않고 저술 전문가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독일 대학에서의 강의도 생각해 보았지만 조직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기에 접었습니다.”
   
   양 박사가 이 책의 주제를 연구하게 된 계기가 재미있다. “독일의 시립도서관과 대학도서관에서 중세 자료를 읽기 시작하다가 차츰 중세 유럽 비주류 인생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한번 관심이 생기자 그는 식음을 전폐할 만큼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서점, 헌책방, 나중에는 벼룩시장으로 달려가 희귀한 자료들을 사모으기 시작했고, 절판된 자료가 있을 때는 저자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서 책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뒷골목 상상 그 이상
   
   이렇게 모은 자료가 약 600권이 됐을 때 그는 동양인의 눈에 비친 중세 유럽의 비주류 인생과 그들에게서 비롯한 유럽 풍속사의 이면을 집필하기로 마음먹었다. 현장도 많이 다녔다. 직접 중세의 자취가 남아 있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자료를 모았는데 어떤 도시의 기록보관소에서는 “동양인이 우리 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마녀사냥에 관한 희귀한 자료를 넘겨받기도 했다.
   
   독일에는 중세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도시가 여러 군데 있다. 뷔딩엔(Buedingen), 이드슈타인(Idstein), 겔렌하우젠(Gelnhausen) 등이다. 이들 도시에서는 중세를 재현하는 행사가 1년에 몇 차례 열린다. 한번은 겔렌하우젠에서 열리는 행사에 가려고 했는데 표가 매진되고 없었다. 양씨는 포기하지 않고 “동양인인데 마녀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며 사정했다. “당신은 외국인이고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니 예외적으로 표 한 장을 발행해 주겠다”고 해서 그해 11월 겔렌하우젠에서 열린 ‘중세도시 재현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양씨는 중세에는 다양한 밑바닥 인생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1380년 독일 뤼벡의 인구는 2만2000~2만4000명이었는데 그중 42%가 ‘낮은’ 계층에 속했습니다.”
   
   책 앞부분에 실린 중세도시의 골목 풍경 묘사는 대단히 사실적이고 충격적이다. “골목으로 들어가면 ‘낮은’ 직업인이 더욱 많았다. 간질병 환자 등 병자가 골목 귀퉁이에 하릴없이 주저앉아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묘기를 부리며 동냥을 했다. 보따리장수나 바구니 짜는 사람, 냄비 때우는 이들도 골목을 돌아다니며 소음에 일조를 했다.”
   
   
   거지증서 없으면 구걸 못해
   
   비주류 인생의 ‘낮은’ 직업은 수두룩했다. 누더기 옷을 모으는 사람, 동물 가죽 벗기는 사람, 동물 가죽 다루는 사람, 뚜쟁이, 가축 도살하는 사람, 이 뽑는 사람, 방앗간지기, 목동, 시체 묻는 사람, 유대인, 사형집행인, 목욕사, 광대, 유랑악사 등이다. 그는 “중세도시는 골목마다 죽은 쥐, 고양이, 개가 가득했다. 1400년 말부터 독일 뉘른베르크에서는 사람을 고용해 뒷골목에 죽어 있는 동물을 치우도록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고 말했다.
   
   우리가 잘 몰랐던 흥미로운 스토리도 많이 소개하고 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유랑인들은 그들만의 공통 언어인 은어(隱語)를 만들어 정보교환, 자구책을 강구했고 범죄모의용으로도 사용한다. 이들이 쓰던 은어는 1540년경 방화사건 하나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이때 드러난 은어는 340개 이상이었다.
   
   중세 거지들은 ‘거지증서’가 없으면 구걸도 못했다는 기록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중세 유럽은 빈부격차가 심했기 때문에 거리에 거지들이 넘쳐났다. 1522년 개혁가 안드레아스 폰 칼슈타트는 “온 천지에 거지가 가득하다”는 기록을 남겼다. 1700년경 독일 쾰른의 인구가 약 4만명인데 거지가 1만명이었다. 거지들이 셀 수 없이 불어나자 15세기 이후 도시는 일부 거지들에게 ‘거지증서’를 발급했다. 15세기 말부터는 불법거지들을 대상으로 단속을 시작하고 심하면 사형까지 시켰다.
   
   우리 사극에 나오는 망나니처럼 중세 유럽에도 사형집행인이 있었다. 중세에는 공개 처형을 당한 사람 수가 엄청나다. 북부 독일의 작은 도시인 스트랄스운트에서만 1310년부터 162년간 684명이 사형당했다. “사형집행인은 최하층 천민에 속했고 늘 붉은코트를 입어야만 했습니다. 술집에 갈 때도 가게주인과 일반 손님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한 귀퉁이에 놓인 의자와 탁자에 따로 떨어져 앉아야만 했습니다. 일반인이 사용하는 식기와 컵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이 마녀재판도
   
   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죄수의 목을 한 방에 쳐내는 일이었다. 이것을 제대로 못하면 민중의 지탄을 받는 것은 물론 살해를 당하기도 했다. 15세기 중엽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는 단칼에 목을 베지 못한 사형집행인이 분노에 찬 민중이 던지는 돌을 맞으며 성 밖으로 쫓겨났고 결국은 몽둥이에 맞아죽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상식에 비춰보면 있을 수 없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중 하나가 어린이 마녀재판이다. 독일 뷔르츠부르크 문서실의 기록에 따르면 1627~1629년에 10세 이하의 어린이 27명이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하고, 1647~1655년에는 어린이 5명이 마녀로 몰려서 죽었다. “당시 거리에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넘쳐났고 이 불쌍한 아이들을 처리하기 위해 마녀사냥을 아이들에게도 적용한 것입니다. 특히 장애아나 기형아는 마녀나 악마의 자식으로 간주돼 더 배척됐습니다.” 쌍둥이는 여자가 여러 명의 남자와 잠을 잤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해 가문의 수치로 여겨 버림받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는 이처럼 미신을 숭상하는 사고가 머리에 깊이 박혀 있는 미혹의 시대였습니다.”
   
   페스트와 매독은 중세 유럽을 크게 바꾼다. 중세 유럽에서 동성애는 흔한 일이었으나 1432년 페스트 때문에 유럽 인구가 대폭 줄어들자 사정이 달라졌다. “젊은이들이 결혼으로 인구를 늘려야 할 판인데 동성애자가 늘면 인구 증가 정책에 중대한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단속을 더 강화했습니다.” 한때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는 동성애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도 수치가 아니었지만 동성애를 처벌한다는 방이 내걸리고 ‘밤의 관청’이라는 이름의 특별단속 수사대가 결성됐다. 동성애자는 대부분 발각되면 불에 태워 죽이는 중형을 받았다. “이후 70년이 지나서야 밤의 관청을 없앴다고 하니 당시 동성애가 얼마나 유행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성병 때문에 사라진 공창
   
   중세 도시에서는 시 정부가 공창(公娼)을 운영했고 공창 매출의 약 20%는 수도자에게서 나왔다는 사실도 아연케 한다. “시에서는 공창을 만들어 매춘을 관리해야 강간을 막고 일반 여자를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15세기 독일 스트라스부르크의 인구는 약 2만명이었는데 시는 이곳에 ‘여성의 집’(공창)을 30개나 세웠습니다.”
   
   중세의 공창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성병 때문에 자취를 감췄다. “15세기 초 유럽에 매독이 무서운 속도로 번지기 시작하자 ‘여성의 집’도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그런 곳을 찾는다는 자체를 간통으로 여겨 형을 살게 하기도 했습니다. 독일 쾰른의 사창가는 1591년 12월 21일 문을 닫았습니다.”
   
   목욕 문화도 오늘과는 달랐다. “중세 유럽의 목욕탕은 오늘날의 공중목욕탕과는 매우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공공연히 매춘이 자행되는 향락의 장소였고 치료목욕사가 상주하면서 목욕을 도울 뿐 아니라 상처난 몸을 치유해 주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치료목욕사 및 이발사는 외과수술과 치아 치료, 눈병 치료까지 맡았습니다.”
   
   이 책에는 이밖에도 흥미진진한 중세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성물 숭배로 고통받은 성인의 유골, 다산(多産)의 여왕, 영아 살해, 베네치아의 페스트, 여교황 요한나, 34년간 철가면을 쓴 사나이, 죽은 교황을 법정에 세운 사건 등 중세의 각종 사건사고를 오늘에 되살리며 중세의 종교와 정치 이면, 즉 뒷골목에서 펼쳐진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또 50여점의 다양한 그림을 덧붙여 책의 이해도를 높였다.
   
   전문가들의 호평도 잇따르고 있다. 독일 예나대학 베트람 슈미츠(Prof. Dr. Dr. Bertram Schmitz) 교수(종교학)는 “양 박사가 유럽인도 연구하기 어려운 중세사를 과감하게 파헤치고 해설을 덧붙여 오늘에 되살려낸 것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배상근 계명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이 책이 유럽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넷신문 프레시안과 한겨레 웹사이트에 ‘양태자의 중세유럽풍속사’를 절찬리에 연재 중이다. 전문 저술가를 표방하는 이답게 책 욕심도 많다. “앞으로 해마다 책을 부지런히 내서 중세 등을 다룬 책을 총 33권 쓸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강해야겠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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