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오 카펠로 러시아 대표팀 감독(오른쪽 세 번째)이 연습에 앞서 선수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다. ⓒphoto 연합
파비오 카펠로 러시아 대표팀 감독(오른쪽 세 번째)이 연습에 앞서 선수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다. ⓒphoto 연합

2014 브라질월드컵이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지구촌의 축구 축제’에서 한국은 과연 웃을 수 있을까. 시선은 6월 18일 오전 7시(한국 시각) 브라질 쿠이아바의 판타나우 아레나에서 열리는 러시아와의 조별리그 1차전에 쏠린다. 5월 14일 현역 은퇴 선언을 한 박지성은 기자회견에서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부탁하자 “첫 경기가 가장 중요하다”면서 “어린 선수들인 만큼 러시아전에서 이기면 상승세를 타 좋은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국 축구의 ‘월드컵 역사’를 살펴보면 첫 경기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한국이 월드컵 16강 문턱을 넘은 것은 ‘4강 신화’를 달성한 2002 한·일월드컵과 ‘원정 첫 16강’의 2010 남아공월드컵, 두 번뿐이다. 당시 한국은 두 대회 모두 첫 경기에서 2 대 0의 완승을 거두며 상쾌한 출발을 보였다. 2002년엔 폴란드를 눌렀고, 2010년엔 그리스를 꺾었다.

한국이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에서 거둔 역대 성적은 3승1무4패. 토고를 꺾고도 1승1무1패로 아깝게 16강에 오르지 못한 2006 독일월드컵을 제외하면 모두 첫 경기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16강행에 실패했다. 한국과 러시아 사령탑을 모두 맡아본 경험이 있는 거스 히딩크(68·네덜란드) 감독은 지난 1월 무릎 수술을 위해 한국을 찾았을 당시 “한국은 러시아와 벌일 브라질월드컵 첫 경기에서 최소한 비겨야 한다”면서 “첫 경기에서 지지 않아야 16강 진출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과연 어떤 팀일까. 2005년 박지성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으며 국내엔 유럽 축구 바람이 불었다. 이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팀 사정을 줄줄 꿰는 매니아들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하지만 러시아 대표팀 선수들은 국내 팬들에게 여전히 생소하다. 러시아 대표팀엔 유럽 빅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파비오 카펠로(68) 러시아 대표팀 감독이 지난 5월 13일 발표한 30명의 예비 엔트리 명단을 보면 31세의 공격수 파벨 포그레브냐크를 빼고는 전부 러시아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다. 잉글랜드 2부 리그 레딩에서 뛰는 포그레브냐크는 카펠로 체제 아래에선 주전으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에 6월 한국에 맞설 베스트11은 모두 러시아 리그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조직력을 최우선시하는 카펠로의 색깔이 반영된 결과다. 카펠로는 이번 월드컵에 나서는 32개국 사령탑 중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명장이다. 브라질의 컨설팅 업체인 ‘플루리 컨설토리아’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카펠로는 국가대표팀 사령탑으로는 유일하게 감독 연봉 순위 10위에 들었다. 780만유로(약 109억원)의 연봉을 받아 5위에 오른 카펠로는 ‘우승 청부사’란 별명답게 유럽 무대에서 수많은 우승을 일궜다. AC밀란과 유벤투스, AS로마(이상 이탈리아), 레알 마드리드(스페인)의 감독을 지내며 13개의 우승컵을 들었다.

카펠로는 ‘카테나치오(빗장 수비)’가 탄생한 이탈리아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감독답게 강력한 수비를 만들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는 이번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10경기에 5골밖에 허용하지 않는 ‘짠물 수비’를 선보였다. 비결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휘어잡아 자신의 수비적 전술을 100% 소화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성향 탓에 카펠로 감독은 ‘독불장군’이란 평가도 받는다. 대표팀과 관련한 웬만한 내용은 모두 비공개로 하고 심지어 러시아축구협회에도 팀 관련 정보 제공을 꺼린다고 한다. 카펠로는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감독은 모든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큰 권한을 가져야 한다”며 “그 모습이 권위적이라고 비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선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감독”이라고 말했다.

부임 초기 카펠로가 아스널에서 뛰었던 안드레이 아르샤빈(33·제니트) 등 스타 선수들을 뽑지 않자 날 선 비판을 가했던 러시아 언론들도 카펠로의 러시아가 유럽 예선 조 1위로 월드컵 본선에 오르자 전폭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수퍼스타 하나 없는 러시아는 자국 리그 선수들로 일궈낸 조직력을 바탕으로 2013년 FIFA 발롱도르 수상자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29·레알 마드리드)가 버틴 포르투갈을 누르고 조 1위로 본선행 티켓을 따냈다.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4-3-3 혹은 4-2-3-1 전형을 구사한다. 최근 경기를 보면 알렉산드르 케르자코프(32·CSKA모스크바)가 주로 원톱 공격수로 기용된다. 케르자코프는 현(現) 러시아 대표팀에서 몇 안 되는 2002 한·일월드컵 경험자다. 1990년 월드컵까지 소련(최고 성적 1966년 월드컵 4위)으로 대회에 나섰던 러시아는 체제 붕괴 이후엔 1994년과 2002년, 두 번밖에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다. 두 번 모두 성적은 조별리그 탈락이었다.

2002년 스무 살의 나이에 월드컵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던 케르자코프는 12년 만의 월드컵을 기다리고 있다. 케르자코프는 한국대표팀에선 박주영(29·왓퍼드)과 비슷한 위상을 가지는 선수다. 소속팀에서 부진했지만 감독의 전폭적 신뢰를 받는 골잡이란 점이 그렇다. 케르자코프는 올 시즌 러시아 프리미어리그에서 득점 10위 안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일부 언론에선 올 시즌 17골을 터뜨리며 리그 득점 2위에 올라 있는 아르템 주바(로스토프)의 원톱 기용을 주장하지만 카펠로 감독은 케르자코프를 꾸준히 기용해 성공을 거뒀다.

케르자코프는 유럽 예선에서 5골을 터뜨리며 팀을 16강으로 이끌었다. 176㎝로 공격수로는 그리 크지 않은 키지만 활동량이 풍부해 공간을 창출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다. 신예 공격수 알렉산드르 코코린(23·디나모 모스크바)은 ‘러시아의 손흥민’이다. 대표팀 주전급 중에서 가장 어리고 왼쪽 공격수로 뛴다는 점이 손흥민과 비슷하다. 코코린은 히딩크 감독이 러시아 안지 지휘봉을 잡던 시절의 애제자였다. 히딩크는 러시아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번 월드컵을 통해 스타로 떠오를 선수가 바로 코코린”이라고 말했다. 슈팅과 드리블 능력이 모두 뛰어난 코코린은 유럽 예선에서 4골을 뽑아냈다.

33세의 노장 미드필더 로만 시로코프(크라스노다르)는 러시아 대표팀의 ‘캡틴’이다. 지난 5월 14일 현역 은퇴를 선언한 박지성과 동갑내기인 시로코프는 카펠로 체제하에서 팀의 주축 선수로 떠올랐다. 미드필더 전 포지션을 소화하는 시로코프는 득점력도 뛰어나 유럽 예선에서 3골을 터뜨렸다.

중앙 수비진은 세르게이 이그나셰비치(35)와 바실리 베레주츠키(32)가 주축을 이룬다. 둘 다 백전노장으로 경험이 풍부하지만 상대적으로 발이 느리다는 약점이 있다. 한국으로선 손흥민과 이청용 등이 스피드를 살려 뒷공간을 침투하는 전략으로 나올 필요가 있다. 여기에 세계적 골키퍼로 꼽히는 이고르 아킨페예프(28)까지 수비를 이루는 핵심 선수 셋이 모두 CSKA 모스크바 동료들이다. 같은 팀에서 뛰다 보니 대표팀에서도 뛰어난 조직력을 자랑한다.

5월 30일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떠나는 한국과 달리 러시아 대표팀은 모스크바에서 훈련을 이어가다가 6월 8일 브라질에 입성한다. 5월 26일 슬로바키아(모스크바), 5월 31일 노르웨이(오슬로), 6월 6일엔 모로코(모스크바)를 상대로 평가전을 벌인다.

장민석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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