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
[2373호] 201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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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홍명희가 북한에 남은 이유

남북협상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조선 천지가 왜노(倭奴)의 수하가 되어도 홍씨만은 고절(孤節)을 지킬 것이다.”
- 풍산 홍씨 집안의 가훈
▲ 홍명희(왼쪽)·홍기문 부자
나는 젊은날에 외국인이 쓴 한국사 23권을 번역·주석하여 출판한 적이 있다. 한국사 연구에 기여하는 방법이라는 일말의 소명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먹고사느라고 한 일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미련한 짓을 했는지 꿈만 같다. 그 스물세 권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것이 곧 ‘하멜(Hamel)표류기’이다. 네덜란드 출신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히딩크(G. Hiddink)만 다녀가면 판매 부수가 늘어난다.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간단히 정리하자면 1653년 8월 15일에 제주도 모슬포 앞바다에 네덜란드 선박 스파르웨르(Sparwer·매(鷹)라는 뜻임)가 풍랑을 만나 난파하여 표착했다. 바타비아(Batavia·오늘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나가사키(長崎)로 가던 상선이었다. 승무원은 모두 64명이었는데 상륙 과정에서 28명이 죽고 36명이 생존했다. 그들을 포함하여 서양인이 제주도를 퀄파트(Quelpart)라고 표기한 것은 그들이 먼저 이르렀던 가파도(加波島)를 그렇게 표기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들은 13년의 억류 생활을 겪으면서 20명이 죽고 생존자 16명 가운데 강진(康津)을 비롯한 남도의 억류자 8명이 일본으로 탈주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네덜란드 상관에 부탁하여 일본 막부 정권의 힘을 얻어 조선에 남아 있던 8명의 송환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의 꿈이 이뤄져 다시 2년이 흐른 뒤에 남은 8명의 송환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얀 클라츠(Jan Claesz)라는 요리사는 귀국을 거부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자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지명숙 ‘보물섬은 어디에’·166쪽) 일행 가운데에는 천민 출신의 아내를 맞이하여 가정을 꾸민 사람들이 있었다. 자식은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보다 더 소중했다. 연전에 남한의 미전향 장기수들 가운데 자식이 없는 사람은 아내를 뒤로하고 돌아갔지만 결혼한 사람들 가운데 돌아가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핏줄 때문이 아니었을까?
   
   해방정국의 남북협상을 이야기하면서 왜 하멜까지 내세우며 사설(辭說)이 길었는가에 대하여 독자들은 의아했을지 모르나 나는 그 ‘핏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인 보도에 따르면 남북협상 당시 남한 대표로 북한에 올라간 사람은 145명으로 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이미 북한에 넘어가 있던 이북 출신들이거나 남로당 출신이었다. 실제로 협상을 전후하여 넘어간 숫자는 공식 대표 15명과 수행원으로 그리 많지는 않았다. 돌아오지 않은 대표적 인물로는 국어학자 이극로(李克魯), 경제학자 백남운(白南雲), 그리고 소설가 홍명희(洪命憙)가 있었다. 그들은 남한으로 내려가는 대표들에게 “평양의 대학에서 교수로 남고 싶다”고 말하고 헤어졌다. 당초 남북협상 편을 쓸 적에 나는 한 회(回)로 이야기를 끝낼 요량이었다. 그런데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려니 한 회 분량으로서는 턱없이 모자라 할 수 없이 두 회로 나누어 쓸 수밖에 없었다.
   
   
   형제 같았던 부자 홍명희와 홍기문
   
   1948년 5월 초가 되면 평양에 머물던 남한의 대표들은 회의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내려갈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 등은 내려왔지만, 홍명희·이극로·김일청(金一靑, 신한민족당)·박헌영(朴憲永)·허헌(許憲)·김원봉(金元鳳)·유영준(劉英俊,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위원장)·김창준(金昌俊, 조선공산당)·백남운·허성택(許成澤, 남로당중앙위원) 등이 남았다. 임시정부에서 의열단을 이끌며 군무부장을 역임했고 해방정국에서는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을 지낸 김원봉(金元鳳)과 인민공화국 보건부장이었던 이만규(李晩珪)는 어차피 남한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평양에 남았다고는 하지만 홍명희, 백남운, 이극로가 평양에 남았다고 하는 사실은 의외의 일이다.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올 때 북한에 남도록 회유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김구는 서울로 돌아온 직후 경교장에서 가진 귀국 보고에서 자신의 귀환을 “탈출했다”(조선일보 1948년 5월 8일)고 표현한 점이 여운을 남긴다.
   
   그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인물은 바로 홍명희이다. 먼저 사사로운 입장을 고백하자면, 나는 충북 괴산(槐山) 출신으로서 홍명희가 살던 곳과 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까운 아래윗마을에서 살았다. 내가 그를 스치듯 만났을 수는 있지만 워낙 어리던 시절이라 기억은 전혀 없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옛날 선비 중에는 괴산(화양동)에 내려와 살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그리고 현대사의 인물로는 홍명희의 얘기를 전설처럼 들으며 자랐다. 송시열은 고깃국을 먹다가 스승 생각이 나서 한 그릇을 가슴에 품고 30리 길을 달려갔는데 식지도 않고 한 방울도 쏟아지지 않았다는 등….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낙질(落帙)된 홍명희의 ‘임꺽정’을 몰래 빌려 읽으면서, 괴산 지방에서 쓰는 사투리의 문체에 가슴 찡한 추억도 있었다.
   
   나는 스스로 좌우익 논쟁의 어느 편에 설 입장도 아니고 또 그렇게 강단(剛斷) 있게 살 용기도 없다.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분위기가 우익적인 한국 사회에서 이제까지 많은 필자들이 우파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해방전후사를 써오던 관례를 벗어나서, 북한 부수상까지 지낸 인물을 주제로 쓴다는 것이 그리 마음 편한 것은 아니다. 나는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다가 홍명희의 기록을 읽으면서 남다른 감회와 함께 ‘책상물림 사학’이 아닌 ‘현장 사학’을 바탕으로 홍명희의 행적을 글로 쓰고 싶었다.
   
   홍명희는 금산 군수 홍범식(洪範植·1871~1910)의 아들이다. 홍범식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으로 괴산에서 참판(參判) 승목(承穆)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가 울산 김씨들은 ‘울산 김씨’라 부르지 않고 그냥 ‘울김(蔚金)’이라고 부른다. 그와 마찬가지로 풍산 홍씨들도 ‘풍산 홍씨’라 부르지 않고 ‘풍홍(豊洪)’이라고 부를 만큼 가문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다.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으면 그들이 무지하다는 뜻이다. 홍범식은 1888년(고종 25년)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내부주사·혜민서참서(參書)를 역임하였고 1907년 전라북도 태인 군수에 부임하였다. 당시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 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로서 그는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다. 그는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홍범식은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 5통은 일본 경찰에 압수되고 구전만 남아 있다. 그는 1962년, 7등급의 건국훈장 가운데 3등급인 독립장을 받았다. 그의 족질(族姪)인 홍기삼(洪起三) 교수(동국대학교)가 남긴 평전 ‘홍명희’(1996, 32~33쪽)에 따르면 그는 죽으면서 “친일을 하지 말고 훗날에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유서를 남겼는데 홍명희는 그것을 액자로 만들어 벽에 걸어놓고 조국과 아버지의 유훈을 되새겼다고 한다. “조선 천지가 왜노(倭奴)의 수하가 되어도 홍씨만은 고절(孤節)을 지킬 것”(52쪽)이라는 그 집 가훈을 읽노라면 “호남성 사람 한 사람만 살아남아도 중국은 멸망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던 중국의 지사 양석자(楊晳子)의 말이 떠오른다.
   
   홍명희는 1888년 충북 괴산군 괴산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출생과 함께 어머니는 산후병으로 고생하다가 2년 뒤에 사망하여 대고모 손에 양육되었는데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다. 호를 벽초(碧初)로 한 것은 괴산의 옛 이름이 벽양(碧陽)이었던 데 유래한 것으로, 처음에는 벽초(碧樵)였으나 아버지의 권고로 벽초(碧初)라 고쳤다.(24쪽) 임형택 교수(성균관대)의 글에 따르면, 젊어서는 바이런(G. G. Byron)의 시 ‘카인(Cain)’을 너무 좋아하여 호를 가인(可人, 假人)으로 지은 적도 있었으나 그 이름이 흉악한 것을 알고서는 다시 쓰지 않았다.(‘임꺽정’(10) 해제, 145쪽) 홍명희는 열세 살 되던 해인 1900년에 민영만(閔泳晩)의 딸과 결혼했는데 장인은 민영환(閔泳煥)과 재종(再從) 간이었다. 결혼한 지 4년 만인 1903년에 맏아들 홍기문이 태어났는데 그때 홍명희는 열다섯 살이었고, 할아버지는 서른세 살이었다. 경상도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얼라가 얼라를 낳았다”고 말했다. 아들을 낳은 홍명희는 1905년에 동경상업학교로 유학을 갔다가 1910년에 돌아왔다. 이때 이광수(李光洙)와 최남선(崔南善)을 만나 “조선의 세 천재”라는 말을 들었다.
   
   홍명희가 귀국하던 해에 한일병합이 이뤄지자 애국지사 가운데 최초로 아버지가 자결했다. 그때 명문가의 효자가 겪어야 했던 아픔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인물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은 이럴 경우에 벽을 마주한 듯이 암울해진다. 다름이 아니라 고인에게 누가 되는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록해야 하고 이야기의 맥락을 위해서라도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음에 대하여 문중과 그를 숭모하는 분들에게 양해를 빈다.
   
   여기에서 부덕한 기록이라 함은 그의 할아버지 홍승목(洪承穆·1847~1925)이 아들의 뜻과 다른 길을 갔기 때문이다. 홍승목은 조선 말기의 관료로서 홍문관과 사헌부 등에서 근무하다가 1879년 형조와 병조참의 자리에 올랐으며, 1881~1883년에는 사간원의 대사간과 성균관의 대사성에 올랐다. 그는 1890년 형조참판과 병조참판을 지냈고, 1900년 궁내부 특진관에 오른 사대부였다. 대한제국이 기울 무렵 홍승목은 민원식(閔元植)이 주도한 제국실업회의 회장을 맡았는데, 이 단체는 보부상 등을 끌어모아 병합을 앞당기기 위한 활동을 벌인 친일 단체였다. 이때 홍승목은 윤덕영(尹德榮)과 민영기(閔泳綺)가 박제순(朴齊純)을 회장으로 내세워 조직한 관진방회(觀鎭坊會)에 가담했고, 농상공(農商工)의 발달을 통해 생산력을 증진하고 국가 부강의 기초를 작성함을 목적으로 하는 제국실업회(帝國實業會)의 회장으로 활약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贊議)가 되어 1921년까지 재직했다. 1912년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병합기념장도 서훈받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친일인명사전’ 홍승목 편 참조) 그는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아픈 가족사
   
   내가 관상을 보는 사람은 아니지만, 홍명희의 얼굴에는 그늘(愁心)이 있다. 그의 고모, 곧 홍승목의 딸은 임시정부 내무부장과 재정부장을 지낸 애국지사 조완구(趙琬九)의 며느리이니 그쪽 가문의 아픔은 또 어떠했을까? 홍기삼 교수는 홍승목의 행적을 설명하면서 그가 “변화하는 새로운 사회제도에도 폭넓게 적응한 것”(13쪽)이라고 썼지만 정론(正論)은 아니다. 아마도 홍명희의 수심은 바로 이러한 가족사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천추 열사였으나 아들을 먼저 보낸 할아버지는 다른 길을 갔으니 홍명희의 죄의식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의 명작 ‘임꺽정전’ 피장편(皮匠篇) 형제(兄弟)에 보면, 임꺽정의 부모가 그를 낳고 백정의 아들로 살아갈 일이 걱정스러워 “걱정아, 걱정아”라고 부르던 것이 “꺽정”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괴산지방에서는 꺽정이가 아주 못생긴 민물고기의 이름이다. 그가 주인공의 이름을 꺽정(걱정)이라 짓고 또 한자로 표기할 때는 왜 林巨正(임거정)이라고 적었는지 그 뜻이 예사롭지 않다.
   
   망국 직후에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4년 동안 상하이와 싱가포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1917년 연말에 귀국한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괴산으로 귀향하여 스스로 선언서를 짓고 의병대장 한봉수(韓鳳洙)와 상의하여 이곳 독립운동을 주도했는데 한봉수가 지금 한민구(韓民求) 국방부 장관의 할아버지이다. 홍명희가 투옥되자 가족들은 5리 떨어진 제월리(霽月里)로 이사했다. 제월리는 가까운 느티울(槐灘)에 제월대(霽月臺)라고 하는 험준한 절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본디 제월이라 함은 ‘송서(宋書)’ 주돈이전(周敦頤傳)에서 북송(北宋)의 시인이자 서예가인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를 존경하여 그 모습이 마치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光風霽月)과 같도다”라는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제월대 위에는 고산정(孤山亭)이라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는데 선조(宣祖) 때 충청도관찰사 유근(柳根)이 이곳의 풍광을 사랑하여 벼슬에 물러난 뒤 이곳으로 하향하여 산수를 즐기며 광해조의 난세를 피하여 살던 곳이다. 맑은 냇물이 발 아래로 굽어보이는 풍광이 참으로 수려하고 아찔하다. 홍명희는 이곳 고산정에서 망국의 시기에 자신이 좋아하던 글귀 행운유수(行雲流水·떠나가는 구름과 흘러가는 물)를 되뇌며 젊은날의 시름을 달랬다.
   
   홍명희는 출옥 직후인 1920년에 서울로 올라갔다. 일제 치하에서의 홍명희는 휘문(徽文)·경신(儆新)·오산(五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동아일보’와 ‘시대일보’에서 편집국장으로 일하다가, 1928년부터는 ‘임꺽정전’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는데 건강과 시국 사건에 쫓기느라 여러 차례 중단한 채 끝내 완결하지 못했다.
   
   광복이 되자 홍명희는 통곡하며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정계에 투신했다. 그가 몸담은 단체는 민족자주연맹이었다. 정부 수립이 눈앞에 다가왔을 무렵에 오늘의 주제가 되는 남북협상의 문제가 일어났다. 홍명희는 4월 19일에 평양으로 올라갔다. 앞서(11회) 기록한 것처럼 회의는 이미 정치선전장이 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홍명희가 ‘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를 낭독하고 이극로가 ‘3000만 동포에게 호소하는 격문’을 낭독했다. 그 두 사람이 ‘결정서’와 ‘격문’을 읽었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북한에 남기로 작정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글의 주제가 되고 있는 질문, 곧 그는 왜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에 부딪히게 된다. 그가 월북하기에 앞서 그의 아들 홍기문과 딸은 이미 북한에 가 있었고, 아내와 가솔들만이 괴산에 남아 있었다. 형제처럼 지내던 아들의 만남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들 홍기문(1903~1992)의 호는 대산(袋山)으로 잠시 도쿄에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대체로 독학하여 역사, 수학, 어학 등 신학문을 습득했다. 1930년대에 ‘조선일보’ 학예부장과 월간 ‘조광’(朝光) 주간을 거치는 한편 1927년에 ‘조선문전요령(朝鮮文典要領)’을 ‘현대평론’에 발표한 이후, 국어 연구에 정진하였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당시 서울 동대문 밖 창동에 은거하며 한글 연구에 전념하다가 1946년에 ‘서울신문’ 편집국장직을 수행하면서 ‘조선문화총화’(1946), ‘정음발달사’(1947), ‘조선문법연구’(1947)를 펴내기도 했다.
   
   홍기문은 1947년에 월북하여 주로 국어학 연구와 문화 활동에 전념하였다. 19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49~1954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1957년 과학원어학연구소 소장, 196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 1964년 사회과학원 부원장, 1972~1977년 최고인민회의부의장 겸 상설회의부의장, 1980년 당중앙위원, 1981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중앙위원장, 사회과학원 원장, 1984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도 국어학 분야에 관한 여러 업적을 꾸준히 발표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번역에서 올린 공로로 ‘노력 영웅’이라는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홍명희는 왜놈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하여 아들을 손수 가르쳤는데 그러고도 그가 한국 향가(鄕歌)의 최고 대가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선생이 ‘조선고가연구’(1942)를 쓴 다음 “내가 죽은 뒤에 100년 안에 이 책을 수정할 내용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는데 이를 바로잡은 사람이 홍기문이었다. 양주동 선생이 살아 있을 적에 내가 뵙고 “홍기문 선생의 옆집에서 컸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반가워하며 “홍기문의 향가 연구가 훌륭해”라고 하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자칭 국보라던 그분이 그렇게 말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홍기문의 아들 홍석중(洪錫中)도 소설가가 되어 ‘황진이’를 써 남한의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문학상(2004)을 받았다.
   
   
   이념은 혈육을 넘지 못하고
   
   나는 아직도 홍명희가 순수한 공산주의자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홍명희가 평양에 갔다가 그곳에 남은 것은 혈육의 정 때문이었으리라는 것이 나의 판단인데 이러한 나의 해석은 학계에서 논쟁이 되었다. 언제인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이정식(李庭植) 교수께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수긍했다. 내가 이런 논리를 편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곧 해방정국에서 소위 좌파라는 지도자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이미 대부분 북한으로 넘어가 있었다. 홍명희를 포함하여 허헌, 박헌영, 여운형(呂運亨), 이현상(李鉉相), 이극로의 아내와 자녀가 대부분 북한에 가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는 죽어도 가족은 살리겠다는 뜻이었을까? 나도 곧 올라갈 터이니 가족이 먼저 가 있으라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인질이었을까? 나는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한다. 어떤 이념도 혈육을 뛰어넘지는 못했다고.
   
   내가 어릴 적에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홍명희는 아들과 맞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그 명문의 양반 댁에서 자제분과 맞담배를 피웠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른들의 말씀에 따르면, 민족주의자였던 홍명희는 마르크시스트였던 아들과 이념 논쟁을 많이 했다. 그런데 한창 논쟁이 무르익을 때면 홍기문이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논쟁의 맥이 끊어지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아들이 왜 밖으로 나가는가를 알아봤더니 논쟁이 과열되어 담배를 피우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논쟁할 때는 돌아앉아 담배를 피워도 좋다고 허락해서 결국은 그토록 대단한 양반 가문에서 부자가 맞담배를 피웠다고 들었다.
   
   홍기삼 교수의 기록에 따르면, 홍명희에게는 주경(姝瓊), 무경(茂瓊), 계경(季瓊)이라는 세 딸이 있었다. 첫째와 둘째는 1921년생으로 쌍둥이였는데, 한 사람만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 가운데 하나는 일찍 죽은 것으로 보이며, 셋째도 요절했다. 아시다시피 그 시절에는 쌍둥이 출산을 부끄럽게 여겼고, 더욱이 딸 쌍둥이를 낳을 때는 그 박대가 심했다. 홍명희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지만 딸을 이화여전(梨花女專)에 보낸 것으로 보아 그렇게 고루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 두 딸 가운데 하나가 1947년에 월북했는데 이는 아마도 오빠 홍기문과 동행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오빠는 사회과학원 원장이 되었는데 딸이 무엇을 했는지는 북한 기록에도 잘 보이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2000) 마중 나온 여성이 바로 그 딸이었을 것이다. 엄혹하던 반공국가의 시절에 남한의 우익들은 홍명희의 딸이 김일성의 소실이었다느니 김일성의 집안 식모였다느니 별 험한 소리를 다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낳은 아픈 가족사의 단면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형태로든 엄마를 잃은 김정일을 보살핀 것만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내가 평양에 갔을 적에 김일성대학에서 홍명희를 연구한 교수로부터 들은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 교수의 이름을 잊었다.
   
   가끔 명절에 고향에 가면 나는 괴산 제월리 홍명희의 옛집을 찾아본다. 뒤뜰에 있는 선영(先塋)들은 잘 보존되어 있고, 집에는 종손(從孫) 되는 분이 사는데, 많이 훼손되어 사랑채만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에 국군이 북진하면서 남은 식솔(머슴과 하인, 그리고 족친)들을 죽인 뒤로부터 그곳 사람들의 입에서 홍명희에 대한 얘기는 금기가 되어버렸다. 이제 젊은이들은 모르는 얘기가 되었지만 괴산 사람들은 이념의 선악이나 호오(好惡)를 떠나 그에 대한 회상을 많이 한다. 홍명희는 1948년에 북한 정권 수립과 함께 부수상에 올라 1957년에 재임된 후 1961년까지 재임했다. 소설가 이충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북한인 신분으로 해외에 나갔을 적에 만난 남한의 제자가 반공법이 무서워 모른 체하고 돌아서던 모습을 가장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부덕한 얘기가 되어 비교가 송구스럽지만, 이기붕(李起鵬)이 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괴산 사람들 사이에는 “남북한 부통령이 모두 괴산 사람이군” 하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이기붕은 괴산 청천 출신이다.) 한국전쟁 당시에 괴산의 수안보에 북한의 남조선전투지휘부가 설치되어 있었을 때 “홍명희 선생이 다녀갔다”고 어른들께서 두런두런 말씀하시던 것을 잠결에 들은 적이 있다.(수안보에 전투지휘부가 설치된 것은,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곳이 지형상 폭격이 어려운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홍명희는 1968년 81세로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홍명희가 즐겨 찾던 집 앞 제월대의 풍광은 여전한데, 느티울의 물은 많이 줄어 쓸쓸하다. 그 제월대 입구에 홍명희를 추모하는 후학들이 문학비를 세우면서 “빨갱이의 비석을 세울 수 없다”는 우익단체와 오랜 실랑이를 벌이며 세웠다가 부수기를 여러 번 했다. 지금은 작은 문학비가 서 있어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얼마 전에 성묘하러 괴산에 내려갔더니 그가 살던 동부리 옛집 자리에 한옥이 번듯하게 복원되었는데 안내문에는 ‘홍명희 선생의 생가’라는 말을 못하고 ‘한옥 마을’이라고 적혀 있었다. 요즘에는 그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홍범식 선생 생가’라고 바꿨다고 들었다. 나는 그곳을 돌아볼 때면 시대의 아픔을 쓰다듬으며 발길을 돌리곤 한다.
   
   남북협상의 이야기를 마치려 하니 “남북협상은 한국 현대사에서 북한이 꾸민 가장 기만적이고도 비극적인 모임”이었다는 한 원로학자의 기록이 가슴을 친다. 김구를 비롯한 협상파를 숭모하는 독자들은 섭섭할 노릇이지만 남북협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비교적 냉혹하다. 그러나 조금 시각을 달리하여 생각해 보면, 갈등의 관계에서 ‘만남’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며 그 길을 찾아간 것은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일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중국의 문인 루쉰(魯迅)이 그의 글 ‘고향’에서 표현했듯이 “길이 있어서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다녀 길이 생기기 때문”이다.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가르쳤다. 건국대학교 중앙(상허)도서관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한 후 퇴직하여 집필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1·2011)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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