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유학을 떠나기에는 늦은 나이인 마흔세 살, 미국 워싱턴 근교 수틀랜드 국립문서보관소(NARA)의 황량한 벌판에 서서 나는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어림하여 30억쪽의 문서가 소장되어 있다는 이곳에서 명색이 한국전쟁 문서를 찾고자 왔다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다행히도 한국현대사 연구의 전설이 된 방선주(方善柱) 교수를 만나 도움을 받았으나 “나는 이곳에서 7년 동안 8만쪽의 자료를 복사했는데도 아직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이 나를 더욱 절망하게 만들었다. 2개월이 지나서야 무슨 자료가
나는 1960년대 초엽, 대학 초년 시절에 서울 성동구 신당동 시구문시장에서 점원을 하며 대학을 다녔다. 그런데 내가 다니던 이발소 주인의 입담이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손님의 넋을 빼놓았다. 그의 입담을 듣다 보면 어느덧 이발은 끝났다. 신변잡기에서부터 현대사를 종횡하는 그의 이야기에는 허풍도 많았지만 무근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빈부가 엇갈리는 길 건너 사이여서 나와 사는 수준이 달랐으나 그 이발소 뒷집에 박정희(朴正熙) 의장이 살고, 그 옆에 육군참모총장 김종오(金鍾五) 대장이 살고, 조금 올라가면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
지난 6월에 첫 회를 시작한 이래 이번 15회에 이르기까지 무척 긴장했고 살얼음을 밟는 것 같았다. 틀린 점이나 없는지, 나의 글로 말미암아 마음 아파할 사람은 없는지,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할 일은 없는지…. 이번호에 특별히 그런 넋두리를 하는 것은 제주4·3사건이야말로 너무 극명하게 좌우가 갈려 대치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한국의 현대사는 은원(恩怨)이 너무 깊다. 어느 편에 설 수도 없다. 학자의 소신이니 역사가의 정론이니 하는 것이 참으로 무력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제주4·3사건을 쓰려니 그런 감회가 더욱 새록새
처음 주간조선으로부터 광복 70년을 맞아 해방정국에 대한 글을 연재해 보고 싶지 않으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그 글을 쓰는 동안에 겪어야 할 고생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5년 전에 동아일보의 김학준(金學俊) 사장이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내가 강의하고 있는 ‘잘못 배운 한국사’를 동아일보에 연재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을 때 나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거절했지만 끝내 연재를 시작했었다. 그리고 연구실이 점거당하고, 시위대가 대학의 총장실을 찾아가 나의 파면을 요구하고, 변절
나는 젊은날에 외국인이 쓴 한국사 23권을 번역·주석하여 출판한 적이 있다. 한국사 연구에 기여하는 방법이라는 일말의 소명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먹고사느라고 한 일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미련한 짓을 했는지 꿈만 같다. 그 스물세 권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것이 곧 ‘하멜(Hamel)표류기’이다. 네덜란드 출신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히딩크(G. Hiddink)만 다녀가면 판매 부수가 늘어난다.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간단히 정리하자면 1653년 8월 15일에 제주도 모슬포 앞바다에
1948년, 광복 3년이 지난 해였으니 희망에 부풀어 있을 법도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이 1947년 9월 19일 한국의 독립 문제를 UN 총회에 부의하여 ‘43:0, 기권 6’으로 1948년 3월 31일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결의(11월 14일)했지만, 북한이 UN위원단의 입국을 거부함으로써 분단은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UN은 결국 1948년 8월 15일에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일정에 따라 5월 10일 총선거 실시를 준비하고 있었다.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감격인지 슬픔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남쪽에서
2000년 7월,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나는 집필 중이던 ‘한국분단사연구:1943~1953’의 마지막 보완 작업을 하다가 문득 충남 예산군(禮山郡) 신양면(新陽面)으로 답사를 떠났다. 그곳은 박헌영(朴憲永)의 고향이다. 뭔가 부족한 듯한 원고의 마지막 작업에 대한 영감을 얻고 싶어서 갔다. 머리에는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Toynbee)의 충고가 맴돌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의 역사학은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이 책을 통해 얻은 것보다 더 많다. 그리스 역사의 기술은 더욱 그러했다. 역사학자는 현장을 가보아야
우리가 젊은 날 혼기(婚期)에 이르렀을 때 부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좋은 만남이란 성격이 같은 사람끼리의 인연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부부가 너무 닮으면 못 산다. 성격이 다른 만남이 좋은 배필이다.” 그런데 50년을 살고 보니 문득 그 다른 성격이 닮아 있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이치가 어디 부부 관계뿐이겠는가? 정치적 동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의 경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끓는 가슴을 안고 격정의 삶을 산 김구와 이지적인 이승만의 만남이 좋은 동지였는지 아니면 잘못된 만남이었
이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누구인들 ‘백범일지’를 읽고 가슴 저려보지 않은 사람이 있으며, 이 시대의 나이 먹은 세대로서 이승만 찬가를 불러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 두 거목은 우리에게 그렇게 각인되어 있으며,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이나 숭모하는 사람 모두 그들의 그늘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요즘 들어 두 사람의 역사적 평가는 마치 기세 싸움이라도 하듯이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한쪽은 건국대통령 만들기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기이하게도 진보 진영의 비호를 받으며 역사의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이승만(李承晩)이
1886년 어느 날이었다.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경영하는 고아원에 한 남자가 대여섯 살 된 아이를 데리고 와 자기의 조카라며 맡아줄 수 없느냐고 애원했다. 아이는 작고 병색이 짙었다. 고아원 규칙에 따르면 4세 아래만 받을 수 있어 그 아이는 거절 당했다. 언더우드는 며칠이 지나 아이의 병이 깊어졌다는 말을 듣고 수소문했다. 찾아보니 몸이 말이 아니었다.그는 아이를 고아원에 데려와 병을 간호하고 규칙에 맞지 않지만 맡아 키우기로 했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John)이라 짓고 키웠다. 아이는 명석했다
같은 사물을 놓고서도 생각에 따라 실체가 많이 바뀔 수 있다. 한국 현대사의 논쟁 가운데 미·소 공동위원회가 바로 그렇다. 1945년 12월 26일에 발표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보면 조선에서의 임시정부 수립(제1조), 미·소 공동위원회의 개최(제2조), 신탁통치의 협의(제3조), 2주일 안에 미·소 공위의 개최(제4조)로 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와 신탁통치를 협의한다’고 되어 있지 어디에도 신탁통치를 곧 실시한다는 대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에게는 ‘5년의 신탁통치’라는 단어만 크게 들렸다. 그러한 구
1921년 7월, 무장투쟁으로 독립이 이루어질 희망이 없던 암울한 망명 시절,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느닷없이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고자 한다”는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 윌슨(W. Wilson)에게 제출했다. 정치적 감각이 발달한 사람이었으니 많이 생각한 일이었고, 지난날 은사였던 윌슨에게 허물없이 한 말이었지만 그 파장은 엄청나게 컸다. 통신시설이 정교하지 않던 그 무렵 그의 청원은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미국의 위임통치에 두려고 청원했다”고 잘못 전달되었다. 국내외에서 알 만한 위치에 있던 지도자들도 그렇게
1816년(순조 16년) 9월 초하루, 서해 5도 앞에 이양선 두 척이 나타났다. 호기심에 찬 주민들이 구경을 나갔다. 코가 크고 눈이 파란 선원들이 뭍에 올라 손짓발짓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외국인에 대한 적의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이 배는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리라(Lyra)호와 알세스트(Alcest)호였다. 선장은 맥스웰(Murray Maxwell) 대령과 홀(Basil Hall·1788~1844)이었다. 홀은 서해5도 일대의 해도를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제임스 홀군도(James Hall Group)’라고 지었는데, 이는
1900년대의 초엽, 생산성이 미덕인 초기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보며 많은 기대와 우려에 젖어 있던 학자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막스 베버(Max Weber)였다. 그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포기할 순 없지만 장애 요인을 예언하면서 ‘기독교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1905)을 썼다. 그는 그 글에서 노동자의 과도한 요구와 훈련되지 않은 자유의지의 질주, 그리고 자본가의 탐욕이 자본주의의 미래를 어둡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특별히 세 번째 사항을 강조하면서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하게 살다간 자본가로 세실 로즈(Cecile J. Rh
1889년, 오스트리아의 한촌 브라우나우(Braunau)의 몰락한 귀족 시클그루버(Schicklgruber) 집안에서 아돌프(Adolf)라는 소년이 태어났다. 무슨 연유였는지 그는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아이는 총명했고 잘생겼으며 친구들에게도 상냥했으며 수줍음이 많았다. 목소리가 아름다워 교회 성가대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그의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었으며 재질도 있었다. 그러나 엄혹한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허락하지 않았다. 1903년, 아버지가 죽자 그는 성을 히틀러(Hitler)로 바꾸고 빈에 진출하여 그토록 바라던 빈예술학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