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이철원
일러스트 이철원

“안타깝게도 이번 공채에서는 귀하를 모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취업준비생 시절, 수차례 고배를 마셨습니다. 당시 탈락 문구의 붉은 색깔만으로도 당락을 맞힐 수 있는 정도라 이렇게 긴 글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기에 지금 이 글을 쓰려니 참으로 조심스러워집니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중략) 핵심역량을 제대로 이해하였는지가 우선순위였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핵심역량에 해당하는 적합한 사례를 찾아내서 진실하게 적어주신 분들을 선정했습니다. (중략) 이수그룹에 많은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리며, 앞으로 귀하의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따뜻한 통보

지난 10월 말 중견그룹인 이수그룹의 채용담당자가 서류전형 결과를 발표하면서 탈락자들에게 전한 편지 내용이다. 이 편지는 취업준비생(취준생) 사이에서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여의도에 있는 대기업 본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취준생 정모(26)씨는 이 편지에 대해 “취업에 수십 차례 낙방하며 자존감을 잃고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따뜻한 편지에 힘이 난다”고 했다. 또 다른 취준생 이모(26)씨도 이 편지에 대해 반색했다. 이씨는 “취업에 낙방한 취준생 입장에서는 어떤 위로도 와 닿지 않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통보를 아예 안 하거나, 천편일률적인 멘트를 써놓은 것보다는 진심이 담긴 긴 글이 취준생에겐 힘이 됐다”고 했다.

편지를 작성한 주인공은 이수그룹 HR팀의 유연재(26)씨. 유씨는 기자와 만나 “사실 (우리 회사에서는) 몇 년 전부터 탈락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긴 편지를 써왔다”라며 유독 이 편지가 취준생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이유에 대해 “취업전쟁을 겪은 지 얼마 안 된 사원이 직접 편지를 썼기 때문에 공감대가 넓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유씨는 지난해 1월 이수그룹에 입사해 올해 처음으로 채용 업무를 맡은 새내기 사원이다. 유씨는 “상반기에도 인턴 채용 절차를 진행하면서 몇 달 동안 함께 일한 인턴 중 한 명을 떨어뜨려야 했다”며 “이 편지는 그때 떨어뜨려야만 했던 그 인턴, 혹은 취준생 시절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지난 10월 말 실무진 면접을 진행한 현대차그룹 광고기획사인 이노션 역시 취준생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노션 측은 지원자들에게 면접 수고비와 함께 편지가 든 봉투를 건넸다. 지원자들이 받은 봉투 안에는 면접비 5만원과 함께 이런 내용의 편지 한 장이 있었다. “면접 보시느라 많이 긴장되셨죠? 오늘 보여주신 열정과 의지로 도전한다면 세상 그 어떤 것도 이뤄낼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많지 않은 면접비지만, 친구들과 소주 한잔, 시원한 맥주 한잔하며 즐거운 시간 보내길 바라겠습니다.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드리고 진심으로 좋은 결과 있길 기원합니다.” 이날 면접을 본 길모(28)씨는 “면접비 액수를 떠나서 지원자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회사의 태도에 감동했다”며 “꼭 붙어서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고 했다.

탈락 통보문을 길게 작성해 보내는 데 대해 긍정적 시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장문(長文)의 탈락 통보가 사실은 기업 이미지 챙기기 아니냐는 시각이다. 인터넷 쇼핑몰 업체에서 SNS마케팅 담당 인턴으로 근무하는 취준생 정모(23)씨는 “따지고 보면 기업의 홍보 수단 아닌가. 취준생들을 자사 마케팅에 활용하려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며 “내가 떨어진 기업의 마케팅 수단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취준생 이모(24·여)씨도 “인사 담당자가 먼저 취업전쟁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불합격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듯한 부분은 좋게 봤지만 결국은 회사 이미지 제고를 위한 홍보 같다”며 “매일 불합격의 쓴맛을 보는 입장에서 그 위로 글에 눈물 난다거나 감동받는다든가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인사 전문가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취업에 대한 압박으로 예민해진 취준생을 위로하는 메시지가 취준생에게 해(害)가 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취업포털사이트 ‘사람인’ 임민욱 홍보팀장은 “취준생들은 잦은 낙방을 경험하면서 자신감을 상실해 원래 실력만큼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따뜻한 메시지로 마음을 어루만져 주면 취준생들이 원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점에서 개인과 기업 모두에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본다”고 했다. 취업포털사이트 ‘잡코리아’ 변지성 홍보팀장도 “기업 이미지를 위해 하는 행동이라는 측면도 물론 있지만 긴 통보가 취준생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으므로 삐딱하게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했다.

탈락 사유와 점수를 공개해 구직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기업도 있다. 롯데그룹은 지난해 하반기 공채부터 면접 전형에 올라온 지원자들에게 시험 결과를 그래프화한 점수와 함께 이메일을 보낸다. 역량 면접, 프레젠테이션 면접, 토론 면접, 임원 면접을 하루 동안 모두 치른 후, 면접 영역별로 지원자의 점수와 응시자 평균 점수, 합격자 평균 점수를 그래프로 표시해 스스로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특별히 어떤 점이 부족했다는 코멘트 없이 그래프만 보여줘 정보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아무런 피드백도 제공하지 않는 다른 기업들에 비해서는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이 취준생들의 반응이다. 하반기 공채에 롯데의 한 계열사에 지원해 면접에서 고배를 마신 취준생 이모(27)씨는 “그동안 면접을 보면 막연히 잘 봤다고 생각했다가 탈락해 당황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래프로 표시된 피드백을 보니 내가 ‘PT에서 질문의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구나’ ‘이 점을 더 보완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차가운 통보

반면 연이은 탈락에 지친 취준생들을 더욱 주저앉게 만드는 기업도 있다. 탈락자에게는 합격인지 불합격인지조차 알리지 않는 기업이 대표적이다. 지난 5월 서울 강남구에 있는 외국계 스포츠용품 회사의 여름 인턴전형에 지원한 강모(24·여)씨는 채용공고에 기재된 메일주소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했다. 영문 이력서를 요구해 이력서를 처음부터 새로 써야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는 포트폴리오 제출을 요구해 친구까지 동원해 서 자소서를 썼다. 하지만 예정된 발표 시점이 지나도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 회사에 전화해 물어볼 수도 없었다. 채용공고에 떠 있는 연락처라곤 서류를 제출한 이메일 주소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강씨는 “포트폴리오에 사진도 여러 장 붙이고 공들여 지원했는데 전형 결과조차 알려주지 않아 정말 불쾌했다”고 했다.

내년 2월 대학 졸업 예정인 취업준비생 금모(28)씨는 지난 6월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정부 산하기관 인턴 채용 전형에 지원했다. 우편이나 방문접수로만 서류를 받는 회사라 직접 찾아가야만 했다. 당초 공고에는 서류마감 이틀 후 지원자에게 합격 여부를 개별 통보한다고 써 있었다. 하지만 발표 시점이 지나도 회사는 감감무소식이었다. 틈날 때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느라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질 않았다. 인사팀을 재촉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수십 번 망설인 끝에 전화한 금씨에게 인사담당자는 “아직 결과가 나지 않았으니 기다려라”고만 했다. 공고에 적힌 면접일이 지나도록 연락을 받지 못한 금씨는 결국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 채 면접 일자를 넘겼다. 금씨는 “정말 들어가고 싶던 회사라 일주일 넘게 공들여 자기소개서를 썼다”며 “아직까지 서류 합격 여부를 모른다. 연락이 없어 탈락했다는 추측만 할 뿐”이라고 했다.

지난 5월 말 한 외국계 전자상거래 회사의 여름 인턴십에 지원한 정모(23·여)씨 역시 회사로부터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 정씨는 회사가 공고한 서류 합격자 발표 예정일에 홈페이지에 접속했지만 합격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홈페이지에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함께 지원한 친구가 다음 날 면접을 본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합격자에게만 연락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씨는 “외국계 회사는 불합격자에게 아무런 통보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며 “아무리 그래도 사이트에서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너무하다”라고 했다.

합격했다고 통보했다가 사실은 불합격이라며 말을 바꾸는 기업도 있다. 취준생 A씨는 지난 6월 초 한 대기업 광고기획사의 멘토링 프로그램 최종면접 전형에 합격했다는 휴대전화 문자를 받았다. 다섯 개 기업으로부터 연달아 탈락 통보를 받은 직후 받은 합격 통보라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우수 멘토로 선정되면 인턴 활동 기회도 주어지는 프로그램이라 기쁨은 더했다. 하지만 5분 뒤 회사는 다시 ‘불합격했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기다려도 다른 설명은 없었다. 다음날 직접 전화를 건 A씨에게 인사팀 관계자는 아무런 사과 없이 “불합격이 맞다”는 사실만 확인해줬다. A씨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한 기분이었다”며 “회사에 ‘을’일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NH농협은행은 지난 10월 말 신입행원 서류전형 결과를 발표하면서 1900명의 불합격자에게 합격이라고 잘못 통지해 빈축을 샀다. 합격 통지 업무를 대행한 업체 직원이 합격자 명단을 입력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해 벌어진 일이었다. 이 때문에 NH농협은행은 “비록 대행업체 직원의 실수로 인한 사고이지만 채용기관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있으며 향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은행장 명의로 게시해야 했다.

탈락 이유 알고 싶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취업준비생들은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한 탈락 통보보다 짧게라도 면접 후기나 서류 채점 기준을 밝혀 불합격 이유를 알려주는 통보를 원했다. 탈락 사유를 제공한다면 취준생이 문제점을 파악해 보완한 후 다음 취업 기회에서 보다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취준생 이모(25·여)씨는 “따뜻한 말도 좋지만 핵심역량에 대한 기술이 없다든지, 경험을 살리지 못했다든지 하는 식으로 탈락의 요인을 알려주는 것이 취준생에게는 실질적으로 더 따뜻한 통보 방식”이라며 “특히 면접까지 올라간 사람들에게 면접 후기를 담은 피드백은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다른 취준생 유모(27)씨는 “아무리 좋은 말로 위로해도 탈락은 탈락”이라며 “실제로 도움이 되는 건 부족한 점을 알려주는 인사담당자의 한 줄”이라고 했다.

중견 그룹의 한 인사담당자는 “중소기업은 대부분 적은 인원이 채용 업무를 담당하기 때문에 불합격자들에게 탈락 사유를 설명할 여력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서도 “충분히 여력이 있는 기업들도 지원자들에게 탈락 사실을 고지하지 않아 마냥 기다리게만 만드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다음은 변지성 잡코리아 홍보팀장의 설명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탈락 사유를 일일이 알려주는 것이 번거로울 수 있다. 하지만 구직자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만큼 탈락 사유를 알려주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한 방향이다. 다만 영업이나 홍보처럼 필요한 능력을 계량화하기 어려운 직무도 있는 만큼, 일률적으로 의무화하는 것은 곤란하다.”

채용에 떨어진 이유를 지원자들에게 알리도록 의무화하는 법안도 발의됐다. 지난 2월 신경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대표발의한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다. 법안은 서류심사에 합격했지만 필기·면접시험에 불합격한 응시자에게 불합격 사유를 알려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현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에 계류 중이다. 김형진 국회입법처 입법조사관은 “현재 계류 중인 법안이 500건 정도 되는데 (이 법안은) 우선순위가 높은 법안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탈락 사유를 응시자에게 알리도록 법제화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일단 소수의 채용담당자가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중소기업에는 과도한 업무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 기업마다 뽑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불합격자가 납득할 만한 객관적 이유를 설명하지 않을 경우 법적 분쟁이 발생할 소지도 있다.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의 검토를 맡은 환경노동위원회는 검토보고서에 “구직자에게 탈락 사유를 고지하면 불필요한 구직 노력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개정안의 취지는 타당하지만 구인자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어 구인자의 부담과 구직자의 효용을 비교형량해 도입 여부를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기 때문에 취준생들은 ‘따뜻한 탈락 통보’에 더욱 감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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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진 기자 / 강달해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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