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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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살, 학교도 군대도 취업도 빨랐다. 화학공학 전공을 살려 졸업과 동시에 경남 김해에 있는 선박용 페인트회사 연구소에 입사해 1년이 채 안 됐을 때다. 일은 적성에 딱 맞았다. 팀 분위기도 좋았다. 연구소에서 살다시피 하며 직장 다니는 재미에 푹 빠졌다.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던 만큼 체력은 자신 있었다. 젊고 패기만만했다.

어느 날부터 마른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주일쯤 지나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렵기 시작했다. 업무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였다. 동네 병원에 갔더니 식중독을 의심했다. 엑스레이, 피검사 결과도 이상이 없었다. 기침은 계속됐고 점점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다시 병원을 찾아 CT를 찍어보니 폐와 심장 사이에 혹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종양인 것 같다”고 말하는 의사에게 “종양이 뭐죠?” 되물었을 만큼 ‘암’은 인생사전에 아예 없는 단어였다.

병명은 미만성B형 대세포 림프종이었다. 혈액암의 한 종류인 악성림프종의 일종으로 백혈병 사촌쯤 된다. 림프종 중에서도 공격성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양은 폐를 누를 정도로 커져 있었다. 3기에서 말기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2008년 겨울, 기침이 나오고부터 진단까지 3주가 걸렸다.

부산 출신으로 대한주정판매주식회사에 근무하는 이민각(33)씨가 겪었던 일이다. 지난 1월 24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난 이씨는 180㎝ 키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에게서 병력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유머가 넘치고 유쾌했다.

“집에는 말도 못하고 혼자 병원에 가서 암 진단을 받고 나서 펑펑 울었죠. 암은 그냥 죽는 병으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앞길 창창한 나한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원망스러웠죠. 그러다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사고로 갑자기 죽기도 하는데 병은 고칠 기회가 있으니 한번 부딪쳐 보자. 제가 공대 출신이라 좀 단순해요. 마음먹으면 무조건 돌진! 앞으로거든요. 하하.”

낙천적인 성격은 복이었다. 두려움을 털어내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데 이틀이 걸렸다. 처음에 찾아간 부산 종합병원에서는 희귀암인 ‘흉선암’으로 진단했다. 방사선과 의사도 처음 접한 병명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을 뒤적였다. 안 되겠다 싶어 밤기차를 타고 바로 서울로 올라와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3일 동안 병실을 잡지 못해 대기하는 동안 숨을 쉬지 못해 몇 번 기절을 했다. 병세는 급격히 악화됐다. 젊은 만큼 병의 진행도 빨랐다.

건강에 대한 자만이 화를 불렀다.

항암치료를 바로 시작했다. 다행히 혈액암은 항암제가 잘 들었다. 체력도 한몫했다. “안 될 게 뭐 있노” 해병대 정신도 큰 도움이 됐다. 대부분 입맛이 떨어져 음식을 입에 대는 것조차 힘들어하는데 그는 먹고 싶은 것이 많아 힘들었다. 링거 꽂고 병원 편의점에 가서 군것질하기 바빴다. 주변에서는 그를 보고 “항암 체질이다”라며 농담을 할 정도였다.

항암치료가 끝난 후 조혈모세포 이식을 했다. 일명 ‘골수 이식’이라고 하는 조혈모세포 이식은 과거에는 타인의 골수를 직접 채취해서 이식했기 때문에 공여자를 찾기가 어려웠다. 요즘에는 혈액을 뽑아내 조혈모세포를 채취한 후 환자의 정맥에 주입하는 방법이 일반화되면서 시술이 쉬워졌다. 크게 자신의 혈액을 이용하는 자가조혈모세포 이식과 타인에게 받는 동종조혈모세포 이식이 있다. 자가 이식은 부작용이 적은 반면 재발 가능성이 있다. 동종조혈모세포 이식은 완치율이 높은 반면 자신에게 맞는 공여자를 찾기가 어렵고 합병증의 위험이 있다. 최근에는 반일치조혈모세포 이식까지 하고 있지만 자가·동종 이식보다 거부반응이 아무래도 높다. 그는 미국·일본 등에 비해 우리나라는 공여자가 많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다. “함께 치료받던 환자들 중 공여자를 끝내 찾지 못하신 분들도 계셨어요. 과거 골수 이식처럼 힘들지 않고 헌혈하듯 혈액을 뽑기 때문에 일주일 정도면 회복됩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는 항암치료가 성공적이어서 자가조혈모세포 이식을 했다. 고통스러운 치료과정을 이겨내고 8개월 만에 복직했다. 암에 대해 무지했던 그는 진단을 받은 후 암 공부를 많이 했다. “발병의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암환자들의 사례를 많이 들어보니 공통점이 있었어요. 바로 ‘수면부족’이었습니다. 술자리도 많았고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평균 수면시간이 4~5시간도 안 됐던 것 같아요. 건강에 대해 너무 자만했었죠.”

회사에 복귀하고 6개월 후, 처음 발병했을 때와 비슷한 증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 쉬기가 힘들었다. 처음 종양이 발견된 곳에 그대로 혹이 자란 것이다.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보다 더 절망스러웠어요. 병원에서 재발하면 가망이 없다고 했거든요.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실감이 났죠.”

고기? 없어서 못 먹어요

그는 마음을 추스르는 데도 처음보다 힘들었다고 했다. 얼마나 걸렸느냐고 물었더니 “3~4일 정도?”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타고난 긍정맨이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인지를 알기 때문에 두려움도 컸다. 항암제도 내성이 생긴 탓에 치료가 잘 되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임상실험을 반복하는 동안 잘 듣는 치료제를 찾았다. 방사선 치료도 병행했다. 동생과 DNA가 맞아 동종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은 것도 천운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회복에 전념했다. 좋아하는 일이었지만 화학물질을 다루는 일이라 조심스러웠다. 무균실에서 음식 제한을 한 탓에 몸무게는 15㎏이 빠진 상태에다 면역력도 약해져 있었다.

집에서 걸어서 1시간30분 거리에 있는 편백나무 숲까지 매일 왕복하면서 숲에서 3~4시간씩 시간을 보냈다.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된 후에는 배드민턴을 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하루 1~2시간만 해도 헉헉대더니 재미가 붙고 하루 6~8시간을 해도 거뜬했다. 숲에 있는 배드민턴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재발하고 1년6개월이 지난 2011년, 새로운 직장을 구했다. 처음부터 병력을 밝혔지만 그의 성실함을 봐주었다. 그는 2014년 완치 판정을 받았다. 통상적으로 혈액암은 치료 종결 후 4년, 고형암은 5년이 지나면 완치됐다고 본다.

암 병동에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할 만큼 씩씩했지만 왜 두려움이 없었겠는가? 그에게 암을 극복한 힘을 물었더니 ‘정신력과 체력’이라고 말했다. “암 환자의 경우 음식을 가리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고기든 야채든 무조건 먹고 체력을 키우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고기요? 없어서 못 먹죠. 하하.”

가족들도 그에게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 번도 그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불행에 함몰되지 않고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심지어 어머니는 그가 이식을 받는 기간 회사에서 보내준 포상여행을 다녀올 정도였다. 어머니가 남 모르게 병원 곳곳에 뿌린 눈물은 완치가 된 이후에야 알았다. 무엇보다 투병에 큰 힘이 된 것은 회복한 환자들의 수기였다. 그가 인터뷰에 응한 이유도 다른 환자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라고. 삼성서울병원이 혈액암 완치자들을 대상으로 한 수기 모집에서 그는 우수상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는 두 번의 암도 이겨냈는데 이제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다고 했다.

이민각씨가 암을 극복한 방법

1. 첫째도 믿음, 두 번째도 믿음! 나를 믿고 병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다.

2. 긍정 마인드! 원망하는 마음 대신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3. 의료진을 신뢰하라! 어떤 의료진도 나보다 병에 대해 잘 안다. 100% 믿고 따랐다.

4. 두려움을 털어내라! 병이 낫고 난 이후의 삶을 상상하다 보니 죽음이 멀어졌다.

5. 병에 갇혀 있지 말고 다른 일을 찾아라! 하루 종일 배드민턴 하고 교회 리더십 교육 쫓아다니다 보니 병도 잊었다.

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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