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4일 경기도 동두천시의 보산동 관광특구 거리 풍경.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5월 24일 경기도 동두천시의 보산동 관광특구 거리 풍경.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그래 너는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다/ 국어로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네 모습이 주눅 들 리 없는 합중국(合衆國)이고/ 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 민족/ 가시같이 어째서 너는 남아…/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느냐/ 혼혈아야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아이야’.

김명인 시인의 시 ‘동두천 4’의 한 대목이다.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한 동두천은 미군이 주둔하는 곳이다. 시인은 동두천에 사는 한 혼혈아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표현했다. 동두천은 한국의 기지촌(基地村)을 대표하는 곳이었다. 동두천시는 주한 미군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한다. 1952년 이후 동두천에 주둔해 온 미군 부대가 있는 보산동을 중심으로 기지촌이 형성됐다. 현재 동두천시의 인구는 약 10만여명이다. 1981년 이후 30년간 인구는 2만6000명 정도 증가하는 데 그쳤다. 경제적 개발이 더딘 탓이었다. 동두천은 수도권이었지만 안보상의 이유로 경제개발은 다른 지역에 비해 뒷전이었다. 동두천의 절반에 가까운 면적이 미군 공여지인 이유도 컸다. 동두천시의 면적은 경기도 면적의 0.9%에 해당하는 95.66㎢이다. 이 가운데 미군 공여지가 전체 면적의 42%인 40.63㎢에 이른다. 대신 미군이 동두천에 끼치는 경제적 영향력은 상당히 컸다. 한때 동두천의 전체 근로자 중 30% 이상이 주한 미군 관련 종사자일 정도였다. 현재는 5% 수준으로 낮아진 상태다. 동두천에 주둔하는 미군은 2만여명에 육박했지만 현재는 6000~7000명으로 줄어든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의정부와 동두천에 주둔한 미 2사단 1만여 병력과 주요 장비가 내년 말까지 평택 이전을 앞두고 있다. 미군이 떠나면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곳이 보산동 관광특구지역이다. 1997년 재탄생한 보산동 관광특구는 현재 약 300여개 점포가 미군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다. 지난 5월 23일 경기도 동두천시 주한 미군 캠프 케이시(Camp Casey) 앞의 보산동 관광특구를 찾았다.

“여기 쉽게 못 벗어나”

1호선 보산역 1번 출구에서 내리자 상패로 길목부터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한국 속의 미국이라고 할까. 동두천은 1986년 강석우·안성기·이미숙이 출연한 영화 ‘겨울 나그네’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골목길은 당시인 1980~1990년대 상점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세련된 식당들이 들어선 이태원의 풍경과는 달랐다. 오랜 세월 탓에 알파벳이 떨어져나간 간판이 많았다. 간판에는 kim, lee, ha 등 한국의 성씨를 바탕으로 만든 상호가 대부분이었다. 대낮이어선지 두세 명 정도만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입구에 걸린 ‘보산동 관광특구’란 말이 무색했다. 이국적인 이곳에서는 한국인과 한글은 모두 낯선 대상이었다. 가게 이름은 물론 메뉴도 온통 영어로 적혀 있었다. 결제수단도 원화보다는 달러가 일상적이었다.

이색적인 골목 풍경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기자에게 한 양복점의 노인이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취재를 하러 왔다고 하자 그는 내게 “이제 미군도 찾지 않는 곳인데 뭐 할 게 있다고 여길 왔어?”라며 반문했다. 그는 이곳에서 20년 가까이 양복점을 하고 있다며 자신을 미스터 윤이라고 소개했다.

“지금 파리가 날리는 이곳도 한 십 년 전까지는 전성기였어. 그때는 이 골목길이 미군들로 가득 차서 서로 어깨를 치지 않으면 지나가기가 어려울 정도였지. 나도 그때는 하루에 3~4벌 이상 미군들에게 양복을 맞춰줄 정도였는데 지금은 한 달에 10벌 팔면 많이 파는 거야.” 이 거리에서 십여 년 전 40곳에 달했던 양복점은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다. 현재 6~7곳 정도만 남아 있다. 그도 문을 닫고 이곳을 떠날 생각을 수백 번도 더 했지만 결국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20년 가까이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했는데 장소를 바꿔 한국인을 상대로 장사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그에게는 한국인보다 미국인이 더 친숙한 상대가 돼버린 것이다. 현재 동두천의 캠프 케이시는 평택으로 부대 이전을 하지는 않은 상태다. 그런데도 그 앞의 상점을 찾는 미군들의 발길은 뚝 끊겼다. 거리마다 폐점한 상점이 많았다. 보산동 거리마다 미군의 발길이 끊긴 이유는 무엇일까.

시작은 2004년 이라크 파병이었다. 당시 동두천시의 미 2사단 소속 1개 여단 병력 3600여명이 이라크로 파병됐다. 보산동 상인들은 전례 없이 사라진 미군의 빈자리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미군들로 북적였던 보산동 거리는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보산동 상가의 매출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번 꺾인 기세는 좀처럼 되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케밥을 팔고 있는 한 상인은 “미군이 이전한다는 얘기는 10년이 넘도록 나오던 말이라 이제 덤덤할 정도”라며 “언제 떠날지 모르는 미군 부대 때문에 여기 상인들은 허름한 가게에 대해 투자도 쉽게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현재 보산동 관광특구는 전철 1호선 보산역과 바로 연결돼 있고 버스정류장도 끼고 있을 정도로 교통편은 좋은 편이다. 그런데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호프집을 운영하는 한 상인은 “보산역이 개통하고 나서 미군 손님이 더 줄어들었다”며 “편리한 교통편이 이곳으로 사람을 부르기는커녕 오히려 발달된 신도시로 미군을 내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달라진 미군 시스템 역시 보산동 상가의 매출에 큰 영향을 끼쳤다.

현재 캠프 케이시는 훈련소로 쓰이고 있다. 9개월간 캠프 케이시에서 훈련을 받은 미군은 다시 미국, 일본 등의 부대로 자대배치를 받는다. 2014년부터 캠프 케이시는 9개월마다 주둔하는 미군이 바뀌고 있다. 캠프 케이시 맞은편에서 휴대폰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한 상인의 말이다. “미군들이 9개월마다 동두천으로 오는 특정 시기에만 휴대폰을 바꾸는 손님이 많다”며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에는 해지를 하러 또 몰려든다”고 말했다. 올해에는 2월에 미군들이 캠프 케이시에 입소했다. 미군들은 휴대폰을 개통할 때 한국 손님과는 많이 다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인이 좋다고 추천하는 휴대폰을 개통하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개통날짜가 2~3일 늦어져도 불만 없이 기다린다고 한다.

다른 상점의 경우는 어떨까. 미군이 머리를 자르고 있는 한 미용실에 들어섰다. 팝송과 가요가 오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미용실 한쪽 벽은 흑인들의 헤어스타일 사진으로 도배가 돼 있었다. 사진들은 하나같이 짧은 헤어스타일이었지만 미묘하게 스타일의 차이가 있었다. 이곳의 커트 가격은 11달러이다. 이 미용실의 원장은 “흑인들은 특히 머리의 각을 중요시 여겨서 이마, 귀밑, 뒷머리의 각을 살려서 잘라야 좋아한다”고 말했다. 지금 머리를 자르고 있는 미군도 지난주에 자른 흑인친구의 추천으로 온 것이라고 했다. 캠프 케이시 미군들 사이에서는 투블록 커트가 유행이다. 투블록 커트란 윗머리와 앞머리 부분은 남겨두고 구레나룻과 옆머리를 짧게 치는 헤어스타일이다. 군모를 쓰고 생활을 해야 하는 미군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미용실 맞은편의 공인중개소 역시 미군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곳을 찾는 미군들은 주둔 기간 동안 의정부나 동두천의 아파트를 알아보러 온다. 아파트 월세는 모두 미군 측에서 부담한다. 지원받는 금액은 계급별로 차이가 난다. E1~E4까지는 월세가 최대 145만원까지 지원된다. E5는 155만원, E6부터 170만원 이상 지급되고 있다. 이곳의 공인중개업자는 국가공인자격증은 물론 미군 부대가 심사하는 자격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미군 부대에서 별도의 영어테스트와 인종차별 금지 교육 등을 거쳐야 미군을 상대로 영업을 할 수 있다. 이곳의 한 공인중개업자는 “미군은 물론 한국 사람을 대상으로 상가 계약도 담당하지만 거의 계약이 없다고 보면 된다”면서 “이곳은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고 문 닫는 상점만 늘어나고 있어 현재 3분의 1 이상 폐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 24일 보산동 관광특구의 밤거리 풍경.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5월 24일 보산동 관광특구의 밤거리 풍경.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일 년 중 호황은 미국 독립기념일

보산동 거리에서 만난 상인들은 한결같이 “생계가 위협받을 지경”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렇지만 1년 내내 불황인 이곳도 호황인 날이 있다. 한국 대명절인 추석, 설날이 아닌 미국 독립기념일 7월 4일이다. 독립기념일은 미국이 자유와 독립을 쟁취한 기념일이다. 이 때문에 미군에게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을 끼고 있는 주말은 모두 연휴이다. 보산동 거리가 1년 중 미군들로 가장 북적이는 때다. 평소엔 이곳을 찾는 미군이 거의 없지만 미군을 상대하는 상인들의 자부심은 컸다. 특히 안보 문제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눈빛이 달라졌다. 상인들은 한국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미군에 대해서 얘기했다. 상인들이 한결같이 한 말이다. “자꾸 언론에서 폭행 사고, 성폭행 사건 등 미군들에 대해서 좋지 않게 보도가 많이 됐지만 대부분 매너가 좋은 사람들이다. 자꾸만 북한이 도발하는 상황에서 미군은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하지만 상인들은 안보를 걱정하면서도 생계를 위협받는 자신들의 처지 역시 걱정했다. 이에 대한 동두천시의 대책은 없는 것일까. 현재 동두천시는 쇠락한 보산동 거리를 살리기 위한 대책을 하나둘 내놓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K록 빌리지 조성계획이다. 동두천이 한국 록음악이 태동한 지역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1950~1960년대 미 8군과 동두천 무대를 중심으로 한국 록가수들이 활동했기 때문이다. 한국 록의 대부(代父)라 불리는 신중현이 자신의 대표곡 ‘미인’을 작업한 곳도 동두천이다. 동두천시는 2019년까지 예산 40억원을 들여 보산동 관광특구에 K록 홍보관과 공연장, 연습실 등을 설립할 계획이다. 보산동 거리의 상권 회복을 위한 대책도 있다. 보산동 관광특구를 디자인아트빌리지로 재탄생시킨다는 계획이다. 2020년까지 보산동 거리의 빈 점포에 청년 디자이너를 유치한 공예공방 특화거리를 조성할 방침이다. 동두천시는 침체된 거리를 젊음의 거리로 탈바꿈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운 상태다.

이에 대한 상인들의 입장은 엇갈리고 있다. 고종빈 외국인 관광특구 상가연합회장의 말이다. “물론 동두천시가 대책으로 내놓은 사업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그렇지만 이 낙후된 거리를 아예 헐고 새롭게 재탄생시키는 등 큰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곳은 상징적인 지역이기 때문에 이미지를 바꾸기가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오히려 이곳을 미국을 가지 않아도 미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문화의 거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다른 상인들의 입장도 비슷했다.

보산동 거리에도 밤이 찾아왔다. 손님이 없는 공인중개소, 미용실 등은 문을 닫기 시작했다. 대신 문을 닫고 있던 클럽들이 하나둘 셔터를 올리고 영업을 시작했다. 클럽 입구엔 ‘한국인 출입금지’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클럽을 방문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미군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클럽 입구에는 필리핀 여성들이 나와 이들에게 눈인사를 했다. 문을 닫고 집으로 가는 상인들과 그 뒤로 클럽을 찾는 미군들의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상점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한 상인은 “화려한 간판을 내세운 클럽들도 1시면 모두 문을 닫는다”며 “이 거리는 미군의 일과에 모두 맞춰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보산동 거리는 미군을 위한 거리였다. 상가, 상인, 거리의 분위기 모두 미군을 위해 최적화돼 있었다. 보산동 거리에는 미군은 사라졌지만 미군과 얽힌 상인들의 이야기는 골목마다 넘쳐나고 있었다.

기지촌과 한국 문학

가난과 비애의 현장, 문학에 그대로 녹아

기지촌이란 ‘외국 군 기지 주변에 형성된 촌락’을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의 기지촌은 광복 이후에 주둔한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한국 문학사에서 기지촌은 수많은 작가에게 많은 문학적 영감을 일으켰다. 광복 이후 기지촌은 여러 상징적인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 생계를 위해 미군 부대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그곳에서 나오는 물품들로 생계를 이어갔다. 광복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이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오상원의 ‘균열’ ‘난영(亂影)’, 송병수의 ‘쇼리 킴’, 강신재의 ‘해방촌 가는 길’, 하근찬의 ‘왕릉과 주둔군’ 등이 있다. 기지촌을 바탕으로 반미 정서를 표현한 소설도 있다. 남정현의 ‘분지’, 천승세의 ‘맨발’ ‘황구의 비명’, 조해일의 ‘아메리카’ 등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기지촌을 다룬 작품들도 있다. 복거일의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 윤이나의 ‘베이비’ 등이다. 기지촌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서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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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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