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있는 연탄공장. 기자가 명연식씨에게 연탄 두 장을 건네고 있다.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있는 연탄공장. 기자가 명연식씨에게 연탄 두 장을 건네고 있다.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비록 검은 몸으로 태어났지만 네 몸을/ 불살라 훈기와 온기를 전하니/ 연탄아 연탄아 정말 고맙다/ 너 없이 서민들 어찌 살겠나/ 너 없이 추위를 어찌 견디나//… 검은 몸 붉게 타서 흰 재가 되어/말 없이 실천하는 희생과 사랑/ 너는 죽어서도 좋은 일 하니/ 분별 없는 사람보다 네가 낫구나’.

47년 경력의 연탄배달부 명연식(64)씨가 쓴 시 ‘연탄’의 일부다. “낙서를 해봤다”며 시가 적힌 종이를 수줍게 건넨 그의 손은 굳은살 사이사이 검은 연탄가루가 끼어 있었다.

한때 전국의 안방을 데우던 주역인 연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1989년 이전까지 연간 약 2400만t이 생산되던 석탄은 생산량이 서서히 감소해 2015년에는 176만t이 생산됐다.(산업통산자원부 2016년 9월 ‘석탄산업장기계획’) 30년도 채 안 돼 생산량이 7%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연탄공장은 이제 서울에 두 곳밖에 남지 않았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석유와 도시가스 등에 자리를 내주고 있지만 ‘연탄’은 여전히 유용하다. 난방비를 걱정하는 누군가에겐 없어서는 안 될, 너무도 고마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저소득층에 연탄을 지원하는 연탄은행 ‘밥상공동체 연탄은행’은 국내 연탄사용 가구를 16만8000곳으로 추산한다. 이 공동체는 2015년 한 해 동안 2만670가구에 521만여장의 연탄을 지원했다.

지난 2월 1일, 연탄의 효용성을 눈으로 보기 위해 명연식씨와 함께 연탄 배달길에 나섰다. 오전 8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의 한 농장에 도착하자 명씨가 연탄공장에서 새벽에 실어다 놓은 새까만 연탄들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어두운 색 작업복을 입은 명씨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2.5t 트럭 한 대에 연탄 1300장이 실립니다. 이게 한 차예요. 오늘은 3600장을 배달해야 하니 세 차가 나갑니다.” 그가 펼쳐 보인 장부에는 그날 배달할 리스트가 빼곡했다. 3600장! 생각보다 많아 두려웠지만 마음을 다잡고 하얀 목장갑을 단단히 낀 채 트럭에 올라탔다. 운전석에는 명씨가, 조수석에는 오랜 시간 같이 일해온 그의 아내 김영석(62)씨가 자리를 잡았다.

컨베이어벨트 위 연탄을 옮기는 기자.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컨베이어벨트 위 연탄을 옮기는 기자.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28년 만에 석탄생산량 93% 감소

첫 목적지는 경기도 남양주시의 난을 기르는 농장이었다. 명씨는 사장이 거주하는 비닐하우스 문 앞에 트럭을 주차시켰다. “오랜만입니다 사장님, 1년 만이네요!” 지난 수년간 명씨에게 연탄 배달을 맡겼다는 하우스 사장은 따뜻한 커피를 건넸다. 커피를 다 마신 명씨는 나에게 고무장갑을 전해줬다. 목장갑은 연탄가루가 들어와 손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고무장갑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노란 고무장갑은 연탄가루가 묻어 검게 변해 있었다. 곧바로 하우스 내부 한쪽에 연탄을 쌓기 시작했다.

김씨가 트럭 위에서 연탄을 두 장씩 건네주면 그걸 받아 명씨에게 전달했다. 연탄은 3초당 하나씩 쌓였고 500장을 다 쌓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첫 배달이 끝나고 나니 팔이 살짝 떨렸다. 김씨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평소에 안 하던 일을 해서 그래요. 그래도 할 만하죠?” 하우스에 쌓인 연탄은 연탄난로의 연료로 사용된다. 연탄난로를 사용하는 이유는 전기난로, 기름난로보다 연료비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연탄 한 장의 가격은 580원. 거리에 따라 600원으로 계산되기도 한다. 해당 난로는 5개의 연탄을 사용하기 때문에 3000원이면 하우스 내부에 24시간 동안 온기를 유지시킬 수 있다. 명연식씨는 “농장, 음식점, 공장에서는 난방비를 줄이기 위해 연탄난로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첫 배달이 끝난 후 이동한 곳은 남양주시의 한 국숫집이었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연탄난로를 사용한다. 주문량은 총 400장. 트럭을 연탄창고까지 댈 수 없었기에 연탄집게를 이용해 연탄을 한 손에 4장씩 두 손으로 8장씩 옮겼다. 손잡이를 움켜쥐어야 연탄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됐다. 20여분이 흘러 창고에 연탄을 다 쌓아놓자 이번에는 손가락이 떨렸다. 연탄집게 손잡이가 닿는 손바닥도 따끔거렸지만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다음 배달지로 향했다.

오전 10시30분에 도착한 곳은 음식점이었다. 이곳에서는 고기를 굽기 위해 연탄을 사용한다. 영하의 날씨였지만 연탄집게를 이용해 연탄 300장을 쉴 틈 없이 옮기다 보니 등에 땀이 맺혔다. 거친 숨이 나오기 시작하고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때쯤 오전 배달 1200장이 완료됐다.

연탄을 들고 밝게 웃는 명연식씨.
연탄을 들고 밝게 웃는 명연식씨.

오전 11시, 트럭에 연탄을 채우기 위해 연탄공장으로 이동했다. 서울지하철 1호선 석계역부터 신이문역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아파트단지 사이로 파란 지붕을 한 공장의 모습이 보였다.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에 위치한 연탄공장 ‘삼천리이앤이’는 1968년부터 49년간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연탄을 공급해왔다. 이곳 연탄공장에 있는 쌍탄기는 총 10대. 한 대당 1분에 30회전으로 연탄 60장을 만들어낸다. 한 시간이면 3600장이 생산된다. 삼천리이앤이 관계자에 의하면 1960년대 서울시민이 하루에 사용한 연탄은 약 1000만장에 달했으며 이곳에서만 하루에 약 200만장을 생산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주문량이 줄어 쌍탄기 10대가 모두 가동되지 않는다. 하루 평균 약 30만장이 생산되고 있으며 100여대의 수송 차량들이 공장을 드나든다.

연탄으로 쓰이는 무연탄을 탄광에서 채굴하는 과정은 복잡하지만 세상 밖으로 나온 무연탄이 연탄이 되는 과정은 간단하다. 강원도 태백, 정선 등지에서 25t 트럭을 타고 온 무연탄은 연탄공장 한쪽에 쌓이게 된다. 언덕처럼 쌓인 무연탄을 불도저가 밀어 고르게 부순다. 고운 가루가 된 무연탄은 ‘분탄’이라는 이름으로 쌍탄기 안에서 압착된다. 이어 컨베이어벨트 위로 지름 150㎜, 높이 142㎜, 무게 3.6㎏의 연탄들이 찍어져 나온다.

이날 오전 11시에는 6대의 트럭이 컨베이어벨트 앞에 세워져 있었고 배달원들은 쌍탄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연탄을 싣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 전, 트럭에 연탄 1200장을 옮겨 실었다. 기계적으로 연탄을 두 장씩 쌓는 나를 보고 공장 직원이 웃으며 소리쳤다.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힘을 못 써. 한 번에 네 장씩 옮겨야지!” 네 장을 품에 안고 옮기려고 하자 이내 힘이 풀려 연탄들을 놓쳤다. 동시에 검은 연탄가루가 내 얼굴을 뒤덮었다. 집게를 사용하지 않고 허리와 팔 힘을 이용해 연탄을 짧은 거리에서 옮겼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명씨 부부는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내 20대 젊음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명연식씨는 연탄배달 역사의 산증인이다. “삼륜차를 타고 배달을 시작했죠. 옛날에는 자동차에 히터가 없었어요. 문틈으로도 바람이 들어왔습니다. 연탄 화덕을 가지고 다니면서 조수석에서 연탄을 때웠어요. 연탄가스 때문에 견딜 수 없으면 창문을 열어놓고 추우면 다시 닫고는 했죠.”

47년 경력이 담긴 명연식씨의 손.
47년 경력이 담긴 명연식씨의 손.

47년 경력 연탄배달부의 애환

서울로 올라오기 전, 명씨는 충청남도 예산에 살고 있었다. “옛날에는 나무 땔감보다 연탄이 고급이었죠. 종이봉투에 넣은 쌀을 사고, 연탄은 비싸서 연탄가루만 샀던 시절에는 돈 받고 연탄을 찍어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틀에 연탄가루를 넣고 뚜껑을 덮은 후 망치로 내려치면 연탄이 만들어졌습니다.” 1960년대 예산 일대에서는 “연탄 찍어요!” 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려왔다고 한다. 지금은 연탄이 깨지면 대수롭지 않게 가루를 버리지만 당시에는 가루조차 소중히 모아서 하나의 연탄을 찍어내기도 했다.

서울도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1970년대에는 지금의 서울지하철 1호선 석계역부터 신이문역까지 연탄공장이 나란히 들어선 채 검은 연기를 토해냈다. 연탄을 싣기 위한 트럭들은 공장에서 수㎞ 떨어진 곳까지 일렬로 줄을 서 있기도 했다. 명씨는 “잠실이 재건축되기 전 저층 아파트마저 다 연탄을 사용했다.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5층까지 연탄을 옮기고는 했다”며 서울시내 곳곳에서 연탄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명씨는 1970년대 연탄배달원들의 일화를 들려줬다. 1982년까지는 야간통행금지제도가 있었다. 자동차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1970년대 화물차는 야간에 도로 이동이 가능했지만 연탄 트럭이 서울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울에서 생산된 연탄은 구역 제한이 있어서 경기도로 넘어가지 못했어요. 그런데 연탄공장이 서울에만 집중되어 있다 보니까 주문이 들어올 때가 있었어요. 연탄을 가득 실은 트럭들은 검문소를 몰래 통과했죠. 공포탄을 피해 트럭 수십 대가 도망가는 모습은 장관이었어요.”

지금은 혐오시설로 분류돼 지역주민들의 눈 밖에 난 연탄공장이지만 과거 찬란했던 시절이 있었다. 1966년 연탄가격 통제로 ‘1차 연탄 파동’을 겪은 서민들은 1974년 여름이 닥치기도 전에 집에 연탄을 구비했다. 겨울이 되자 연탄의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아 1974년 ‘2차 연탄 파동’이 일어났고 대도시는 연탄 우선 확보에 집중하는 한편 밀반출을 엄격히 금지했다. 경기도민들은 서울 연탄공장에 연락해 웃돈을 주고 연탄을 주문했고 안양시내 연탄 값은 장당 100원까지 치솟았다.

1980년대에 전국 400여곳에 달하던 연탄공장은 현재 46곳에 불과하다. 서울에는 이문동과 시흥동 두 곳만 남았다. 하지만 경기도에도 동두천에 위치한 동원연탄 한 곳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문동과 시흥동에서 생산된 연탄들로 서울과 경기도 전역을 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씨는 “월동 준비를 하는 성수기인 10월, 11월에는 새벽 4시에 출발해서 다음 날 새벽 1시에 일이 끝난다”며 “한겨울에도 달을 보고 출근해서 달을 보며 퇴근한다”고 말했다.

연탄집게를 사용하면 연탄을 8개씩 나를 수 있다.
연탄집게를 사용하면 연탄을 8개씩 나를 수 있다.

아낌없이 주는 연탄

오전 11시30분에 공장 내부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곧바로 다음 배달지로 이동했다. 두 번째 차로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교회에 1000장, 음식점에 200장을 배달했다. 다시 공장으로 돌아와 연탄을 실은 후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분식집에 200장, 공장에 1000장을 배달했다. 마지막 1000장째에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 연탄집게를 집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군 시절 강원도에서 근무하며 수많은 산을 오르내리고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 일용직 근로자로 일을 해봤지만 하루 종일 쉬는 시간 없는 연탄배달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하루 동안 옮긴 연탄은 정확히 3600장. 근육통을 안은 채 일과가 끝난 시각은 오후 6시였다. 마지막 배달지를 벗어나며 공장 직원에게 “따뜻하게 때세요!”라고 말하며 웃는 명연식씨의 얼굴에는 힘든 하루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검은 연탄가루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이날의 배달지는 연탄난로를 사용하는 음식점, 공장, 농장 등지였다. 농장에서 만난 한 직원은 “연탄이 없어지면 유류비, 가스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서민들이 얼어 죽는다”며 “아직까지는 연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탄난로와 연탄보일러를 사용하는 저소득층 가구에도 연탄은 필수품이다. 김영석씨의 설명이다. “요즘에는 시대가 좋아져서 기업체나 연탄은행에서 저희에게 주문을 하면 저소득층 가정으로 찾아가고 있어요. 주로 경기도 안양이나 성남으로 가죠.”

전국 각지에 있는 연탄은행은 경제적 부담으로 충분한 연탄을 구입하기 어려운 저소득층 가구에 연탄을 무료로 전달하고 있다. 대학이나 기업들 또한 마찬가지다. 보통 ‘사랑의 연탄’으로 불리며 매년 겨울마다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한다. 김영석씨는 “누군가에게 연탄은 생필품이다”라며 한 독거노인을 찾아갔던 일화를 소개했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어려운 사람은 어려워요. 사랑의 연탄이 있기 전에는 연탄 값을 받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지금은 돌아가신 어르신이 차가운 바닥에 이불을 두르고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거든요.”

서민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연탄 한 장이 타는 시간은 약 6시간이다. 하루를 따뜻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2구 3탄 연탄난로 기준 평균 6장이 사용된다. 수명이 다한 검은 연탄은 흰 재가 되어 염화칼슘 대신 빙판길 미끄러짐을 방지해주기도 한다. 연탄이 가정용 연료로 각광받았던 1970년대부터 근 50년간 연탄의 역사를 배달해온 명연식씨에게 연탄이란 무엇일까. “오랜 시간 함께했으니 인생의 동반자죠. 그리고 연탄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잖아요. 죽어서도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연탄이야말로 진정한 사랑과 희생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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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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