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1

경기도 수원 삼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업은행에 다니는 6년 차 직장인 변한솔씨는 주경야독으로 바쁘다. 낮에는 은행업무에 여념이 없고, 퇴근 후와 주말에는 대학에 다닌다. 변씨는 재직자 특별전형을 통해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3학년에 재학 중이다. 화요일과 수요일엔 퇴근하자마자 대학교에 뛰어가서 2~3시간 동안, 토요일에는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거의 하루 종일 강의를 듣는다. 지금까지 재무관리, 회계업무, 상법, 기업법 등의 전공과목을 수강했고, 영어와 스포츠 등 교양과목 수업도 들었다. 다음 학기에는 중국어회화도 수강할 예정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꼭 필요한 과목을 콕콕 찍어서 수강하다 보니 수업 집중도가 높다. 또 강의실에서 배운 내용이 실제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된다.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해주신 사례를 고객과 상담하면서 바로바로 써먹을 수도 있고, 현장에서 먼저 익힌 실무를 이론으로 들으니 일이 더 재밌어진다. 전공 공부가 업무처리 속도를 높여주고 업무 영역을 넓혀주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변씨는 “특성화고는 내 행운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고졸 출신으로서 겪는 직장 내 차별도 느끼지 못한다. 그의 영업점에는 연세대 법대, 경희대 법대 출신 등 쟁쟁한 학벌을 가진 선배들이 많지만 임금과 복지에서 변씨와 동등하다. 또 회사 측에서 변씨의 공부에 대해 양해를 많이 해주는 편이라 지각과 결석도 거의 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시절 우등생 친구와 비교하면 더더욱 자신의 선택이 탁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반이었던 친구는 전교권으로 성적이 월등했고, 변씨는 학교 성적이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8~9년 후, 둘의 인생은 역전됐다. 취업반이었던 변씨는 고소득이 보장된 금융기관에 당당히 취업하고 곧 대학졸업장까지 손에 쥐게 됐지만, 대학반이었던 친구는 서울의 중위권 대학을 나와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취준생으로 있다. 친구가 대학등록금을 쏟아붓는 4년 동안 변씨가 회사생활 하면서 번 돈을 기회비용으로 따진다면 둘의 격차는 더 벌어진다.

사례 2

치과재료 유통업체인 A사는 고졸 출신만 채용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이 회사의 김모 대표는 “첫째, 우리 업무가 대졸 인재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고, 둘째, 좋은 대학 나왔다고 일을 잘하는 게 아니다. 업무는 익숙해지면 된다”는 철학을 지녔다. 그렇다고 이 회사에 고졸 출신만 있는 건 아니다. 15명의 직원 중 두 명은 대졸자다. 고졸자만 채용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지원서를 낸 경우다. 이들은 “고졸자는 아니지만 받아주세요”라며 자신의 학력을 낮추고 입사했다고 한다. 고졸자나 대졸자나 대우는 같다.

A사의 사원복지는 꽤 탄탄하다. 4년간 근무하면 4년제 대졸 취업자들의 평균 연봉보다 월등히 높고, 대학 진학을 원하는 직원이 있으면 학비를 전액 지원한다. 김 대표는 “대학은 무조건 나와야 한다는 당위성을 깰 필요가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관념 속에도 관성이 있다. 졸업장만을 위한 대학은 의미 없다. 왜 모든 사람이 다 대학을 나와야 하나. 일이 적성에 맞으면 능력은 저절로 발휘된다.”

김 대표의 독특한 운영철학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왔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미국 유학 도중 급히 귀국해 생계전선으로 뛰어들었고, 중도포기한 대학에 미련이 많았다. ‘그래도 대학졸업장은 있어야지’라는 생각으로 각고의 고생 끝에 졸업장을 따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의미없었다. 우유배달 아르바이트에서 CEO가 되기까지, 다양한 업종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 보는 눈을 갖게 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살다 보면 공부에만 소질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팀프로젝트에 약하고 앞뒤가 꽉 막혀서 말이 잘 안 통한다. 대학프로필에 속지 말고 실무형 인재를 뽑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특성화고’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2008년. 올해로 10년 차를 맞은 특성화고가 애초의 취지와 목적에 맞게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양상이다. 삼일상업고등학교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취업지도를 해온 김순효 교사는 “특성화고의 취업률이 내실 있게 좋아졌다”며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는 공부를 못하거나 공부를 잘해도 집안형편이 안 좋은 학생들이 특성화고에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특성화고에 대한 열린 사고를 가진 학생과 부모들이 많아졌다. 집안형편이 괜찮고 공부를 잘하는데도 자신의 진로를 적극적으로 찾아서 오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인식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특성화고·마이스터고 취업률은 매년 꾸준히 상승해왔다. 2009년 16.7%에 불과했던 특성화고·마이스터고 취업률은 2011년에는 25.9%로 껑충 뛰었고, 2013년엔 40%대(40.9%)로 올라섰다. 2016년 취업률은 47.2%, 대학 진학자를 제외한 취업률은 72%에 달했다. 이는 대졸자의 취업률인 67%보다 높은 수치다. 청년취업률이 해마다 낮아진다고 아우성이지만, 특성화고·마이스터고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하다. 직업계고의 취업률은 이런 기류에서도 매년 꾸준히 상승했다.

재미있는 것은 특성화고·마이스터고의 진학률과 취업률의 추이다. 10년 전만 해도 진학률이 취업률을 월등히 앞섰으나 지금은 완전히 역전됐다. ‘고교 직업교육 대상자 취업률 및 진학률’을 보면 2009년 73.5%였던 진학률은 매년 눈에 띄게 떨어져 2012년에는 50.8%로 급감했고, 2013년에는 41.6%로 떨어지더니 지난해에는 34.2%에 머물렀다. 반면 취업률 그래프는 진학률과 반비례한다. 2013년에는 취업률과 진학률이 거의 비슷하다가 이듬해부터 역전되더니 점점 상승세다. 이 수치는 두 가지로 풀이된다. 하나는 간판만을 위한 대학이 의미가 없어지고 있으며, 또 하나는 ‘선(先)취업 후(後)진학’ 제도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것.

특성화고·마이스터고 현장에서 빛을 발해가는 제도가 바로 ‘선취업 후진학 제도’다. 선취업 후진학 제도는 특성화고나 마이스터고를 졸업하고 산업체 근무경력이 3년 이상인 재직자가 지원할 수 있는 전형으로, ‘재직자 특별전형’이라고도 한다. 산업체 근무자가 필요에 의해 다니는 대학인 만큼 실무 위주의 학과가 오픈돼 있다. 이 전형으로 갈 수 있는 대학과 학과는 점점 많아지는 양상이다. 고려대 건축학과·기계공학부·산업경영공학부·생명공학부·생명과학부·식품공학과·신소재공학부, 경희대 국제통상금융투자학과·문화관광산업학과·조리산업학과, 가천대 경영학과, 건국대 신산업융합학과 등이 열려있고 중앙대,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홍익대학교도 갈 수 있다. 이 외에도 경상대, 경일대, 계명대, 국민대, 동국대, 성신여대, 숙명여대, 숭실대, 아주대, 호서대학교 등 91개 대학이 재직자 특별전형을 실시하고 있다.

재직자 특별전형을 통해 대학에 가는 학생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2010년에는 180여명에 불과했던 재직자 특별전형 신입생이 2012년에는 400명 가까이 되더니 2014년에는 1300여명이 입학했다. 2016년 입학생은 무려 2000명 가까이에 달한다. 무조건 대학에 진학하기보다는 취업 먼저하고 필요한 경우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얘기다.

취업률에서 월등한 성적을 보이는 곳은 마이스터고다. 특히 마이스터고에 도입한 ‘산학일체형 도제학교’에 대한 호응이 높다. 산학일체형 도제학교란 독일과 스위스의 기업 교육 방식인 도제식 교육훈련을 우리나라 현실에 맞게 도입한 제도로, 고2부터 학생이 기업과 학교를 오가며 교육훈련을 받는 현장 중심의 직업 교육훈련 모델이다. 이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2015년. 성과는 어땠을까? 지난 2월 16일 교육부는 2년간 9개의 마이스터고를 대상으로 시범 운영한 결과를 발표했다. 불과 2년간의 시범운영이었지만 성과가 분명했다. 도제반의 취업률은 79.8%로 비도제반 취업률(47.74%)보다 두 배 가까이 높았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2017년부터는 ‘산학일체형 도제학교’ 시스템을 198개로 확대 운영하게 된다.

기업체 CEO 역시 도제학교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도제학교에 대한 CEO들의 초기 만족도는 16.7%였으나 최근엔 66.6%로 상승했다. ㈜에스비비테크 이부락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일을 하는 산학일체형 도제학교 시스템이 현장에 혼란을 주지 않을까, 학생들을 안전하게 교육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독일 연수를 통해 도제 시스템이 국가와 기업, 학교가 하나가 되어 국가 산업발전에 이바지하는 선진시스템이라는 것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2년간의 교육을 통해 회사에 적합한 맞춤형 인재를 양성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아직은 만세를 부를 때가 아니다?

한편 이면의 목소리도 들린다. 고졸만세를 외치는 분위기에 ‘아직은 만세를 부를 때가 아니다’라며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취업 현장에서는 고졸 취업자에 대한 차별대우가 여전하고, 고졸 취업률의 상승은 양적 상승일뿐 질적인 면에서는 아직 멀었다는 지적이다. 물론 맞는 지적이다. 그러나 특성화고를 내실 있게 다지기 시작한 역사가 채 10년이 되지 않은 현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제도가 아닌 인식의 차원이다. 인식은 늘 제도 뒤에서 좇아간다. ‘특성화고’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2008년. ‘상고·공고’라는 다소 구시대적인 어감을 걷어내고 ‘특성화고’로 새 옷을 입혀 취업 역량을 강화한 고등학교를 제대로 육성해 보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지 채 10년이 안 됐다. 거시적 안목이 요구되는 교육계에서 10년은 획기적 인식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중요한 것은 대학을 바라보는 견고한 당위적 편견이 서서히 깨지고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고졸 취업생을 바라보는 기업의 시선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대학간판은 필수’라는 인식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도적 차원을 보자. 양질의 고졸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제도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 또한 해마다 개선되고 있다. 대기업과 공공기관 등에서 고졸 취업생을 점점 늘려가는 추세다. 2016년의 경우 고졸 취업자의 20% 정도가 대기업 및 공공기관과 공무원직에 취업했다. 국가직 및 지방직 공무원의 경우 고졸 채용자 규모가 4년 새 30% 이상 늘었다.(2012년 349명→2016년 500명) 중소기업도 마찬가지다. 앞서 사례에서 든 A사처럼 ‘학벌보다 능력’ ‘대학간판보다 적성과 인성’을 우선시하는 기업이 많아지고 있다. 입사지원 서류에서도 학벌기재란을 없애는 기업들이 늘고 있는 것도 같은 차원이다.

학교 현장에서도 이런 변화가 확연히 감지된다. 2016년 현재 특성화고·마이스터고는 모두 592개교. 일반계고등학교(1765개교)의 4분의 1 수준이다. 일반계고등학교 현장에서는 특성화고에 대한 수요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서울 성북구의 한 일반계고에서 ‘직업위탁반’을 담당하는 김모 교사는 “특성화고 수업을 원하는 학생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학교는 고3을 대상으로 직업위탁반을 운영하는데, 한 학년의 15% 정도가 이 반에 속한다. 일주일 중 하루만 본교로 등교하고 나머지 4일은 직업거점학교로 등교한다. 산업정보학교, 지역별기술원, 항공전문학교, 호텔전문학교로 가는 학생도 있고, 대학에서 운영하는 위탁과정에 참가하는 학생도 많다.”

일반계 고교의 직업위탁반

일반고에 남아서 점수에 맞춰 아무 대학에 가느니 실용성을 따져 꼭 필요한 직무능력을 향상시키겠다는 학생들이 많아진다는 얘기다. 김 교사는 “이런 현실을 감안해 고교과정 중간에 정식으로 진로변경이 가능한 제도가 도입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일반고 졸업장 취득을 위해 주1회 의미 없는 등교를 하느니 아예 특성화고나 위탁학교로 전학이 가능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확실히 특성화고·마이스터고 출신의 취업 성공 사례는 점점 늘고 있다. 질적 성공뿐 아니라 양적인 면에서도 개선되는 추세다. 분위기에 휩쓸려 대세를 따르기보다 분명한 철학을 갖고 ‘자기만의 길’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많아진다는 얘기다. 느리지만 ‘학벌중심사회’에서 ‘능력중심사회’로 서서히 이동하는 움직임이 분명 감지된다.

이런 움직임은 점점 강해질 전망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사회에서는 어중간한 지식노동자들이 설 자리를 잃는다. AI(인공지능)를 다루는 직업, 컴퓨터 메커니즘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창조적인 일,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손재주를 가진 장인들은 살아남지만, ‘간판뿐인 대학졸업생’은 백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추세에서는 직무연관 스킬을 연마한 특성화고·마이스터고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 갈길이 멀다. 우선 선취업 후진학을 바라보는 기업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금융권 등 일부 기업에서는 대학과 연계해 적극적으로 직원의 업무역량 강화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지만, ‘근무에 할애할 시간에 대학 간다’는 인식이 여전하다.

삼일상고 김순효 교사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더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일부 선각자 부모들과 기업들은 특성화고의 가치를 알아보지만, 아직 ‘못살고 힘든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라는 편견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더 많다. 특성화고가 어떤 곳인지 열린 사고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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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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