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
[2484호]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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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중생활] 유창종 변호사의 와당(瓦當)

‘기와 검사’가 된 ‘마약 검사’ 30년 수집 박물관 만들어

▲ 지난 11월 16일 유금와당박물관에서 만난 유창종 변호사. 오른쪽에 고구려 도깨비얼굴무늬마루끝기와가 보인다. 아들 이우치씨가 아버지 이우치 선생을 보내며 영정 옆에 세워뒀던 기와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이젠 ‘유 관장’으로 더 자주 불리는 유창종(72) 변호사는 직접 연주했다며 녹음한 단소 곡을 들려줬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소 소리에 귀 기울이듯, 서울 부암동 유금와당박물관 위로 11월 16일의 겨울 해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2003년 검찰을 떠난 유 변호사가 5년 후인 2008년 세운 사설박물관이다.
   
   ‘그들의 이중생활’ 연재를 준비하며 각계 인사들에게 인터뷰이 추천을 부탁했다. 법조계에선 이구동성으로 유 변호사를 꼽았다. 그는 검찰 재직 시절부터 ‘기와 검사’로 불렸다. 검사 일을 하는 한편 기와 연구에 매진해서다. ‘마약 검사’란 별칭도 있었다. 마약 생산조직을 일망타진, 마약 생산국이던 한국을 1년 만에 마약 청정국 반열로 끌어올린 덕이다.
   
   기와와의 인연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8년 청주지검 충주지청에서 근무하던 시절이다. 기와에 관심이 있던 차에 충주 탑평리에서 출토된 연화문 와당을 직접 보게 됐다. 놀라웠다. 어째서 한 개의 기와에 백제·고구려·신라의 양식이 모두 담겨 있는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와당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와당(瓦當)은 여러 가지 기와 중에서 끝부분을 마감하는 막새기와를 뜻한다. 그림이나 문자가 새겨져 있다. 시대와 지역별로 문양이 다르다. 암막새와 수막새로 나뉜다. 왜 하필 와당이었을까.
   
   “처음엔 와당의 문양만 봤는데 나중엔 그 배경에 있는 문화에 눈길이 갔다. 사실 와당은 잘 안 보이는 곳에 매달려 있다. 그런 곳에까지 공들여 장식을 했단 얘기다. 와당이 왕권의 상징인 이유다. 왕이 출입하는 건물에만 와당을 썼다. 지도층의 사상, 나라의 종교가 와당 문양에 담겨 있다. 불국토(佛國土)를 이루고 싶으면 연화문을 새기는 식이다.”
   
   유 변호사 와당 연구의 공간적 원류가 충주라면 정신적 원류는 일본인 수집가 이토 쇼베다. 1910년대부터 조선 와당을 수집했다. 특히 평양 부근에서 출토되는 와전(瓦全)을 집중적으로 모았다. 고구려시대에 골몰한 셈이다. 일본으로 실어가 전시회를 열었다. 와전은 기와와 전돌을 뜻한다. 이토가(家)의 가세가 기울자 수집품은 잠시 어느 사업가의 소유로 넘어갔다. 1964년, 조선 와당은 드디어 내과의사 이우치 이사오 선생을 만난다. 이우치 집안의 소유가 된 이토 컬렉션은 이우치 자택 내 전용 전시실에서 세월을 맞는다.
   
   
   이우치家와의 인연
   
   이우치 선생은 한국과 한국 전통문화를 아꼈다. 진료를 하며 일 년에 예닐곱 번씩 한국을 다녀갔다. 수집품은 점점 늘었다. 자연스레 한국의 와당 연구자들과도 친분을 나눴다. 198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집품의 절반에 해당하는 1082점을 기증했다. “한국의 것은 한국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깊은 취지와 학문적 양심 때문이었다.” 이우치 선생의 아들 이우치 기요시가 이때를 회고하며 한 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은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던 박물관에 이우치 전시실을 설치하는 걸로 선생의 기증에 화답했다. 여기서부터 유 변호사와 이우치가(家)의 인연이 시작된다. 유 변호사의 얘기다.
   
   “이우치 컬렉션을 도록으로 보고 충격받았다. 대단한 컬렉션이었다. 낙심하지 않고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와전 수집과 연구에 매진했다. 고구려시대는 이우치 쪽이 훨씬 좋았지만, 다른 부분에선 처질 게 없을 정도로 수집품이 늘었다. 2002년 한·중·일 와전 1837점을 국박에 기증했다.”
   
   새로운 만남이 유 변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사 그만두고 법무법인에 들어갔다. 월급이 많더라. 다시 와당을 모으기 시작했다. 일본도 자주 찾았다. 곧잘 들르는 오사카 골동품 가게가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곳에서 연락이 왔다. ‘이우치 컬렉션 남은 절반을 인수할 생각이 있나.’ 아내는 이 제안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더라.” 1992년 이우치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우치 기요시씨는 아버지의 영정 옆에 귀면문 와당을 나란히 세워 아버지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치과의사인 아들 이우치씨는 직업뿐 아니라 한국 문화에 대한 애호까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신혼여행도 한국으로 왔다. 가문의 수집품이 흩어지진 않을까, 이우치씨는 와당을 정리하기로 했다. 골동품상을 중간에 두고 아들 이우치와 유 변호사 사이에 협상이 시작됐다. 유 변호사의 말이다. “컬렉션을 값으로만 따지면 가격은 상상할 수 없다. 가족이 있지 않나. 집까지 팔아 기와를 살 순 없었다. 이우치씨에게 뜻을 전했다. ‘돌아가신 이우치 선생은 절반을 무상으로 한국에 기증했다. 그 아들이 와당을 비싼 값에 팔거나 일본에 기증하면 아버지가 좋아하시겠나. 나에게 기증해라. 사례로 앞으로 2년 동안 버는 돈을 몽땅 주겠다.’ 답이 왔다. 원하는 금액을 고민해서 알려주겠다고 하더라.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조바심이 났는지 모른다.”
   
   얼마 후 연락이 왔다. 유 변호사가 마지노선으로 생각했던 금액의 딱 절반이었다. “계약 후 이우치씨 집에 찾아갔다. 표정이 별로 안 좋더라. 와당과 나의 인연, 그동안 연구해온 과정, 와당에 대한 생각을 털어놨다. 얼굴이 점점 풀어지더라. ‘어떻게 우리 아버지와 철학이 이 정도로 같을 수 있나.’ 나중엔 운송비도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하더라.”
   
   와당 1296점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보관이었다. 창고에 넣어두려 인수한 건 아니었다. 재차 국박에 기증할까도 했지만 국박 측에서 조심스러워했다. 이전에 기증한 와당도 일부만 전시하고 있는 터였다. 공기업에 기증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직접 박물관을 지었다.
   
   크게 보면 검사라는 업의 본질과 기와 연구는 다르지 않았다. “와당 연구도 결국 수사할 때 증거물 연구하는 것과 같더라. 이 와당이 언제 어디서 만들어졌나,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립하는 거다. 범죄 현장의 증거 한두 개로 범죄 상황을 추론하는 것과 똑같더라. 돌아보면 역사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시각으로 기와를 볼 수 있었다.”
   
   역으로 와당 연구는 검사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검사 시절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다. 큰 사건이 터지면 말도 못 한다. 와당을 들여다보며 어른스러워졌다고 할까, 고대인들의 사상과 철학과 종교에 대한 자세를 배웠다.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중수부장 하면서도 사건 때문에 잠을 못 자거나 밥을 못 먹은 적이 없다. 와당에게 감사하다 절하고 싶다. 지혜와 용기를 얻은 덕에 다가오는 여러 현상들을 담담하게 대할 수 있었다.”
   
   이제는 흘깃 보기만 해도 어느 시대 기와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볼 수 있다. “진품과 가품이 뭐가 다른지 설명하긴 힘들다. 그냥 보면 안다.” 더 이상 수집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관심 있는 시대나 국가별 거의 모든 와당을 다 모았다. 일본 와당은 너무 비싸져서 수집을 포기했다. 이젠 교육에 중점을 둔다. 한 해에 초·중·고생 2000여명이 와당박물관을 찾는다.” 유 변호사는 중국과 일본의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통역 없이 중국어와 일본어로 직접 했다. “와당을 둘러싼 한·중·일의 교류사와 특색을 알려주고 싶었다. 2005년부터 중국어를 공부했다.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중국 대학에서 강의했다. 2011년부터는 일본어를 배웠다. 2012년부터 도쿄예술대학 석·박사과정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다.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에 가면 칙사 대접을 받는다. 박물관장들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온다. 한국 대학에선 안 부르더라.”
   
   그는 사학계의 반목을 안타까워했다. “재야 사학자와 강단 사학자가 대립하고 있지 않나. 학문적 비판이 아니라 인신공격이 오간다. 특히 고대사를 두고 입장 차가 크다. 고조선의 수도를 두고 한쪽은 요서나 요동 부근에 있었다 하고, 다른 쪽은 평양이었다고 주장한다. 근래에는 이동설 쪽으로 기우는 모양새다. 나도 이동설에 찬성한다.”
   
   
▲ 신라 연화문 수막새. 유창종 변호사가 본격적으로 와당의 세계로 들어선 계기가 된 기와다. 충주 탑평리에서 출토됐다. photo 유금와당박물관

▲ 고구려 연꽃사람얼굴무늬 수막새. 연꽃 무늬에서 불교의 영향이, 사람 얼굴에서 도교의 영향이 보인다. 평양에서 출토됐다. photo 유금와당박물관

   ‘청출어람’ 한국 문화의 특징
   
   유 변호사는 와당으로 책도 냈다. ‘동아시아 와당문화’(2009), ‘와당으로 본 한국 고대사의 쟁점들’(2016)이다. “법조인 아닌가. 두 번 세 번 검증하며 글을 썼다. 지난해 두 번째 와당 책을 내고선 국내 주요 사학자들에게 보냈다. 아무도 여기에 반응을 안 보이더라. 국내 학계에선 아무도 내 책을 언급하지 않는다. 일본에선 기와 전문가가 번역하겠다고 했다.”
   
   한·중·일 와당은 어떻게 다를까. “와당 문화는 중국에서 시작해 한국으로 들어와 다시 일본으로 전파됐다. 일본은 기존의 와당을 정교하게 만드는 식으로 계승했다. 한국은 다르다. 개성을 가미해 재창조했다. 청출어람이다. 깨닫고 보니 청출어람은 모든 시대에 다 있더라. 고구려의 벽화, 신라 금관, 통일신라의 석굴암과 다보탑, 고려의 불화와 청자…. 이 특징을 중국과 일본에 일깨워줬다.”
   
   30여년간 와당을 마주 대하며 느낀 건 무엇일까. “지구에 온 이상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걸까, 이 질문의 답이라고 할까.”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걸까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구에 여행 온 것 아닌가. 성공한 여행은 뭘까. 많이 보고 경험한 것 아닌가. 풍부한 삶을 산 사람이 객관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구체적으론 이렇다. 첫째, 문화적 품격이 있어야 한다. 둘째, 삶의 범위가 넓어야 한다. 생활과 사고의 범위가 넓어야 한단 얘기다. 3000년 전 역사도 들여다봐야 하고, 내가 죽은 후의 세계도 생각해야 한다. 셋째, 개성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남의 걸 모방한 와당엔 아무도 관심을 안 갖는다. 넷째, 깨우친 사람은 깨우침을 나눠줄 책무와 권리가 있다. 우리 후손이 살 세상을 개선해야 한단 얘기다. 혼자 집안에서 공기청정기 틀고 살면 뭐하나, 밖에 나가면 먼지투성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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